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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58화 (58/181)

58화

검은머리 기사왕 58화

한참 동안 바깥을 살피던 중년 남성이 은신처로 삼은 동굴로 들어왔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잠이 든 오목눈이를 조심스럽게 눕히며 남편을 향해 물었다.

“밖은 어때?”

“오크 놈들이 사방천지에 깔렸어. 드디어 전쟁이 일어나려는 모양이야.”

“하필 이럴 때······.”

화전민 출신인 부부는 전쟁의 화마를 피해 한참 피난을 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같이 움직인 행렬이 매복 중인 오크들의 습격을 받고 말았는데,

운 좋게 도망치던 와중 우회로까지 막혀 동굴 안에 갇혀 버리는 신세가 되었다.

급히 도망친 탓에 얼마 남지 않은 식량, 함부로 불을 피울 수가 없어 그대로 감내해야 하는 북방의 추운 겨울.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을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하지만 부부는 생존이 위협받는 급박한 순간에도 본인이 인간임을 잊지 않았다.

“너무 이쁘지 않아?”

“응, 그러게.”

“우리 딸이 살아있었다면 딱 이 또래였을 텐데. 손이 정말 작다.”

가까스로 살아남아 숲으로 도망쳤던 부부는 우연히 부모를 잃고 주변은 헤매고 있는 오목눈이와 마주쳤었다.

생존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외면했어야 할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딸을 잃은 과거가 있는 부부는 아이를 두고 올 수 없었다.

참으로 안쓰럽다.

여성은 앞을 보지 못하는 오목눈이의 얼굴을 조용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계속 엄마를 찾던데.”

“거기 상황은 잘 알잖아.”

아이는 계속해서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울먹이며 내뱉은 말을 듣자 하니, 친부모는 아이를 살리고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 분명했다.

살육과 절망이 판치는 험난한 세상에 홀로 남게 되어버린 오목눈이.

부부는 마치 하늘이 내려준 운명처럼 그런 아이를 거두기로 했다.

“우리가 보살펴주자.”

“······그래.”

조금만 버티면 될 것이다.

화전민 마을에서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부부는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추위를 버티었다.

모든 것을 죽이는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인간은 또 다른 인간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눈은 내리고 또 내린다.

겨울을 기침한 어머니 북방은 알 수 없는 운명을 이들에게 점지하는 듯했다.

* * *

“야 이 새끼야! 더 깊숙이 못 박아? 전우들 다 뒤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아, 아닙니다!”

“대답할 시간에 더 움직여!”

살벌한 얼굴로 다가온 선임병 지시에 신병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하지만 이내 제 잘못을 깨닫고 깊숙이 박지 못한 말뚝에 힘껏 망치질했다.

선임병 말대로 이 말뚝이 무너지면 기병 돌격에 방진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망치를 쥔 병사들은 마치 제집을 짓는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말뚝을 박았다.

따악! 따악!

거기 제대로 인해!

숙영지 오크 전부를 집결시킨 총독 오그마르가 드디어 대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물론 그 움직임만을 기다렸던 북방군은 신속하게 남하했고 저번 전투와는 다르게 경사가 진 언덕 위에 진을 쳤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놈들이다.

겨울이 더욱더 매서워짐을 느낀 나는 수비적인 전술을 취하고자, 보란 듯이 원형 진을 짜고 방어선 구축을 명령했다.

‘태산처럼 묵직하게.’

방진 앞에는 기병이 함부로 돌격할 수 없도록 날카로운 말뚝을 촘촘히 박았고,

진 뒤쪽으로는 궁수들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수 있도록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그러자 군의 배치 형태는 자연스레 방어선을 따르는 대열로 꾸려져 마치 작은 목책 성 연상케 하는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몸을 잔뜩 웅크렸다 해서 적을 요격할 수단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방심한 적을 단번에 박살 낼 수 있는 흰 뿔 사슴 기병대가 있었다.

‘화마처럼 맹렬하게.’

노스플롬에서 보내준 흰 뿔 사슴들을 기병들을 꾸준히 편제해 규모를 늘렸다.

거기다 이번에 대거 합류한 퇴역 기사들까지 임시로 배속시켜 언제든지 출진할수있도록 방진 안쪽에 숨겨두었다.

망치와 모루 전술을 즐겨 쓰는 오크 놈들로선 속이 터질 것이다.

정면으로 공격하자니 언덕과 궁수들이 거슬렸고 측면을 우회하자니 원형의 측면이 존재할 리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철저한 준비를 해두었음에도 우리는 승리를 낙관할수없었다.

모든 오크 집결시킨 오그마르의 군세는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충분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실수 한 번이면 모든 게 끝이다.

이뤄놓은 게 많고 희망이라는 게 생겼기에 도리어 실패할 거란 두려움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동요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제 형제가 된 전우들을 믿었고 북방 왕국의 재건이라는 기적을 일으킨 우리의 새로운 왕 눈투성이를 믿었다.

‘우리는 하나다.’

북방군은 그렇게 정해진 일을, 정해진 위치를 지키며 전쟁을 준비했다.

오직 얼굴에 감도는 비장함만이 굳건한 그들의 각오를 엿볼 수 있었다.

늦은 밤 열린 마지막 회의.

회색 늑대가 입을 열었다.

“정말 여기까지 왔군.”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는 막힘이 없었지만, 역설적으로 최후 결전에서 펼칠 전략 전술에는 많은 의견이 있었다.

그만큼 적의 군세가 많기도 했고 워낙 지형적 변수도 다양했기 때문이다.

전면전이냐, 스프링 로드를 무대로 한 수성전이냐, 아니면 우리가 공세를 취하냐.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닌 지휘관들이 모인 만큼 다양한 의견들이 많았다.

물론 손실과 피해를 줄이는 것이 1순위인 우리는 현 상황처럼 안전하고 보수적인 중도적 전략을 채택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아쉬움으로 남는 게 있다면 지휘관 중 유일하게 눈투성이만 개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요.’

‘누구나 처음은 있다.’

어차피 최후로 결정된 방안은 지휘관들이 내놓은 모든 의견을 종합해서 만든 것이다.

대대로 전해진 전통이기에 굳이 부담을 느낀다거나 말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눈투성이는 무언가를 고민하기라도 하듯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지금은 중요한 때잖아요. 혹여나 판단을 어지럽힐까, 겁이 나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구나.’

평소 나이와 맞지 않게 정말 현명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는 눈투성이다.

이러는데에도 다 이유가 있을 테니,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자리를 파했다.

“더 보고할 건 없나?”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로 때가 되었다는 듯 탁자 위에 올려둔 투구를 다시 쓰며 각자가 맡았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다각! 다각! 다각!

하지만 그 순간 조용하던 막사 밖으로 굉장히 다급한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익숙한 경비 부장이 급히 사슴을 빌려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회의 중 정말 죄송합니다! 급히 전해드릴 소식이 있어 직접 찾아왔습니다!”

하루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이다.

지휘관들은 의문을 표하며 기별 없이 막사로 찾아온 부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쉰 그는 급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거친 귀리 경이 돌아오셨습니다!”

“······뭐?”

“그, 그리고 동행이 있으십니다. 본인을 기억하는 새라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거친 귀리가 기어코 재상을 데리고 왔다.

분위기는 순간 얼음장처럼 변했고 깜짝 놀란 이들은 전부 내 눈치를 살폈다.

왜 하필 전쟁을 앞둔 지금이란 말인가.

나는 짙은 한숨과 함께 최대한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래, 어차피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괜한 감정적 동요로 눈투성이와 지휘관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부장을 향해 물었다.

“온 것을 알고 있는 자는?”

“저와 초병들뿐입니다.”

“······조용히 막사 뒤쪽으로 데려와라.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알아서 좋은 것 없다.

나는 이번 일을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고자, 눈투성이와 회색 늑대를 제외한 전부를 일단 개인 막사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막사를 나서자, 눈투성이가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 *

수도 스노우가든에서 최후의 항전을 이어가던 과거 어느 날, 내 방을 찾아온 기억하는 새는 분명 내게 물었었다.

‘검성, 만약 기사왕을 따르지 않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었나요?’

‘그럴 걸 왜 묻습니까?’

그때 당시는 재상이 참으로 의미 없는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어쩌면 갈수록 나빠지는 왕국 상황에 세상 모든 것이 미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슬픈 얼굴을 한 그녀를 향해 매몰찬 대답을 남겼고 이내 또 오크와 싸우기 위해 치열한 전쟁터로 나갔다.

‘재상?’

하지만 다음 날 돌아온 왕국은 싸늘했다.

기억하는 새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앞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이다.

만약 거기서 반대로 물어봐 주었다면 그녀는 그대로 있어 주지 않았을까.

나는 그날의 기억을 잊고 싶음과 동시에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었다.

섭섭함, 슬픔, 반가움, 기쁨.

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휘몰아치는 복잡함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재회라는 건 늘 그렇다.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항상 바람처럼 불어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다.

나에게는 그녀가 그랬다.

사박, 사박, 사박.

“정말 죄송합니다, 경.”

거친 귀리가 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부탁을 잊고 멋대로 행동한 죄를 처하며 두 눈을 질끈 감는다.

하지만 정작 내 시선은 거친 귀리가 아닌 그 옆에 한 여성을 향했다.

기억하는 새, 9년 만에 다시 재회한 재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이 없다.

그녀는 여전히 고고하고 아름다웠으며 그때 그날처럼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명한 눈빛은 마치 녹슨 검날처럼 불투명했다.

무슨 일이 있다.

기억하는 새가 지녔던 근본과 영혼을 통째로 바꾼 커다란 변화가 말이다.

무릎을 꿇은 거친 귀리가 입을 열었다.

“경,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듣겠다.”

이건 거친 귀리도, 눈투성이도, 회색 늑대도 아닌 오로지 내 과거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듣고 판단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하는 새 또한 마찬가지인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털썩.

“·········지고한 검성.”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눈과 흙으로 더러워진 바닥에 이마를 맞대며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예를 취했다.

“제 죄를 청합니다.”

다 쉬어버린 목소리, 피투성이가 된 발.

그녀는 본인이 가졌던 것 중 제일 값졌던 존엄과 자긍심을 버렸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기억하는 새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는 형제들을 등진 비겁자요, 왕국의 몰락을 외면 죄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무책임하게 찾아와 과거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쿵! 쿵!

“죽어 마땅합니다. 목이 매달려도 죄의 무게를 줄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염치없이 청하고자 합니다.”

눈물로 얼굴을 적신 그녀는 딱딱한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죄를 청했다.

나는 눈가를 떨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올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딸 아이가 있습니다. 하나뿐인 핏줄이며 제가 도망쳤던 이유입니다. 검성이시여, 죽여야 한다면 저를 죽이고 살려야 한다면 제발 죄 없는 딸을 살려주세요.”

‘만약, 기사왕을 따르지 않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었나요?’

‘그럴 걸 왜 묻습니까?’

그때 물었어야 했다.

그러는 재상은 무엇을 하고 싶었냐고.

‘저는 가족을 만들고 싶어요.’

새는 아이를 품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나약하게 했고 동시에 또 다른 삶을 살게 해준 이유였다.

나는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느끼며 눈이 펑펑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9년간 겪었던 후회와 고통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허무함으로 바뀌었다.

차라리 말하지 말지.

영원히 비밀로 묻어,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알 수 없도록 묻어주지 그랬나.

나는 결국 괴로움을 참다못해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마음을 짓누르는 복잡한 감정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대답이 없었다.

이것이 부정임을 착각한 기억하는 새는 낮은 자세로 천천히 기어 왔다.

그리고 기어코 내 발 위에 입을 맞춰 자비를 구걸하고자 했다.

그러지 마라, 아름답고 그리웠던 내 과거를 그렇게 더럽히지 마라.

나는 손을 뻗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자 한 그녀를 멈추게 하려 했다.

턱!

하지만 그녀를 잡은 것은 내가 아닌 한발 먼저 앞선 눈투성이였다.

“그러지 마세요.”

“아······.”

기억하는 새는 눈물과 흙으로 더럽게 젖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기억 속 기사왕과 똑 닮은 아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투성이는 어느덧 내 손과 기억하는 새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그것은 끊어지기 직전인 유대요, 나를 대신해 나선 아이의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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