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검은머리 기사왕 57화
“아······.”
기억하는 새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지독한 갈증과 함께 화살을 맞은 어깨에서 강한 고통이 느껴졌다.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뻗어보는 그녀.
주변에는 차가운 눈이 아닌 푹신한 이끼와 모닥불의 온기가 전해졌다.
내가 살아있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힘겹게 눈을 뜬 기억하는 새는 흐릿한 시야 사이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괜찮으십니까?”
“······경?”
왕국 퇴역 기사, 거친 귀리.
1년 전 우연히 만났던 그가 왜 여기서 자신을 보살피고 있는 거지.
순간 인지 부조화가 온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상보다 아픈 기억이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안돼······.”
“재상님?”
기억하는 새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리고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어느덧 어두워진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과 덜덜 떨리는 손.
눈물로 얼굴을 적신 그녀는 자신이 죽을뻔한 숲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사박!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분명 그 자리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엄마를 기다리며 떨고 있을 것이다.
기억하는 새는 현실을 부정하며 어두워진 숲을 미친 듯이 가로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흘린 핏자국과 함께 익숙한 나무를 발견했다.
“오, 오목눈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딸 아이를 불러본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고 오직 빈 인기척만이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옆으로 치워져 있는 눈과 넝쿨, 한참 주변을 맴돈 듯 보이는 발자국.
시간이 지나도 자신이 오지 않자, 결국 혼자 밖으로 나오고 만 것이다.
기억하는 새는 급히 뒤따라온 거친 귀리를 향해 손을 뻗어 매달렸다.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옷깃을 찢어질 듯 붙잡으며 오열했다.
“제, 제 딸이······! 딸을···!”
딸이 함께 있었다고?
손님이 올 때마다 다락방에 숨었던 오목눈이를 거친 귀리가 알 리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기억하는 새는 털썩 주저앉았다.
몰려오는 고통과 죄책감이 현명한 삶을 살았던 그녀의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내 소중한 딸 오목눈이.
의미 없던 삶을 바꿔주었던 아이가 자신의 멍청함 때문에 잃고 말았다.
기억하는 새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더러운 바닥에 얼굴과 눈물을 묻었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아픔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차갑게 식혔다.
“- - - - - - -.”
하지만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거친 귀리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상황을 이해하고 수습하고자, 냉철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바스락.
반나절이 지난 상황이다.
아이 혼자서는 이 복잡한 숲을 흔적없이 빠져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세를 낮춘 거친 귀리는 이미 넋을 잃은 기억하는 새를 뒤로한 채 흐릿하게 남은 흔적을 찾아 천천히 움직였다.
[엄마······.]
여기서 주변을 방황했구나.
아이는 사라진 엄마를 찾아 한두 시간 숲을 헤맸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큰소리를 낼 수는 없었겠지.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오크가 주변에 있을지 모른다는 걸 알 테니까.
그 당시 상황을 흔적으로 유추한 거친 귀리는 계속해서 행적을 좇았다.
머릿속에선 그 당시 상황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사박.
“아······!”
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한참을 주변만 맴돌다, 어느 순간 다가온 누군가로 인해 멈춰 선 것이다.
또 다른 오크 사냥꾼인가?
발자국 앞에는 누군가 버린 천들과 함께 크고 작은 흔적들이 있었다.
가죽 신발, 서성이는 작은 발자국.
거친 귀리는 아이와 마주한 이들이 운 좋게 살아남은 피난민 가족임을 유추해냈다.
정말로 천운이다.
인간성을 지킨 피난민 가족은 방황하는 아이와 함께 이곳을 벗어나 주었다.
하지만 목숨을 건진 그들은 안전지대인 북방군 영향권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미 피난길을 틀어막은 오크 사냥꾼들이 주변에 즐비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서서히 흐려지는 마지막 흔적을 쫓은 거친 귀리는 숲에서 빠져나왔다.
“······젠장.”
발자국은 남쪽으로 향했다.
재상의 딸을 거둔 피난민 가족은 또 다른 길을 찾고자 우회한 것이다.
거친 귀리는 작은 욕설을 내뱉었다.
재상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딸을 구해내야 했지만, 이건 자신의 능력 밖이다.
매복 중인 오크 놈들을 공격하고 광범위 수색을 벌일 수 있는 집단이 아니라면 이건 평생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 방법뿐인가.
거친 귀리는 복잡한 심경을 숨기기 위해 마른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 엎드려 있는 기억하는 새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신 차리십시오, 재상님.”
“············.”
“따님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한 피난민 무리와 함께 이 숲을 떠났어요.”
꾸우욱!
그녀의 눈동자는 혼탁했다.
하지만 딸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은 그 순간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혼탁한 눈동자에 맺히는 간절함.
기억하는 새는 달달 떨리는 입술을 열며 거친 귀리를 향해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제, 제발······!”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둘이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오크 영향권 안은 이미 지옥이다.
자신과 그녀가 들어가봤자, 딸을 찾기는커녕 한낱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오직 북방의 미래를 위해 재상을 구한 거친 귀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검성을 찾아가십시오. 가서 진정으로 도망쳤던 죄를 청하고 도움을 구하세요.”
기억하는 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홀로 남은 그를 버리고 도망친 것도 모자라 뻔뻔한 부탁마저 해야 한다.
염치라는 게 있는 인간이라면 감히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하지만.
빌고 또 빌고, 이 목숨을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차가운 바닥과 이마를 맞댄 기억하는 새는 재상이 아닌 인간으로 참회하고자 했다.
그 둘은 힘겹게 포위망을 빠져나와 북방군이 세를 키운 스프링 로드로 향했다.
* * *
“총독!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곧 나가겠다.”
바짝 군기가 든 관리는 새벽부터 시작된 출정 준비가 전부 끝났음을 알렸다.
그러자 오그마르는 곧 나가겠다는 말과 함께 차가운 축객령을 내렸다.
수년간 자신과 함께했던 집무실.
북방은 전쟁과 화마로 뒤덮였는데 이 조그마한 집무실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 풍경도 이제 마지막이었다.
황금색 갑옷으로 무장한 오그마르는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서 멀어졌다.
아쉬움은 남지만, 미련은 없었다.
오그마르는 미리 날을 세워둔 대형 도끼와 함께 싸늘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뚜벅, 뚜벅, 뚜벅.
스노우 가든은 조용했다.
물론 자신이 묻은 수천 명 영혼이 비명을 질렀지만, 어차피 곧 사라질 망각이다.
싸울 자는 남고, 도망칠 자는 도망친 지금, 북방 위에 남을 것은 오직 파괴와 살육, 그리고 최후로 남을 승자뿐이었다.
오그마르는 당당히 걸었다.
“이쪽입니다, 총독.”
광장에 도착하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충직한 부하들과 연설 강단이 있었다.
몸집을 크게 부풀린 오그마르는 보란 듯이 계단을 밟아 강단 위에 올라섰다.
척!
총독이 도착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수많은 오크 군대는 각 숙영지를 상징하는 전쟁 깃발을 기다렸다는 듯 들어 올렸다.
펄럭!
그 깃발들은 하나 같이 명예와 영광을 상징했고 곧 취할 적의 피를 기다렸다.
드디어 북방 식민지를 구성하던 오크 숙영지 전체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북방 대 침공 이후 최대규모.
숨을 크게 들이켠 오그마르는 참으로 험난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갑옷이 전부 얼어붙습니다, 총독! 공격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없습니다!’
‘나는 빼주시오! 개죽음당할 수는 없소!’
숙영지 족장 대부분은 진군을 반대했다.
튼튼한 석재 성벽을 가진 스노우 가든이 있는데, 굳이 피해를 감수해가며 공세를 펼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그때 토벌을 시작해도 되지 않겠는가.
한창 내전으로 바쁜 본토에서도 지원을 보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멍청한 생각이다.
북방의 봄이 찾아온다고 해서 그 봄이 우리의 봄이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본토가 나를 내버려 두겠나?’
오그마르는 식민지의 현상 유지를 원하는 본토 명령에 사실상 불복했다.
심지어 대학살로 생산능력을 깡그리 없애버렸으니,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생명은 완전히 끝이라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진군에 반대하는 숙영지 족장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집령에 응한 네놈들은?’
‘우리를 속였군······!’
본토를 상대로 변명이 통할 리가 없다.
숙영지 족장들은 총독 오그마르와 원치 않은 한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살기 위해선 이겨라. 왕의 죽음만이 이 실책을 감면해 줄 유일한 수단이다.’
선택권은 없다.
본토로 끌려가 목이 잘리기 싫다면 준동한 북방군을 죽이고 왕의 후계를 잡아야 한다.
‘······따르겠소.’
반발하던 족장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고 이내 오그마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대가 아닌, 필요로 인해 발족한 오크 군대가 스노우 가든에 집결했다.
쿵!
오크마르는 힘차게 발을 굴렀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오크 군대와 눈을 마주치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참으로 부끄럽다, 형제들아.”
육중한 기세가 넘실거린다.
오러를 타고 흐른 오그마르의 목소리는 한자리에 모인 오크 전사들을 향해 전해졌다.
“풍족과 안정이 너희를 녹슬게 했구나. 내게 보이는 시야 그 어디에도 오크라 불리는 전사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그저 무기를 든 돼지들만이 가득하다.”
거만한 오그마르는 수많은 오크 전사를 상대로 노골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 비난을 정면으로 마주한 오크들은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면에서 넘실거리는 푸른색 오러는 그런 거만함조차 용납하게 해주었다.
“선조들의 용맹은 어디로 갔는가? 온 대륙을 호령했던 영웅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통탄할 따름이다, 비통할 따름이다! 한낱 인간에게 형제들이 죽었으니까!”
오그마르는 기억하고 있다.
안위와 욕심이 아닌 영광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쫓던 오크들을 말이다.
그동안 부끄럽지 않았는가.
그 손으로 바꾸고 싶지 않은가.
오그마르는 이 자리에 모인 젊은 전사들을 향해 그렇게 묻고 싶었다.
펄럭!
그 순간 살벌하던 오러가 기세를 바꾸었다.
오크들이 들어 올린 숙영지 깃발이 방향을 바꿔 북쪽을 향해 불기 시작했다.
“이대로 치욕을 외면할 것인가?”
쿵! 쿵! 쿵! 쿵!
신호를 받은 전쟁 북이 울렸다.
무기를 뽑은 족장들이 각 군대를 향해 말을 몰며 출진 준비를 시작했다.
이를 악문 젊은 전사.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서전트.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오크가 영광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총독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명예를 취할 것인가.”
두둥! 두둥! 두둥!
우오오오오오오 - - - - - -!!
오크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땅은 진동했고 하늘은 놈들이 내지르는 함성 아래 숨을 죽인다.
이 땅 위 모든 인간을 죽이자.
오랜 평화로 취해있던 오크들은 전의라는 태생에 다시 한번 취해 북방군이 모인 스프링 로드를 향해 진군했다.
그 모습이 가히 시체를 뜯어먹고자 날아오른 수많은 까마귀 떼를 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