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기사왕-56화 (56/181)

56화

검은머리 기사왕 56화

나는 미간을 짓눌렀다.

두통이 몰려오는 탓도 있고 아까부터 동료들이 보내는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이다.

벌써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 것인가.

차라리 할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하면 좋을 텐데,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역시 어제 있었던 그 일 때문이다.

덜컹.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겨울이 무르익은 북방은 영웅이 흩어졌던 그 날처럼 눈이 오고 있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기 있잖아요······.”

그러자 그 순간 아까부터 눈치를 살피던 눈투성이가 얌전히 손을 들었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녀석답게 그 이유라도 알고자 침묵을 깬 것이다.

“그분이 누구신데요?”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눈투성이에게 왕국 역사에 대한 걸 많이 가르쳐주는 편이었다.

아이가 호기심이 많기도 했고 이런 교양적 지식은 알아서 나쁠 게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흩어진 영웅들과 관련돼서만큼은 되도록 언급을 꺼리는 편이었는데,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허심탄회하게 말해줄 수 없는 부분이 아직 많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지난 시간이 벌써 1년,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수 없었다.

눈투성이도 어엿한 구성원으로 자라 장차 왕이 될 아이였으니까.

수염을 쓰다듬은 붉은 강철이 말했다.

“이제 알려줘도 되지 않겠냐. 숨긴다고 숨겨질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걸쳐있던 창가에서 일어나 동료들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기억하는 새, 북방 왕국의 재상이었다.”

엘프들 사이에선 이런 말이 있었다.

기억하는 새가 두 명이었다면 북방 왕국도 두 개가 세워졌을 거라는 격언이 말이다.

그만큼 그녀는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뛰어난 인물이었고 북방 왕국의 모든 법률, 체제, 행정을 성립한 천재였다.

거기다 기사왕만큼이나 선정을 펼쳐 왕국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는데, 오만한 엘프 놈들조차 완벽함을 인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했던 새조차 다른 영웅들이 택했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끝이 보이기 시작했던 왕국 말기, 왕궁에서 홀연 듯 모습을 감춰버린 것이다.

“······그리고 흩어진 영웅 중 하나다.”

왜 떠났는지는 모른다.

왕궁을 끝까지 지킨 나는 새가 떠나야 했던 이유를 굳이 찾지 않았으며 지난 8년간 기억 속에서 지우며 살았으니까.

그런데 기억하는 새가 살아있다니.

앞서 내가 느꼈던 복잡함 감정과는 다르게 이성은 오직 한 가지 경우만을 떠올렸다.

바로 합류를 선택한 회색 늑대처럼 그녀가 재건된 북방군을 도와주기를 말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회색 늑대는 한숨을 내쉬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신 말해주었다.

“······우리는 선택할 자격이 없다. 그건 기억하는 새도 마찬가지고.”

흩어진 영웅들에게는 원죄가 있다.

바로 충성을 맹세한 기사왕의 유훈을 따르지 않고 도망친 원죄 말이다.

물론 이제는 그런 영웅들을 나무랄 기사왕도, 왕국도 전부 사라졌지만, 나라는 존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냥 복잡했다.

앞서 느껴왔듯 이 감정은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있는 응어리가 아니었다.

과연 웃는 낯으로 기억하는 새를 볼 수 있을지는 나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리자, 눈투성이가 슬픈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현실이 야속한 것인지, 아니면 내 감정을 읽은 것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일단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너무 섣부른 이야기였다.

“······전쟁이 곧이다. 이후에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때 선택해도 늦지 않겠지.”

“나는 네 선택을 따른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숙영지 오크들이 전부 모였다.

아마 근시일 내로 우리를 토벌하고자 거대한 병력을 이끌고 북진할 것이다.

머리 아픈 고민은 중요한 결전을 끝내고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나는 힘이 빠진 손을 휘적거리며 회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괴로웠다.

* * *

“엄마?”

“아······.”

한참 걸음을 재촉하던 기억하는 새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바람에 홀려 뒤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흰 눈만이 공백을 채우고 있었다.

자신을 끌어주던 그녀가 갑자기 멈추자, 불안한 얼굴로 엄마를 부르는 오목눈이.

정신을 차린 기억하는 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딸 아이 손을 잡았다.

사박, 사박, 사박.

조금만 뒤처져도 행렬을 놓친다.

피난민 무리 뒤를 바짝 따라붙은 기억하는 새는 앞이 보이지 않는 딸 오목눈이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갈 길을 여전히 멀었고 살을 에는 추위는 털옷을 비집고 들어왔다.

고된 날씨를 참지 못한 오목눈이는 결국 두 눈에서 눈물을 똑똑 흘렸다.

“엄마, 나 추워요.”

“조금만 참자, 응? 엄마가 안아줄게.”

오그마르가 퍼트린 전쟁의 화마는 그녀의 예상보다 넓고 깊게 진행되었다.

멀지 않은 지역에서 시작된 인간 사냥이 화전민 마을을 넘어, 모녀가 거주하는 오두막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기지를 발휘한 그녀는 분쟁 지역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연히 지나가는 피난민 대열과 함께 안전지대라 불리는 북방군의 영향권 안으로 걸음을 옮길 수가 있었다.

소문을 건너 듣기로는 이런 피난민 행렬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고 한다.

천운이라고 생각한 기억하는 새는 칭얼거리는 딸 아이를 소중히 안아 올렸다.

참으로 무력하고 비참했다.

한때 왕국을 먹여 살렸던 명재상이라는 칭호는 맹렬히 불어오는 한낱 추위 앞에 딸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하는 새는 새어 나올 것 같은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속세를 피하고자 속세 속에 숨었는데 야속한 세상은 그녀를 채찍질했다.

마치······, 마치 과거의 저지른 원죄를 반성하라는 듯 거세게 말이다.

그녀는 제발 딸 아이만큼은 무사하기를 어머니 북방을 향해 필사적으로 빌었다.

웅성웅성.

“······?”

하지만 그 순간 대열이 걸음을 멈췄다.

앞서 걸어가던 길잡이 노인이 멈춰서자 그 뒷사람들도 연달아 멈춘 것이다.

영문을 몰라 웅성거리는 사람들.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아우성치며 무슨 일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왜 멈춘 거지?”

조금만 더 가면 안전한 평원이다.

가족들을 책임져야 하는 장정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선두를 향해 걸어갔다.

“- - - - - - - -!”

하지만 그들은 곧 알게 되었다.

왜 길잡이 노인이 얼어붙듯 자리에 멈춰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지 말이다.

유일한 길이 막혀 있었다.

“길이······!”

“여보! 여보, 빨리 애들 챙겨!”

자연적으로 막힌 게 아니다.

분명 나무를 통째로 쓰러트려 진입로를 막으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순식간에 흩어지는 대열.

앞으로 왔던 장정들은 서둘러 도망치기 위해 가족들에게 달려갔다.

근처에 무언가가 있다.

깜짝 놀란 기억하는 새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쒜에에에엑 - - -!

푸슉!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가 뚫리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얼굴에 피가 튀겼다.

바로 옆자리에 서 있던 한 노파가 목에 날카로운 화살을 맞은 것이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물!

한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악- - - -!”

“오크 사냥꾼이다! 도, 도망쳐!!”

짙은 수풀에선 화살이 쏟아졌다.

비명은 지른 피난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얼굴을 붉게 칠한 오크 사냥꾼들을 그들을 죽이기 위해 연신 시위를 당긴다.

아비규환으로 변한 좁은 길, 기억하는 새는 딸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본능이 이끄는 방향을 향해 미친듯한 뜀박질을 시작했다.

“허억, 헉!”

잡히면 자신은 물론이고 딸 아이도 죽는다.

무조건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한 머리를 지배했다.

그렇게 길에서 벗어난 기억하는 새는 숲이 보이는 내리막길로 달리려 했다.

슈욱 - - !

푸슉!

하지만 그 순간 도망치는 그녀를 발견한 한 오크 사냥꾼이 재빨리 활시위를 당겨 그녀의 어깨를 화살로 명중시켰다.

“끅!”

빠른 판단이 무색하게 중심을 잃은 기억하는 새와 울음을 터트리는 오목눈이.

몰려오는 고통 속에 시야는 검은색으로 물었지만, 오직 정신력 하나로 버틴 그녀는 딸을 꼭 끌어안고 내리막길을 굴렀다.

촤르르르륵!

눈과 한 몸이 되어 내려간다.

한참을 굴러떨어진 기억하는 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적의 시야에서 잠시 멀어졌다.

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곧 흔적을 쫓아올 오크 사냥꾼을 따돌려야 했다.

허억, 헉!

기억하는 새는 어쩔 수 없이 비틀비틀 일어나 앞에 보이는 숲을 향해 뛰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저 멀리서 느껴지는 거친 울부짖음에는 그녀는 피가 나도록 이를 물었다.

쒜에에엑!

피잉-! 핑!

머리 바로 옆을 지나가는 화살.

얼굴을 때리는 날카로운 잔가지.

기억하는 새는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사방을 살폈다.

“- - - - - -!!”

그 순간 한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나무 아래 그림자가 짙게 낀 그곳에는 체구가 작은 오목눈이가 들어가기 딱 좋은 뿌리 구멍이 있었다.

“엄마······.”

그녀는 뿌리 구멍에 딸 아이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마를 서로 맞대며 오목눈이가 안심할 수 있도록 다독였다.

“엄마가 무서우면 어떡하라고 했지?”

“귀, 귀를 막고······.”

그녀의 눈에선 후회와 고통이 섞인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하지만 괜찮다. 아이는 보지 못할 테니까.

“그래, 착하다. 우리 오목눈이.”

이제는 시간이 없다.

그렇게 딸 아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기억하는 새는 눈과 넝쿨로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 오크 사냥꾼을 최대한 멀리 유인하고자, 뛰고 또 뛰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사박!

입에서 단내가 올라온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눈앞에 보이는 숲은 마치 주마등처럼 까맣게 변했다.

뛰고 또 뛰고, 뛰고 또 뛰고.

얼마나 더 달려왔을까.

이제 한계에 도달한 기억하는 새는 결국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붉은색 피가 온몸을 적셨다.

그것은 꼭 왕국을 버리고 도망친 자신을 탓하는 어머니 북방의 천벌 같았다.

털썩!

그녀는 그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그 미래를 결정할 오크 사냥꾼은 붉은색 눈동자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죽음이 이토록 허무할 줄 알았다면 진정으로 미안하다는 사과라도 해볼걸.

그렇게 후회만을 남긴 기억하는 새는 떨리는 눈가를 감으며 정신을 잃었다.

“크르르르······.”

오크 사냥꾼은 화가 났다.

단 한 놈도 놓치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이런 개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빨리 목을 잘라 돌아가자.

활을 치운 놈은 그대로 도끼를 뽑아 들어 하얀 새의 목을 잘랐다.

서걱!

아니, 자르려고 했다.

그 순간 멀쩡하던 시야가 빙글 돌며 피와 함께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뭐지?

내 목이 잘린 건가?

겨우 몇 초밖에 남지 않은 정신과 흐릿한 시야 사이로 한 인간 기사가 보였다.

목이 잘린 오크 사냥꾼은 극적으로 달려온 거친 귀리를 보며 눈을 감았다.

“허억, 헉.”

거친 귀리는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기억하는 새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영웅들을 합류시키고자 했던 한 남자의 집요함이 그렇게 기적을 만들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