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검은머리 기사왕 55화
북방인 수천 명을 생매장한 총독 오그마르는 거기서 만행을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두고 보란 듯 북방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명령을 내린 것이다.
‘수레바퀴보다 큰 인간은 전부 죽여라.’
처벌도 토벌도 아닌 학살 명령이다.
그나마 이성을 유지한 족장들이 재차 명령을 재확인했지만, 오그마르는 전령의 목을 베는 것으로 살벌한 각오를 보였다.
따르지 않으면 죽인다.
단호를 넘어선 무거운 광기 앞에 숙영지 족장들은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죄책감이 없는 건 놈들도 마찬가지였기에 무기를 드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꺄아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북방군을 도왔든 돕지 않았든, 마을 주민들과 피난민들은 학살당했다.
그 살벌한 기세 앞에 도우러 나선 봉기군 마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산과 강은 시체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봉기군의 게릴라전에서 해방된 숙영지 오크들은 소집령을 내린 오그마르에게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북방 식민지의 끝을 알린 총독 오그마르의 무모한 강수가 아이러니하게도 난관을 타개해줄 열쇠가 되어준 것이다.
공멸을 각오하며 맞불을 놓은 오크 놈들.
오그마르를 중심으로 모여든 숙영지 족장들은 준동한 북방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북방군이라고 오크들이 벌이는 참상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비록 총독 오그마르의 행동이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들 또한 충분한 준비를 끝내둔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쪽으로 도망치세요!’
‘쭉 걸어가시면 은신처가 나올 겁니다.’
부러지는 검은 그동안 넓혀둔 영향권과 잿더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한동안 미뤄두고 있던 봉기군 합류를 추진했다.
그리고 격전지에서 방황하는 피난민들을 안전한 영향권 안쪽으로 인도하며 북방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쪽은 죽이기 위해,
한쪽은 살리기 위해.
북방 각지에서 마주친 양측 세력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국지전을 벌였고 지도는 자연스럽게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깊어지는 증오, 화마로 번진 전의.
오크와 북방인은 직감했다.
놈들과 자신들은 이 북방 땅 위에 더 이상 공존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증오로 점철된 전쟁이 드디어 절정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 * *
필요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할 때가 있었다.
물론 그런 택일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결정한 자에게는 책임이 있다.
희생당한 자들을 향한 책임.
바로 죄책감이다.
단체 생매장이라는 끔찍한 듣고 모두가 할 말을 잃었던 그 날밤, 오직 회색 늑대만이 이성을 유지하며 나를 위로했다.
‘네 탓이 아니다, 부러지는 검.’
예상하여야 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사람을 물 거라는 걸, 총독 오그마르가 이런 극단적인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북방인 수천이 희생당했다는 끔찍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 모든 비극이 우리가 벌인 전쟁으로 인해 벌어졌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과연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
살고자 고개를 수그린 게 죽어야 하는 이유라면 나는 8년을 죽어야 했을 텐데.
나는 다른 이들 몰래 울음을 터트리는 눈투성이를 조용히 안아주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을 거라고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멈춰서는 안 된다.
흐르지 않는 물은 얼어붙을 테니까.
다음 날 슬픔을 완전히 떨쳐낸 우리는 직접 무기를 들고 부대를 이끌었다.
지금도 방황하고 있을 피난민들을 위해 하루 수십 번 출정하고 또 출정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하고, 또 얼마나 많은 오크를 베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쯤 나는 마지막 출정을 끝내며 스프링 로드로 복귀하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정문 개방! 우리 진영이다!”
“기병들이 돌아왔다!”
안장에서 내려와 투구를 벗자, 고여있던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무려 5시간이 넘도록 전투를 치르다 보니 땀을 닦아낼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흘린 땀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내 뒤에는 수많은 피난민이 삼삼오오 모여 기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주변 정찰을 위해 나갔던 차, 오크 추격대에 쫓기던 저들을 구해낸 것이다.
내 덕에 목숨을 건진 피난민들은 이제 살았다는 얼굴로 주저앉아, 목숨을 살려준 나를 향해 진심이 섞인 감사 인사를 보내왔다.
“수고했습니다, 경!”
거칠게 숨을 고른 나는 부장이 건넨 물을 머리 위에 부으며 땀을 식혔다.
그러자 활화산처럼 달아올랐던 근육과 신경이 차갑게 식으며 제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경례하는 부장을 향해 물었다.
“회색 늑대는?”
“오크 정찰대를 토벌하시고 조금 전 도착하셨습니다. 바로 본영으로 가십니까?”
“그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왕께서는 어디 계시는지 아나?”
“하하, 매번 거기 계십니다.”
“······정말 못 말리겠군.”
감히 존엄한 왕의 후계를 정찰이나 토벌 임무에 배정할 수는 없었던 나는 눈투성이에게 잡다한 행정 일을 부탁했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기어코 도움이 돼야 속이 풀리겠다는 듯 사람들이 하기 가장 꺼리는 배급 일에 자원했다.
‘제발 체통을!’
‘난 몰라요!’
체통을 지키라고 아무리 외쳐도 몰래 빠져나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녀석.
내가 부탁한 행정 일까지 완벽히 잘해놓으니 또 나무랄 수도 없었다.
장차 왕이 될 소녀한테 수프를 받아먹는 사람들은 과연 무슨 기분일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부장과 나눈 대화를 끝으로 한참 배급으로 분주한 민간 구역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웅성웅성.
거기 새치기하지 마세요!
저들이 한 끼로 받는 배급은 따듯한 빵 한 개와 넉넉한 수프 한 그릇이다.
비록 호밀 빵은 거칠고 대량으로 만들어진 수프는 맛이 조금 부족했지만, 이마저도 북방에선 만찬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설레는 얼굴로 배급을 기다리는 주민들을 지나쳐 가장 앞줄로 걸어갔다.
그러자 오늘도 분주한 식당 아주머니들과 함께 우리의 왕이 시야에 들어왔다.
“맛있게 드세요!”
“감, 감사합니다!”
아무리 낡은 작업복을 입는다고 한들 만개한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요즘 들어 부쩍 성장한 눈투성이는 이제 예전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변해있었다.
음, 저 모습에 반한 마을 청년들이 한동안 잠을 못 이루겠구나.
나는 벌떼처럼 몰려든 마을 청년들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슬슬 왕국 재건의 가닥이 잡히고 있다.
그 말인즉슨 눈투성이가 왕이 될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대한 북방의 왕!
이처럼 보는 눈이 많을 때는 아무리 스승이라도 예의를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목소리를 가다듬은 나는 나지막이 외쳤다.
“왕이시여, 곧 가실 시간입니다.”
“앗, 엣.”
내 부름을 받은 눈투성이는 깜짝 놀라며 다급히 앞치마를 벗었다.
그리고 의복을 바르게 한 뒤 자신과 함께 일해준 이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예와 겸손은 왕의 미덕이다.
나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왕을 호위 중이었던 병사들을 병영으로 돌려보냈다.
“너희들은 복귀해라.”
“예!”
병사들은 떠나고 우리도 떠났다.
배급소로 몰린 북방인 전부가 입을 꾹 다문 채 떠나는 우리를 배웅한다.
그것은 불편함이거나 어색함이 아닌 자신들의 왕을 향한 진심 어린 존경이었다.
길을 걷자 천천히 멀어지는 배급소.
급성장한 스프링 로드는 이제 한 영지 급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그만큼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난 나와 눈투성이는 저 멀리 보이는 내성 안 본영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벌써 다들 도착해 있는지 문 너머로는 분주한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비를 지나쳐 문을 열었다.
덜컹!
“오! 드디어 오셨군!”
한동안 비어있던 본영 회의실에는 오랜만에 많은 인원이 몰려있었다.
그사이 이어졌던 수많은 피난민 행렬이 서서히 잦아들 때쯤 규모가 제일 컸던 봉기군과 잿더미들이 전부 합류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듣기로는 기사였던 자들이 다수 합류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북방 기사단의 재건도 이제 머지않은 일 같았다.
하지만 나는 가슴 벅찬 설렘을 애써 진정시키며 한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아무리 반갑다고 해도 앞으로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눈투성이를 가장 앞으로 세운 뒤 우르르 몰려온 그들을 향해 외쳤다.
“예를 표하라!”
“- - - - - - - -!”
몰려오던 퇴역 기사와 병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미리 전해 들은 바가 있는지 서둘러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꿀꺽.
기사왕의 후계라 알려진 눈투성이.
소문의 정체와 실제로 마주한 그들은 떠도는 위명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꾸민다고 만들 수 없는 그 특유의 분위기는 기사왕을 직접 본 이들만이 판가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분은······.”
입은 연 나는 순간 걱정이 몰려왔다.
격식을 차리는 게 아직 어색한 눈투성이가 경험 많은 그들 앞에서 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몰려왔기 때문이다.
“많은 고행을 겪었다고 들었어요. 제가 이 빚을 어떻게 해야 갚을 수 있죠?”
하지만 그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눈투성이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
어설프던 모습을 사라지고 하얀빛과 온화함이 가득한 왕이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왕은 무릎을 꿇은 잿더미들의 손을 손수 잡아 일으켜주었다.
“무릎 꿇지 마세요, 제가 받기에는 너무 과해요. 오늘은 괜찮겠죠, 경?”
“······그렇게 하시지요.”
그동안 도피 생활을 이어오며 온갖 고초와 악의를 겪어봤을 잿더미들이다.
이 자가 내뱉는 말이 자신을 팔아먹는 거짓인지, 아니면 진심인지를 끝없이 의심하고 판별해오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현실에 찌들었던 그들조차 하늘에서 방금 내린 것 같은 순순한 눈투성이 앞에 감히 의심을 품을 수가 없었다.
왕은 걱정하고 고마워하고 있었다.
더럽혀지지 않은 진심으로 말이다.
눈투성이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잿더미와 인사를 나누며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편히 쉬세요. 이제 이곳이 여러분들의 집이 될 거예요.”
장담한다, 분명 몇 시간 뒤면 헤헤 웃으며 팔씨름이나 청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친근함과 무례의 차이를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역시 실전에 강한 편이구나.
나는 감회가 새로움을 느끼며 눈투성이와 함께 회의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하하하하 - -!”
“아니, 이게 누구야!”
“붉은 강철이 결혼했다고?!”
분위기가 많이 풀렸다.
예를 취하는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다시 왁자지껄 웃으며 떠들었고 눈투성이 또한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하지만 나는 잠시 그곳에서 벗어나 인파 사이를 헤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혼자 쭈뼛거리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 뒤 천천히 다가갔다.
잿더미들과는 달리 어엿한 얼굴의 청년.
분명 서신에서 읽은 그가 분명했다.
“당신이 핸드맨?”
“맞, 맞습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경!”
규모가 가장 큰 봉기군을 이끈 리더이자, 거친 귀리와 짧은 시간 함께한 남자.
모든 잿더미가 합류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핸드맨도 또한 뒤늦게 따라온 모양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잔뜩 긴장한 핸드맨 옆에는 같이 있어야 할 한 기사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에게 물었다.
“거친 귀리 경은 어디 있나? 서신에는 같이 온 거로 적혀 있었는데.”
나는 분명 전원 합류를 명령했다.
원래라면 거친 귀리는 이 자리에서 복귀 신고를 하고 기사단으로 편재될 예정이었다.
“예? 기사님이 말씀 않던가요······?”
“나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핸드맨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들은 사실이 없냐 되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전해 들은 거친 귀리의 행보를 얼떨결에 내뱉었다.
“저에게는 분명 재상이라는 분을 데려와야 한다고 떠나셨는데······.”
왕국 재상 기억하는 새.
그 이름이 울려 퍼진 회의실은 순간 소리 한 점 없이 조용해지고 말았다.
아니, 아마 얼어붙은 게 맞을 것이다.
“혹, 혹시 비밀이었나요?”
나는 울기 직전인 핸드맨을 바라보다 결국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