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검은머리 기사왕
오로지 달리는 적을 저지해야 한다는 일념 아래 강행된 육탄 돌격.
기병들은 한순간 두려움을 잊었고 흰 뿔 사슴들은 친구를 지키기 위해 뿔을 내밀었다.
콰앙-!
그 결과 선이 선을 끊었다.
허리가 끊어진 진형이 그대로 뒤틀리며 기마대는 격한 파열음과 함께 나뒹굴었다.
히히힝!
마갑은 의미가 없었다.
고스란히 전해진 운동 에너지는 전투마의 내장과 뼈를 그대로 박살 냈다.
말이 내뱉는 마지막 울음소리와 함께 무음이었던 공간이 제자리를 찾았다.
“아아아악!”“선회하라! 선회, 선회······!”
서걱!
푹!
허리가 한번 끊긴 오크 기마대는 왼쪽으로 선회해 대열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만 있을 리 없는 사슴 기병대는 가속을 기꺼이 포기하며 오크 기마대를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챙! 챙!
서걱! 히히힝!
금세 난전이 되어버린 대 기병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한 오크 서전트가 주변을 바삐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장 한가운데, 말에서 낙마한 족장 티그마가 분투를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사랑하던 애마는 이미 붉은 곤죽이 되어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Kraaah - - - !!”
상처 입은 늙은 사자의 모습이 저리할까.
낙마라는 치욕을 겪은 티그마는 자랑스러워 하던 투구도 벗어 던진 채 오러가 담긴 도끼를 연신 휘두르고 있었다.
역시 대족장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는 단순히 늙었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사슴을 탄 기병들이 창을 내지른다고 한들 티그마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족장님! 말에 올라타십시오!”
티그마의 분전 덕에 틈이 생겼다.
서둘러 주인 잃은 말을 하나를 끈 서전트는 족장 앞으로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후퇴해야 한다.
이건 군대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족장의 목숨이 위험하게 생겼다.
턱!
그리고 다행히 이성을 되찾은 티그마는 서전트의 손을 잡고 말 위에 올라탔다.
놈은 몰려오는 치욕과 고통을 참지 못해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상태였다.
“이런, 젠장! 살아있는 기마대를 추려라! 여기서 빠르게 빠져나간다!”
“예, 족장님!”
비록 측면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적의 기병보다 오크 기마대가 더 많다.
혼란과 흩어진 대열만 수습할 수 있다면 보병과 협력해 반격을 꾀할 수 있다.
상황을 빠르게 판단한 티그마는 몰려오는 고통을 참으며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 한참 전투가 진행 중인 오크 전사들을 향해 바삐 말을 몰려고 했다.
푸르륵!
챙!
쿵!
“컥!”
그 순간 검날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깜짝 놀란 티그마는 도끼로 능숙하게 검을 막아냈지만, 연이어 밀고 들어오는 거대한 사슴뿔은 피해내지 못했다.
히히히힝- - -!!
거세게 흔들리는 전투마와 중심을 잡지 못할 정도로 기울어지는 안장.
뿔에 치인 티그마는 결국 낙마한다.
털썩
믿을 수가 없다.
오러로 보호 중인 몸이 겨우 사슴뿔 하나 때문에 또 낙마한다고?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낀 티그마는 끝내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늙은 몸이 여기서 발목을 붙잡는다.
티그마는 본능적으로 도움을 청하고자 같이 말을 타고 온 서전트를 불렀다.
아니, 부르려 했다.
서걱!
툭.
하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을 피를 뿌리며 바닥에 떨어진 서전트의 목이었다.
티그마는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목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검을 휘두른 정체와 함께 거대한 사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티그마는 분노로 물든 일갈을 내뱉는다.
“놈······!”
푸르륵!
어린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엄숙함.
북방의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검은 머리.
당당히 왕의 검은 든 눈투성이는 하얀 바람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티그마는 순간 깜짝 놀라 외쳤다.
“기, 기사왕?”
오크는 인간을 경멸한다.
오크는 인간을 증오한다.
모두가 맞는 표현이다.
오크가 인간을 경멸하고 증오하며 죽이는 것에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오크들은 알고 있다.
인간을 향해 발산하는 끝없는 증오 안에는 은연중 품은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종족 중 가장 도태되었음에도 위대한 오크 황제를 베고 왕국을 건설한 자들.
그 당시 장군으로 참전했던 티그마는 아직도 기사왕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과연, 이 모든 것은 예견된 전조였나.
인간의 왕이 돌아왔구나.
티그마는 잊고 있던 두려움 사이로 뒤틀리고 흐려진 오러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래, 이건 유일한 기회다.
아직 여물지 않은 왕의 후계를 여기서 베고 왕국 재건국을 막을 유일한 기회!
티그마는 눈투성이와 하얀 바람을 베고자 오러가 담긴 도끼를 힘껏 들어 올렸다.
챙!
“늦었다, 늙은 오크야.”
하지만 도끼는 허공을 갈랐다.
뒤에서 바람처럼 다가온 한 남자가 오러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부분을 정확히 노려 도끼를 튕겨냈기 때문이다.
날아오는 검날조차 보지 못했는데······.
그 귀신같은 실력을 기억 속에서 떠올린 티그마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검성.”
변절한 후계를 죽이고 잠적한 게 마지막 행적인 줄 알았는데 결국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왕의 후계를 찾아냈구나.
적이지만, 정말 엄청난 집념이다.
티그마는 주름진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집안싸움이나 벌이는 오크 종족의 앞날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철컥.
티그마는 도끼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오러를 불태우며 검성과 왕의 후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나마 개전 직전 오그마르에게 전령을 보내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부탁한다, 오그마르여.
내가 막기에는 이 바람이 너무나 거세구나.
* * *
‘시체는 평원을 가득 메우고 까마귀는 떠날 생각을 않는다. 겨우내 볕조차 들지 않더니 승전은 겨울과 함께 영원하구나.’
‘북방의 왕이 돌아왔다. 일어나고 또 일어나라, 이 땅 위 향유하는 모든 인간들아. 평범하게 태어났되 비범하게 죽자.’
소문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오크들이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마을 주민들은 모일 때마다 웅성거렸고,
순진한 아이들은 누군가 퍼트린 노래를 어른들 몰래 부르고 다녔다.
원래 변혁이라는 것이 그랬다.
막으려 하면 막을수록 변화는 도태된 과거를 비웃으며 빠르게 움직인다.
그것을 그 누구보다 변화를 깊이 실감하고 있을 오그마르는 상자 하나를 받았다.
덜컥.
상자 속 내용물을 확인한 오그마르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목이 잘려 돌아온 친척 티그마의 명예를 위해 예를 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감을수록 속 안에 응어리진 분노와 증오는 회오리쳤다.
그 분노는 친척을 이렇게 만든 인간 놈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무능한 숙영지 오크들을 향한 실망이기도 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오그마르가 입을 열었다.
“소집령을 내려라. 거부하는 자는 내가 직접 찾아가 목을 베어주마.”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눈치를 보며 후퇴할 시기를 정하고 있을 숙영지들이었다.
하지만 오그마르는 단호히 소집령을 내리며 총독이 가진 막강한 권한을 사용했다.
반발해도 상관없다.
오랜만에 들어 올릴 도끼에는 비겁한 변절자들을 위한 것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예, 총독!”
평소 온화한 정책으로 북방 숙영지의 편의를 되도록 봐주었던 총독이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이라도 족장들 머리를 깨부술 것처럼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다.
실수하면 정말 죽을 수 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관리들은 서둘러 경례를 취하며 전시 상황을 위해 흩어졌다.
쿵! 철컥.
오그마르는 늙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집무실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개인 공간으로 걸어가, 황제가 하사했었던 양날 도끼와 황금 갑옷을 착용했다.
한동안 꺼낼 일이 없었던 무구다.
하지만 늙어가는 자신의 몸과는 달리 녀석들은 여전히 빛을 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성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옛것과 여전한 것.
쓰게 웃은 오그마르는 집무실을 나서 찬 바람이 부는 복도를 걸었다.
마치 최후를 예고하기라도 하듯 눈이 덮인 스노우 가든은 고요했다.
* * *
숙영지에 소집령이 떨어졌다.
병력만 조금 보낼 생각이었던 족장들은 갑작스러운 소집령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북방은 금세 혼란으로 휩싸였다.
하지만 불응할 수는 없었다.
총독을 찾아가 대놓고 불만을 표한 젊은 족장 하나가 단칼에 목이 베여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북방 식민지 최고의 전사인 오그마르와 1:1로 싸워 이길 전사가 있기는 한가.
족장들은 당연히 꼬리를 말았고 이내 하나둘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수긍은 총독을 향한 단순한 굴복이지, 명예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족장들은 자연스레 이 사태를 일으킨 원인을 향해 눈과 신경을 돌렸다.
벌레 같은 인간 놈들, 가만히 박혀 살 것이지 감히 군대를 일으켜?
이미 팽배했던 인간 혐오는 이번 소집령을 기점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비쩍 마른 중년 남성이 절규했다.
“이, 이것마저 가져가면 저희는 어떻게 버티라는 겁니까! 제발, 제발 자비를!”
한해 수확한 식량을 전부 수탈당한 노예 마을 주민들은 콩을 수확하고 남은 찌꺼기나 푸성귀를 먹으며 겨울을 버티고는 했다.
하지만 올겨울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원래는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을 오크 놈들은 다시 마을을 찾아와 얼마 없는 그 식량마저 말 먹이로 가져가려 했다.
가뜩이나 굶주리며 지내야 하는 겨울, 저것마저 없으면 어쩌란 말인가.
중년 남성은 소중한 아내와 아이들을 굶주려 죽게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오크 전사는 남성을 향해 손도끼를 휘둘렀다.
“꺼져라!”
콰직!
“꺄아아악! 여보!”
자비를 구걸하는 인간을 한 치 망설임 없이 죽여버린 잔혹한 오크 놈들.
중년 남성의 아내였던 여성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뛰어와 절규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바랬는가.
적어도 삶을 연명할 수 있는 식량을 주는 것이 그렇게 힘을 일이었나.
마을 사람들은 남편의 시체를 부여잡고 절규하는 여성을 텅 빈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제 지치고 또 지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허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마을 청년 핸드맨은 이 현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청년은 특출난 인간이 아니다.
또 한 오러를 다루는 영웅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용기 한 조각이 이 순간 그를 특별하게 했다.
꾸욱.
핸드맨은 낡은 쇠스랑을 주웠다.
그리고 횃불처럼 타오르는 눈빛으로 하늘을 보며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봤다.
비참함, 노예, 한낱 인간.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핸드맨은 밤새 읽고 또 읽었던 소문의 포고문을 조용히 되새겼다.
‘평범하게 태어났되, 비범하게 죽자.’
용기가 생겼다.
쇠스랑을 쥔 핸드맨은 문을 열고 뚜벅뚜벅 마을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여인의 절규를 지나, 사람들의 텅 빈 눈동자를 하나둘 지나, 오크를 향해 말이다.
핸드맨은 즐겁게 웃는 오크의 등을 찔렀다.
푹!
아무리 방심한 등을 찔렀다고 한들 낡은 쇠스랑이 제대로 먹힐 리 없다.
하지만 핸드맨이 내었던 용기처럼 오크의 몸에서 피를 흘리게 하기는 충분했다.
공평한 죽음, 공평한 피.
잠재되어 있던 용기와 분노가 그 행동을 기점으로 터지고 말았다.
“크륵?”
등이 찔린 오크는 깜짝 놀랐다.
살면서 처음으로 벌레라고 생각한 인간들의 반항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오크 전사는 그 당황을 애써 분노로 덮으며 재빨리 도끼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휘두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찌른 핸드맨이 강해서도, 자신이 약해서도 아니었다.
“- - - - - - -!!”
청년의 뒤에는 드디어 생기를 찾은 수많은 북방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드디어 스스로 찬 족쇄를 끊고 노예가 아님을 증명하기 시작한 인간들.
북방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