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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51화 (51/181)

51화

검은머리 기사왕 51화

오크 군세는 진군을 멈췄다.

아니,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로 앞 평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군대가 진군을 막았기 때문이다.

검은색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인간 군대.

경악이라는 감정을 애써 숨긴 대족장 티그마는 부관을 향해 물었다.

“이게 단순 반란이라고?”

“그게······.”

어떤 덜떨어진 오크 새끼가 초동보고를 올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놈이 누가 되었든 간에 지금이라도 멱을 따 총관 앞에 걸어놓아야 한다.

보아라, 저 대열과 군기를.

아무리 오랜 시간 전장에 물러나 있었다고 해도 단순 민병과 훈련받은 병사를 구분 못 할 정도로 녹슬지는 않았다.

티그마는 탄식했다.

“북방군이다.”

민란이나 충동적인 봉기가 아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준비된 거병이며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전조였다.

만약 오그마르가 자신을 보내지 않았다면 북방 식민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저들에게 숙영지가 각개격파되어 하나둘 힘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나한테 빚진 거다, 오그마르.”

하지만 자신이 군대를 끌고 온 이상 놈들의 영토 확장도 여기서 끝이다.

티그마는 인간 놈들이 더 크기 전 아예 싹을 말려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부관!”

콧김을 내뱉은 티그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전트와 부관들을 불렀다.

그러자 수많은 오크가 상기된 얼굴로 몰려와 정중히 예를 표했다.

“예! 명하십시오, 족장!”

“총독에게 전령을 보내라! 현 상황을 빠짐없이 전부 전달해! 그리고 서전트!”

“예, 족장!”

“우리는 공격을 준비한다.”

그동안 정체를 숨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왔던 인간 놈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해보자는 듯 군대를 끌고 와 자신들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 얼마나 건방진 놈들인가.

같은 무기와 갑옷을 입었다고 해서 다 같은 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티그마는 잊고 있었던 전사의 피가 오랜만에 들끓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불을 피워라!”

“부대 정렬! 부대 정렬하라!”

두둥! 두둥! 두둥!

북이 느린 박자로 울렸다.

그러자 오크 전사들은 발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자기가 속한 부대를 향해 바삐 뛰어갔다.

정말 더럽게도 춥다.

이게 겨우 초겨울 날씨라니, 앞으로는 얼마나 더 추워진다는 것인가.

불 앞에서 차가운 병장기와 몸을 녹인 오크 전사들은 이것이 북방에서 벌이는 마지막 전쟁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둥! 둥! 둥! 둥!

마차에서 내린 티그마는 흉측한 마갑을 착용한 전투마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서전트가 깜짝 놀라 묻는다.

“직접 나서십니까?”

“아까부터 적의 기병대가 보이지 않는다. 측면을 노리기 딱 좋은 먹잇감이지.”

전장은 드넓은 평원이다.

이런 지형에선 전장을 빠르게 우회할 수 있는 기병이 제일 중요했다.

하지만 적의 진영 어디를 보아도 기병은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말뚝이나, 스파이크 같은 대 기병 무기도 보이지 않았다.

적 지휘관은 멍청이인가?

아무리 수많은 보병을 데려왔다고 해도 돌격을 감행하는 중기병 앞에서는 사냥하기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푸르륵!

인육과 피를 먹고 자라 웬만한 맹수보다 사납고 흉악한 오크 전투마들.

티그마는 자신의 애마를 쓰다듬으며 움직이기 시작한 적 진영을 노려보았다.

* * *

킁킁.

푸르륵!

“하, 하지 마······.”

오랜 기다림이 심심했던 하얀 바람이 눈 속에 숨어있는 눈투성이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몸을 숨긴 눈투성이는 고개를 흔드는 소심한 저항밖에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친 장난에 만족했는지 푸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하얀 바람 녀석.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기병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젠장, 긴장 좀 하라니까.

나는 주의를 시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쫑긋쫑긋.

“쉿.”

나와 눈투성이가 지휘하는 흰 뿔 사슴 기병대는 오크 놈들이 평원 앞에 진을 치기 전, 대열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그리고 평원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눈을 파고 숨었는데, 하얀 털과 뿔이라는 사슴의 천연색 덕분에 위장은 어렵지 않았다.

따뜻한 사슴과 체온을 나누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와 눈투성이.

언덕 아래 평원에는 다른 깃발을 든 두 군세가 천천히 진군하고 있었다.

“·········후.”

됐다, 놈들이 속았다.

오크 지휘관은 북방군에 기병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본인이 직접 전투마 위에 올라타 전장 오른쪽으로 우회하고 있었다.

이런 평원 대회전의 기본이 되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펼치고자 측면을 치기 좋은 장소로 미리 이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변 지형을 정찰하지 않은 적 지휘관의 완벽한 오판이었다.

왜냐하면, 나와 눈투성이가 이끄는 흰 뿔 사슴 기병대는 이미 적이 우회하는 오른쪽 언덕 위에 매복해 있었기 때문이다.

목적은 적의 방진이 아니었다.

우리는 양측 군대가 충돌하는 즉시 위장을 풀고 북방군 측면을 노리는 적 기마대를 그대로 덮쳐 섬멸할 것이다.

만약 성공한다면 주요 전력인 기마대는 물론이고 적 지휘관까지 잡을 수 있다.

나는 그사이 회색 늑대와 푸른 손이 잘 버텨주기를 빌며 전쟁을 지켜보았다.

꽤 멀리 떨어진 언덕임에도 불구하고 전의와 함성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두둥! 두둥! 둥! 둥!

뿌우우우우 - - - - -!!

북소리, 뿔피리 소리, 거친 함성.

그동안 치러온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군세가 나란히 마주했다.

그리고 대열이 완전히 갖춰지자, 양측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소음을 멈췄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킨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독한 침묵이 도리어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적의 기세를 살피는 맹수처럼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는 양측 군세.

철과 같은 부동 속에 움직이는 것은 오직 휘날리는 전쟁 깃발뿐이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둥 - - -!!

북이 울린다.

오크 놈들이 한 발 내디딘다.

두둥!

북이 두 번 울린다.

한 발 앞으로 내디딘 오크 놈들이 창을 앞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는 초록색 물결.

놈들이 내뿜은 콧김과 열기가 파도와 같은 군세 위 해무처럼 짙게 끼었다.

저 위용이 바로 북방 왕국을 멸망케 했던 거센 강철의 파도였다.

오크 군이 일제 돌격을 시작했다.

“Kraaaaaaaaaaaah!!”

“For Honor!”

두려움에 떨어라.

너희들의 도태된 운명을 따라라.

강철 투구 속 타오르는 눈동자는 나약한 인간을 태울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재건된 북방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도리어 기다렸다는 듯 방패를 들고 시위를 당기며 달려드는 오크 군대와 마주했다.

형제들아, 기억하는가.

이 땅 아래 묻힌 수많은 선조를.

우리 오늘 하루, 그들이 남긴 신념을 이어가기 위해 창과 방패를 높이 들자.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와아아아아아아 - - - -!!!”

두두두두두두두!

고조된 열기가 소리를 잡아먹는다.

오직 내 옆 전우가 내뱉는 숨과 내 심장 박동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운데 흰 땅이 서서히 줄어들고,

죽음을 초월한 무언가가 등골을 훑을 때.

병사들은 느려진 시간을 보았다.

“- - - - - - - - -.”

무음.

그리고.

파도와 파도가 부딪힌다.

쾅!

콰직!

으아아아 - - -!

콰직, 쾅!

부딪힌다, 부딪힌다, 또 부딪힌다.

공간이 흔들리는 파괴가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양쪽 군세는 진창에 파묻혔다.

멈출 수가 없다.

피와 흙이 튀기는 전장 한가운데서 오크와 인간은 몸을 던져 서로를 갈아내고 있었다.

연쇄, 분쇄, 연쇄, 분쇄.

용맹함을 넘어선 처절함이 떨어지는 화살 비 아래 녹아내리고 있었다.

살기 위해 태어난 숭고한 생명도 한 차례 전쟁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신념도, 이상도 아닌 지독한 현실이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그리고 절정 없는 고조가 끝을 향하고 있을때쯤 적 기마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끈질기게 견제를 취하던 푸른 손 궁수들이 드디어 놈들을 놓아준 것이다.

아군의 목을 노리는 승냥이 떼.

군침을 흘리며 달려가고 있구나

나는 주먹을 쥐고 들어 올렸다.

꾸욱.

사슴들이 몸을 일으킨다.

우리를 가려주던 눈송이는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고고한 뿔이 하늘로 향했다.

눈투성이의 탑승을 시작으로 창을 든 기병들이 흰 뿔 사슴 위로 올라탔다.

후우.

숨을 깊게 들이마신 우리는 드넓게 펼쳐진 눈의 평원을 향해 돌격했다.

* * *

두두두두두두두!

쒜에엑!

“젠장, 빌어먹을 화살!”

챙!

티그마는 오러가 맺힌 도끼를 휘둘러 빠르게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하지만 자신을 노리는 인간 궁수는 오러가 담긴 화살을 연이어 발사하며 우회 중인 기마대를 집요하게 붙잡았다.

젠장, 빌어먹을 년.

티그마는 궁수를 지휘하는 암컷 계집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사정권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그대로 측면을 노려 사지를 찢어 죽여주마.

챙!

티그마는 날아오는 화살을 다시 한번 쳐내며 달리는 애마를 급히 재촉했다.

그러자 오크 기마대는 더욱더 속도를 내며 직사 사정권에서 벗어났다.

됐다, 이제 화살로는 우리를 잡지 못한다.

허공에 걸쭉한 침을 내뱉은 티그마는 고개를 들어 전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까드득!

전쟁은 한참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오크 군대는 우세할지언정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숫자도, 전투 능력도 더 떨어지는 인간 놈들한테 발이 붙잡힌 것이다.

콰직!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그리고 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인간 놈!

방진 선두에서 대검을 휘두르는 저 전사는 벌써 4번째 서전트를 베어 죽였다.

아니, 사실상 모든 서전트가 놈을 넘지 못해 방진이 유지된다고 봐도 좋았다.

도대체, 도대체 저런 오러를 지닌 인간 전사가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저 위용과 군대는,

마치 예전 기사왕 같은······.

“············!!!”

티그마가 경악했다.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 깨달은 그 순간 흩어졌던 모든 로직이 합쳐진 것이다.

북방 왕국의 재건, 옛 영웅들의 합류!

티그마는 순간 놓칠뻔한 고삐를 겨우 낚아채고 두꺼운 어금니를 악물었다.

“족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선회를 준비하라!”

후퇴라는 단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전쟁 상황은 기마대를 이끈 티그마에게 마지막 결단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 아직 우리가 유리하다.

계획대로 만 된다면 놈들의 용맹도 오늘 이 자리에서 끝이 날 것이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선회를 명령한 티그마는 급히 고삐를 당겨 말머리를 측면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까부터 자신들을 견제하던 적장 계집과 경무장 궁수들이 있었다.

티그마가 울부짖었다.

“거차아아아앙!!”

강철로 만든 창을 앞세운다.

마갑으로 전신을 도배한 오크 기마대가 북방군 측면을 향해 돌진했다.

가속, 그리고 또 한 번 빠른 가속!

거대한 전투마는 농도 짙은 콧김을 훅, 훅 내뱉으며 돌격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 - - -!!

가속이 제대로 붙었다.

진형도 날카롭기 그지없다.

측면을 뚫고 후방으로 빠져나가 방진과 진형을 그대로 붕괴해주마.

티그마는 먹잇감이 된 궁수들과 암컷 적장을 바라보며 승리를 확신했다.

“- - - - - - -.”

‘웃어?’

하지만 거리를 불과 200m 앞둔 적장이 지은 표정은 다름 아닌 시원한 웃음이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열심히 시위를 당겼다는 듯 피로 물든 손을 닦으며 말이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

삐쭉 서는 머리카락.

흥분으로 들리지 않았던 청각이 그제야 제 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티그마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기마대를 덮치는 하얀 사슴들을.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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