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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50화 (50/181)

50화

검은머리 기사왕 50화

“돌아온 전우들을 위하여.”

회색 늑대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잔잔한 목소리로 잔을 들어 올린다.

그러자 긴 탁자 앞에 앉은 지휘관들과 퇴역병들은 다 같이 잔을 들어 올리며 다시 합쳐지게 된 서로의 앞날을 축복했다.

비록 전시 상황이라 술잔에는 물과 평범한 음식이 대부분이었지만,

우리는 그동안 사냥한 고기를 병사들과 주민들에게 아낌없이 풀었다.

절제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작은 연회.

타오르는 사각 화로 사이로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마치 그리운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얍!”

“오오오오오 - - -!!”

그리고 걱정과는 달리 눈투성이는 앞으로 북방군에서 큰 역할을 해줄 퇴역병들과 빠른 속도로 친해지고 있었다.

지금도 보아라.

콩알만 한 녀석이 퇴역병들과 어울려 무려 팔씨름을 시도하고 있었다.

물론 팔을 넘기기는커녕 상대는 미동조차 안 했지만,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영주를 좋아하지 않을 병사는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 모습을 보며 즐겁게 웃는 사이 거친 귀리가 내게 다가왔다.

그사이 깨끗이 씻고 의복을 갖춰 입었는지 추레한 몰골은 환하게 바뀌어 있었다.

“경!”

“음식은 입에 맞나?”

“예, 고향에 돌아온 기분입니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 퇴역병들이 정착할 터전은 북방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제자리를 찾아왔으니 그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

분명 맹물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친 귀리는 술을 마신 것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한차례 달아올랐던 숨을 마시고 내쉬다 이내 눈투성이를 바라보았다.

“······기사왕의 어린 시절을 볼 수 있었다면 아마 저랬을 것 같습니다.”

“싸우는 모습을 보면 더 할 거다.”

가까운 자리에서 기사왕을 보필한 나조차도 가끔 헷갈릴때가 있는데, 오늘 눈투성이와 처음 만난 거친 귀리는 오죽할까.

그는 무려 10분마다 내게 왕의 후손이 아니냐고 물으며 놀라워했다.

그만큼 시간이 갈수록 눈투성이는 기사왕을 닮아가고 있었고 어떨 때는 기준을 능가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거친 귀리는 안심한 듯했다.

굳은 각오로 찾아온 북방군과 왕의 후계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서 말이다.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다른 전우를 더 찾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경. 아직 이 소식을 모르는 전우들이 많을 겁니다.”

탐문 조사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거친 귀리는 여건이 마땅치 않은 상황 속에서도 서른이 넘는 퇴역병들과 연락을 이어왔다.

만약 제대로 된 준비와 거점만 있다면 더 많은 퇴역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베테랑의 합류는 곧 전력상승을 의미.

거친 귀리가 갖춘 전쟁 수행 능력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청을 거절할 정도로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했다.

“목숨이 최우선이라는 걸 잊지 말게. 반드시 우리 영향권 아래서만 움직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경.”

앞으로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

그 불안한 전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친 귀리는 당장 출발 날짜를 내일로 잡으며 무사 귀환을 약속했다.

“그리고······.”

“예?”

나는 말을 흐렸다.

그러자 덩달아 거친 귀리도 옆쪽으로 조용히 다가오며 말귀를 기울였다.

“현자 이야기는 비밀로 부탁하네.”

아마 다른 이들이 기억하는 새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복잡미묘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기반이 반가움일지, 분노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앞으로 훗날을 장담할 수 없더라도 이 이야기는 지금 꺼내지 않는 것이 맞았다.

“······알겠습니다.”

거친 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물잔을 부딪친 우리는 전쟁 전 마지막 연회를 즐겁게 만끽했다.

* * *

두둥! 둥! 둥! 둥!

웃통을 벗은 커다란 오크 전사가 붉게 물든 전쟁 북을 있는 힘껏 두드린다.

그러자 커다란 소리가 주변을 압도했고 북방의 칼바람마저 숨을 죽인다.

서둘러 창문과 문을 걸어 잠그는 노예 마을 주민들과 사방으로 도망치는 동물들.

새벽녘을 따라 울어야 하는 수탉은 이상함을 느꼈는지 부리를 다물었다.

무언가가 오고 있다.

“Uraaaah- - - -!”

쿵, 쿵, 쿵, 쿵, 쿵!

선두에 선 오크 서전트가 고함을 내지른다.

그러자 늙은 두꺼비가 그려진 수많은 전투 깃발이 펄럭이며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오크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한 대족장 티그마의 전사들.

북방 숙영지 최대 단일 전력이라 볼 수 있는 이들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마차 위에 올라탄 늙은 오크 족장 티그마가 있었다.

그 모습은 가히 깃발에 새겨진 늙은 두꺼비와 하등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수많은 군세를 내려다본 대족장 티그마는 편지 내용을 상기하며 혀를 찼다.

오그마르가 보낸 친필 서신에는 군을 출정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이 쓰여있었다.

[부탁한다, 친애하는 티그마여.]

“쯧.”

지난 전쟁 이후, 웬만하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평소 도움을 주었던 친척 오그마르의 부탁만큼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주변 놈들이 얼마나 무능하면 자신에게 친필 서한까지 보냈겠는가.

이왕 할 거 제대로 공적을 세워보자는 생각에 티그마는 그동안 비축해둔 군비와 병력을 총동원해 군대를 일으켰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그리고 군대가 천천히 진군하는 사이 총관에서 소식을 들고 온 기수들이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아 마차로 다가왔다.

“티그마님!”

“그래, 위치를 알아냈느냐.”

“예! 대략 이 부근이라 하십니다!”

이상하게도 적의 본진 위치를 알아내고자 파견한 정찰대와 숙영지 전령은 모조리 소식이 끊겨버린 지 오래였다.

아직 뚜렷한 정체를 모르는 미지의 적이 모든 길목과 주요 요충지를 틀어막고 치밀한 첩보전을 치르고 있는 거다.

하지만 아무리 쥐새끼처럼 감추려고 한들 흘리고 간 빵조각은 바닥에 남는 법.

정찰대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장소를 간추려본 오그마르는 적의 대략적인 위치와 영향권을 지도 위에 표기해주었다.

“······역시 오그마르군.”

놈들은 이미 북방 식민지 한쪽을 전부 집어삼켜 총관을 향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그마르가 어째서 그리 급하게 굴었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적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훅!

티그마는 콧김을 훅 내뱉는다.

그리고 잠시 내려놓았던 지휘봉을 다시 쥐고 오크 전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진군 속도를 올려라!]

펄럭!

쿵! 쿵! 쿵! 쿵! 쿵!

그래, 핥아 달라는데 핥아줘야지.

기만한 움직임을 취하는 적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티그마는 이런 대군으로 간이나 볼 생각이 없었다.

적이 함정을 취하면 깨부수고, 매복하면 그마저도 파훼하면 그뿐이다.

그것이 중앙 대륙을 지배하는 자랑스러운 오크의 전쟁 방식이었다.

대족장 티그마가 이끄는 군세가 북방군이 건설한 전초 기지를 향해 북진했다.

* * *

‘큰 것이 온다.’

기지 밖으로 보내놓은 첩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해왔다.

그동안 상대해온 적과는 차원이 다른 군세를 남쪽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머릿수만 따져도 숙영지 3~4개를 합쳐놓은 엄청난 규모.

북방군의 존재를 눈치챈 오크 군이 드디어 북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방군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꾸준히 군사를 보충, 편제하기도 했고 뒤늦은 퇴역병들의 합류 덕에 현장 지휘가 더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했다,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이보다 더 잘 준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왕국 멸망 이후 최대, 최고의 북방군을 거느리게 된 우리는 이제 적을 조금씩 갉아먹는 게 아닌 단칼에 목을 쳐버려야 할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서둘러 받아 가! 한 명당 하나!’

‘자자, 수량은 넉넉하니까 새치기들 좀 하지 마시오! 기다리는 사람이 많소!’

발 빠른 보급이 시작되었다.

훈련을 끝낸 병사들은 붉은 강철이 약조한 날짜에 맞춰 생산한 질 좋은 무기와 가죽 갑옷을 받아 무장했다.

그리고 전초 기지 앞에 마지막으로 모여 그동안 이룩한 노력의 결실과 웅장한 북방군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 - - - - - -.’

함성은 없었다, 환희도 없었다.

하지만 검은색 가죽 투구를 쓴 그들의 눈빛에는 사명감과 비장함이 맴돌았다.

하나 된 대의, 하나 된 신념이 나약했던 우리를 한마음으로 엮어준 것이다.

이제 무엇이 두려우랴.

죽어야 한다면 내일을 위해 죽겠다.

조용히 전초 기지를 빠져나온 북방군은 북진하는 놈들과 맞춰 남하했다.

결전의 장소는 눈이 쌓인 평원.

도태의 운명을 거스른 북방 인간들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전면전을 선택했다.

* * *

“······많이 길렀는데 아깝구나.”

“헤헤, 거추장스러워서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1년처럼 눈투성이의 머리카락도 많이 자랐다.

더 이상 검은 머리를 숨겨야 할 이유가 없기에 마음 놓고 길러온 것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투구가 쓰기 힘들다는 이유로 머리를 자르기를 원했고 나는 졸지에 전담 미용사가 되어야 했다.

잘 자를 수 있을까.

한동안 미간을 찡그리며 망설인 이내 나는 두꺼운 손으로 가위를 쥔 다음 흑요석 같은 머리카락을 다듬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와, 스승님! 혹시 예전에 해보셨어요?”

“아니,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잡아본 가위는 금세 익숙해졌다.

그리고 가위에 잘려 나간 머리카락 또한 썩 나쁘지 않은 모양새를 유지했다.

날카로운 날로 무언가를 자른다는 게 검술과 일맥상통하는 게 있는 건가?

눈투성이 말대로 내 가위질은 처음치고는 썩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다행이다.

매번 스스로 잘라야 했던 더벅머리보다 깔끔한 단발머리가 어울린다.

사각, 사각.

감을 잡은 나는 집중했다.

그러자 임시로 지은 천막에는 가위질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는 눈투성이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

당장 내일 전쟁을 앞둔 왕의 후계와 기사치고는 너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눈투성이가 내게 물었다.

“기사왕은 어떠셨어요?”

“음, 머리카락이?”

“아니요. 싸우시기 전에요. 국운을 건 전쟁이 잦았던 시기였잖아요.”

눈투성이 말대로 북방 왕국의 건국 과정은 살얼음판을 걷는 역사였다.

부족한 식량, 지친 병사, 부실한 무기.

강대한 적들을 상대해야 했던 우리는 항상 후퇴가 없는 싸움을 해왔다.

그래, 생각해보니 지금도 그렇구나.

비록 당당히 군을 진군시켜 오크 군세를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 이 북방군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모든 전력이다.

만약 이 전면전에서 패배한다면 목표였던 수도 수복은 물론이고 저 영지 노스플롬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1년간 이룩한 성과 모두,

소중했던 추억마저도 말이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긴장하셨다.”

“왕께서요?”

“그래, 잠을 못 주무셨지.”

왕국 주민들과 병사들은 기사왕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자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옆에서 본 기사왕은 즐거울 때 웃고 슬플 때 우는 보통의 인간이었다.

긴장하는 게 당연하다.

그것이 많은 목숨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지휘관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사각.

펄럭!

마지막 머리카락을 잘라낸 나는 가위를 내려놓고 천을 거둬내었다.

그러자 마치 품고 있던 두려움처럼 잘라낸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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