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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49화 (49/181)

49화

검은머리 기사왕 49화

푸르륵!

탁탁!

사슴이 멈추기 전 뛰어내렸다.

그리고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 흐트러진 검집을 제대로 차고 옷에 묻은 흙은 털었다.

마침 지휘관들이 보급받은 흑곰 갑옷을 입고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나는 괜히 겉모습을 한번 신경 쓴 다음 정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웅성웅성.

기지 정문에는 들어오는 수레를 관리하던 병사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분란이나 적대가 아닌 방문자들을 향한 호기심이었다.

“경!”

익숙한 얼굴이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정문을 책임지는 부장이 초조한 얼굴로 다가왔다.

웅성거리는 병사들과는 달리 상황을 정리해 줄 상관을 애타게 기다린 모양이다.

나는 부장을 안심시키며 혹시 몰라 물었다.

“충돌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일단 소지하고 있는 무기만 저희가 보관해둔 상태입니다.”

“잘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와 상황 탓에 제 본분을 잊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문을 지키는 부장은 정해진 수순을 그대로 밟아 대처해두었다.

얼굴을 기억해 두어야겠다.

나는 부장을 향한 짧은 칭찬과 함께 정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자 웅성거리던 병사들이 흩어지며 퇴역병을 자칭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 - - - -.”

세월을 맞은 늙은 얼굴과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듯 추레한 옷과 몰골.

왕국 멸망 이후 도망치며 살았던 그들은 고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절도 있게 기립해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옛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장에게 말했다.

“······무기를 돌려주어라. 빨리!”

그들이 가지고 온 무기는 낡고 녹슬어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 고물이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도 오크 놈들 눈을 피해 가보처럼 숨겨두고 있었다.

다시 올 그날을 위해.

이 낡은 무기와 늙은 몸이 다시 필요로 할 재건의 날을 위해서 말이다.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군요. 이날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경.”

누군가가 나를 알아 보았다.

변한 내 모습을 알아봤다는 건 적어도 요직에 앉아있던 자라는 뜻이다.

부장이 내게 낡은 검을 건넸다.

그리고 그 검을 전해 받은 나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한 중년과 마주했다.

“······기사였나?”

“예, 별 볼 일 없는 기사였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다.

중년 남자는 북방 기사단 소속 기사였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잠시 압수했던 검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내 눈에는 그렇지 않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굳은살과 상처가 남아있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검을 수련하고 준비하고 있었단 이야기다.

별 볼 일 없다니.

기사단의 명맥이 사라지지 않은 건 이런 남자의 끈질긴 의지 덕분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기사와 악수했다.

“흐흐, 부끄럽네. 떡갈나무 방진 출신입니다, 경. 잡병이라 모를 거요.”

“아니다, 정말 반갑다.”

“기병대에서 복무했습니다. 제가 탈 사슴이 남아는 있는지 모르겠네요.”

“걱정하지 마라, 내 사슴이라도 내어주마.”

퇴역 기사 ‘거친 귀리’는 북방 서쪽 지역에서 은둔자처럼 숨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숨어 사는 중에도 틈틈이 연이 닿은 퇴역병들과 연락을 하며 지냈던 모양이다.

불확실한 소문 하나만 믿고 이 먼 거리를 걸어 찾아온 거친 귀리와 그런 상관을 군소리 없이 따라온 퇴역병들.

그들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듯 후련한 미소와 함께 나와 악수했다.

“식사는 했나? 일단 빨리 들어가지! 만나면 깜짝 놀랄 사람들이 많아.”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백전노장들이다.

퇴역병의 합류는 단순한 전력 상승이 아닌 아직 역사가 짧은 신(新) 북방군에게 경험이라는 피를 수혈해 줄 것이다.

나는 음식이라는 말에 얼굴이 환해진 퇴역병들을 안내하며 정문을 통과했다.

하지만 거친 귀리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는 듯 내 옆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경, 따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미리 해야 할 말인가? 복식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리니까······.”

“그게 아닙니다. 흩어진 영웅분 중 한 분의 소재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뚝.

즐겁게 웃던 내 얼굴이 굳었다.

왕국을 떠난 영웅, 소식이 끊긴 자들.

나는 순간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이상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최대한 잊으려고 했다.

그들이 왕국을 떠난 심정과 이유를 알기에 탓하지는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홀로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옛 전우들을 웃는 낯으로 볼 수 없는 짙은 상흔을 남기고 말았다.

나는 복잡한 감정을 애써 숨기며 고개를 숙인 거친 귀리를 향해 물었다.

“누구지?”

“······기억하는 새 님입니다.”

대현자, 기억하는 새.

20살 젊은 나이에 홀연히 나타나 압도적인 능력으로 재상이 되어버린 여자.

북방 왕국의 기초가 되는 모든 행정, 법, 체제는 모두 그녀의 손에서 탄생했다고 봐도 좋을 만큼 뛰어난 명재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사왕이 죽고 왕국이 멸망함과 동시에 모습을 감추었는데 영웅들을 수소문한 나조차도 소재지를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살아 있었구나.

나는 평소 내게 책을 잘 읽어주던 기억하는 새를 떠올리며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어디 있지? 만난 적이 있나?”

“······깊은 산맥에 은거 중입니다. 1년 전에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북부 서쪽 깊은 산맥.

그래, 내가 못 찾을 만했구나.

나는 차라리 듣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을 느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내정 능력을 지닌 기억하는 새가 필요한 시기다.

하지만 내 이성은 더 이상 그녀를 찾지 말라고 강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고민해봐야겠다.

나는 말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앞서 걸어간 퇴역병들을 따라갔다.

그러자 얼굴이 어두워진 거친 귀리가 뒤를 따라오며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을 원망하십니까?”

“······그랬던 적이 있었지.”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검만 휘두를 줄 아는 나를 행정가로 만들어준 스승이 그녀였으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친구도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몸도 마음도 무뎌졌듯, 한때 느꼈던 배신감 또한 무뎌지고 말았다.

기억하는 새를 향해 울분을 토해내기에는 나도 북방도 나이를 먹고 말았다.

“내가 너무 분위기를 흐렸군. 자, 서두르지. 다들 기다리고 있어.”

“알겠습니다, 경.”

쭉 그래왔듯 머리를 털어 감정을 죽인다.

그러자 앞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와 나아가야 할 길만이 내게 보였다.

나는 슬퍼 보이는 거친 귀리를 위로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 * *

“감사합니다, 현자님!”

“저 이제 안 아파요, 헤헤!”

한참 배앓이로 고생하던 아이는 현자가 만들어 준 약을 마시고 금세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그 신묘한 약효 앞에 현자를 찾아온 화전민들은 어김없이 감탄했다.

“정말 다행이구나.”

사람들 사이에서 숲의 현자라 불리는 여성.

젊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모르는 것이 없는 그녀는 자신들이 도움을 청하면 아무런 차별 없이 그 지혜를 빌려주고는 했다.

올 한해 아프지 않고 무사히 보낸 게 다 아름답고 지혜로운 숲의 현자님 덕 아닌가.

아이의 부모는 바리바리 싸 온 곡식들은 공손히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가, 가을에 수확한 귀리입니다. 씨알이 굵은 녀석들만 담았으니 부디······.”

아무리 식량이 귀한 북방이라지만, 사람 목숨보다 귀중하지는 않았다.

아이의 부모는 겨우 이것밖에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현자가 웃으며 귀리를 받았다.

“매번 신세만 지내요.”

“아닙니다! 저희가 더 감사하죠!”

현자와 화전민들은 공존하는 관계다.

그녀는 굳이 귀리를 거절하지 않았고 아이의 부모는 부디 맛있게만 먹어달라는 말과 함께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훈훈한 분위기에 집안 추위마저 잦아든다.

현자와 그렇게 덕담을 나눈 부모는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아, 맞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 아빠는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숲의 현자는 듣지 못한 소문 때문이었다.

“현자님, 혹시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네?”

“저 아랫마을 근방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답니다. 듣기로는 그 규모가 심상치 않다는데, 현자님도 조심하세요.”

“······민란입니까?”

“아뇨, 조금 다르답니다. 다들 헛소문이라고 취급하기는 했지만, 북방군이 돌아왔다는 이상한 이야기가 돌고 있더군요.”

사냥꾼인 아이 아버지는 여기저기 마을 밖으로 발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매번 그에게 바깥소식을 전해 듣는 현자는 불현듯 생각나는 한 사람을 떠올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 마을도 피난을 가야 하나 고민 중이라······. 혹시 생각 있으시면 언제든지 마을로 찾아오세요.”

온갖 약재와 다루는 의술에 능해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는 숲의 현자다.

혹시 이번 일을 계기로 화전민 마을의 주민이 된다면 모두에게 이득이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지만 숲의 현자는 오늘도 그 권유를 공손하게 거절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아쉽다는 얼굴로 가족과 함께 오두막 밖을 나서는 아이의 아버지.

그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어느덧 산 중턱에는 주황빛 황혼이 걸려있었다.

“······북방군.”

숲의 현자, 기억하는 새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명칭을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자 잊고 있었다고 생각한 감정의 동요가 그녀를 천천히 흔들리게 했다.

설마 그가 다시 한번 돌아온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천명을 쫓고 있을 한 영웅을 떠올린 기억하는 새는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눈가에는 짙은 죄책감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집안이 조용해지자 한편에 숨겨져 있던 다락방 문이 열렸다.

덜컹!

“······엄마, 가셨어요?”

다락방 문을 열고 나온 어린 소녀가 엄마를 부르며 눈물을 훌쩍인다.

그러자 깜짝 놀란 기억하는 새는 아이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 먼지와 눈물이 묻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미안해, 엄마가 좀 늦었지?”

“으응······.”

하나밖에 없는 친딸 오목눈이.

성장할수록 자신을 그대로 닮아가는 이 아이는 그녀에게 있어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유이기도 했다.

옛 왕국과 전우를 잊으며 이 깊은 산골에 은거해야만 했던 이유.

기억하는 새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친딸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다시는 시도하지 않을 거야.’

왕이 죽고 모든 게 끝났다.

북방인들은 저항한 대가를 치러야 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죽임을 당했다.

기억하는 새는 보았다.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사람들과 산을 쌓은 수많은 시체를 말이다.

그런 끔찍한 전쟁과 화마 속에 소중한 딸이 휘말리게 둘 수는 없었다.

무거운 책임을 놓아버린 그녀는 이제 눈물을 그친 아이를 끌어안으며 속삭인다.

“엄마랑 산딸기 먹을까?”

“응!”

지난봄 산에서 자란 산딸기를 모아 잼으로 만들어둔 것이 있다.

원래라면 겨울 동안 식량으로 사용할 잼이었지만, 울음을 가친 아이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천장 서랍이 생각났다.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내 딸.

기억하는 새는 방긋방긋 웃는 아이와 함께 부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전쟁, 피난.’

이번 전쟁은 심상치 않다고 했던가.

그녀는 수심이 드리운 얼굴로 피난 갈 마땅한 장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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