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기사왕 48화
북방군은 거센 추위와 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남하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숙영지 여섯 곳을 추가로 점령했으며 동시에 10개가 넘는 노예 마을을 해방해 흡수했다.
보급은 걱정 없었다.
숙영지가 북방을 수탈해 쌓아둔 전쟁 물자는 빵을 깔고 자도 될 정도로 넘쳐흘렀고 놈들이 자랑하는 강철은 고스란히 영지 노스플롬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검이라 할지라도 적을 베다 보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계속된 전쟁으로 병사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행렬을 따라온 주민들 또한 기약 없는 남하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쯤에서 만족해야 함을 느꼈다.
그렇게 원정 재정비를 위해 끝이 없을 것 같은 진군이 잠시 멈췄다.
‘여기서 진을 친다.’
진군을 멈춘 북방군은 적당한 요충지에 자리를 잡고 전초기지 건설을 시작했다.
기왕 한숨 돌리기로 했으니,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전부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거기 제대로 들어!’
‘하나, 둘, 셋! 으라챠!’
넘치는 인력과 자원을 기반으로 빠른 속도로 건설되기 시작한 전초 기지.
앞으로 이곳이 스노우 가든과 노스플롬을 연결해주는 주요 통로가 될 것을 생각한다면 허투루 지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 전초 기지에 무려 ‘스프링로드’ 라는 명칭까지 따로 붙여주며 기지 완공까지 최선을 다해 선두지휘했다.
그리고 기지가 완성되자마자 우리는 전쟁 중 다친 병사들과 전력 외 판정을 받은 해방 주민들을 추려 후방 안전지대인 영지 노스플롬으로 후송했다.
앞으로도 생길 부상병과 해방 주민들을 생각한다면 이 스프링로드를 기점으로 주기적인 노드를 설정해두어야 한다.
이 모든 게 병사와 주민들을 단순히 소모품으로 보지 않는 눈투성이의 배려였다.
간이 대장간을 운영해 줄 붉은 강철의 합류와 현지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무기.
간이 병영에서 열심히 훈련을 받은 신병들은 따끈따끈한 무기를 받고 편제되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우리가 이기면 이길수록 많은 북방 인간이 해방될 것이고 군대가 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결점이었던 성장 한계가 전초기지 건설을 기점으로 깨져버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귀에 마냥 좋은 소식만 들려오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상하고 기다렸던 그 ‘조짐’이 드디어 들려왔기 때문이다.
‘오크 정찰대 발견.’
‘복귀 중이던 오크 서전트 사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주변 숙영지가 드디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매서운 겨울과 함께 찾아온 변혁의 흐름을.
* * *
쾅 - - - -!!!
“히익!”
참다못한 오그마르가 결국 집무실 책상을 양손으로 내려쳐 부숴버린다.
그러자 불안에 떨던 오크 관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얼마나 화가 났길래 그 현명한 오그마르가 저리 행동한단 말인가.
평소 짜증을 내면 냈지, 저리 화를 내지는 않던 오그마르가 책상까지 부수자 관리들은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후욱, 후욱.
아직도 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뜨거운 콧김을 연신 내뱉는 오그마르.
한 오크 관리는 바닥에 떨어진 보고서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반란 발생, 주체는 인간으로 추정, 현재 피해 규모 추측 불가능.]
보통 반란이라 하면 결속에 문제가 생긴 내부집단에서 일어난 것을 뜻한다.
하지만 화재에도 불씨가 있고 깨진 둑에서 흠이 있었듯 반란과 봉기에도 낌새가 있어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뭐, 예를 들어 노예들이 평소에 불만이 많았다거나 아니면 통제하지 못한 걸출한 해방 지도자가 출현했다거나.
그것을 통제하고 사전에 보고하는 것이 바로 숙영지 역할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랬나?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터졌나?
그래서 반란이 터졌다.
보고서를 읽은 오크 관리는 오그마르가 저리 화내는 이유를 공감하게 되었다.
숙영지는 덩치만 큰 싸움 광들이지, 절대 효과적인 행정지구가 아니었다.
얼굴이 악귀처럼 변한 오그마르가 물었다.
“진원지는 확인이 되나?”
“급, 급히 전령을 보냈습니다.”
“전령이 아니라 너희들이 직접 가서 확인해! 돌아오지 못한 서전트들을 조사하면 대충 윤곽이 나올 거다.”
무능한 족장 새끼들은 믿지 못하겠다.
오그마르는 숙영지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는 명령서에 가문 인장을 일일이 찍어주며 관리들을 직접 보내기로 했다.
느낌상 이번 반란은 심상치 않다.
저런 돌대가리들을 끌고 이 자리까지 온 오그마르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미 불은 나버렸으니, 자신이 직접 나서 소방수 역할을 자처해야 한다.
“그리고 너!”
“명, 명하십시오, 총관!”
“너는 티그마에게 군대를 준비하라고 전해라! 위치만 특정되면 바로 출진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라 그래!”
“티그마 족장님 말입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전쟁 영웅 출신 족장 티그마.
오그마르의 가까운 친척이자 가장 큰 숙영지를 운영 중인 대족장이다.
요즘 나이를 먹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다 되었다지만, 가장 큰 숙영지를 운영하는 족장 티그마를 무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넵!”
그래, 오그마르와는 막역한 사이일 테니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오크 관리는 바삐 경례를 취하며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후우······.”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직속 부하들이 나간 것을 확인한 오그마르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보고서를 주워 불에 태워버렸다.
화르륵!
아무리 총관이라 해도 대규모 군세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소집령이 필요하다.
하지만 겨우 노예 반란 때문에 6년간 사용하지 않았던 소집령을 쓸 수는 없었다.
그래, 티그마가 잘 해결해줄 것이다.
오그마르는 한때 유명한 전사였던 친척을 떠올리며 불안한 마을을 애써 지웠다.
밖을 보니 오늘도 눈이 내렸다.
* * *
땅! 땅! 땅!
더 밟아, 더!
전초 기지에 세운 간이 대장간은 오늘도 어김없이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해방 주민 중 대장장이들이 합류해 무기 생산량이 많이 늘어난 덕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붉은 강철이 있었다.
“아내가 너무 보고 싶어······.”
“온 지 일주일 지났는데?”
“너는 사랑을 몰라.”
오직 불과 강철만을 사랑하던 붉은 강철이 이제는 사랑꾼이 다 되었다.
지난번 이벤트로 부부싸움을 잘 넘겼다 싶더니 애정이 더욱 돈독해진 모양이다.
물론 둘 다 나이 탓에 아기는 얻지 못했지만,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나간 세월이 실감이 되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방금 생산된 창 촉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강철의 재질이 좋고 숙련공들이 더 많아서 그런지 노스플롬 산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수량은 얼추 맞춰지고 있다. 아마 원하는 날짜에 맞춰 전부 보급할 수 있을 거야.”
“······고생했다.”
오크 놈들이 쌓아둔 물자 대부분은 당장 가공만 하면 병장기가 되는 원재료들이다.
덕분에 이번에 재편되는 신병들에게도 질 좋은 무기와 갑옷을 보급할 수가 있었다.
끌끌 웃은 붉은 강철이 내게 물었다.
“정말 큰놈이 오는 거냐?”
“그래, 곧 온다.”
오늘 하루만 오크 정찰병 3부대와 숙영지로 향하는 오크 전령 4마리를 죽였다.
주요 길목마다 매복해 이정도지 아마 영향권에서 벗어난 지역에선 우리와 관련된 정보가 열심히 돌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숨길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그동안 꼭꼭 숨겨두고 있던 북방군의 정체가 수면 위로 드러날 차례였다.
“그리고 이길 거다.”
하지만 이 모두 예상된 바다.
아니, 도리어 개전 이전부터 이런 상황만을 쭉 기다려오고 있었다.
그동안 벌인 전쟁으로 충분한 경험을 쌓은 원정군과 미숙하기는 해도 공백을 빠른 속도로 메꿔주고 있는 주민 출신 병사들.
지휘관들은 하나 같이 출중한 능력을 지녔으며 그들을 이끄는 눈투성이 또한 재능의 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장담한다.
왕국 전성기 시절과 비교하면 아직 모자라지만, 근 8년 사이 등장한 부흥군 중에선 이들이 제일 뛰어난 군대였다.
나는 새로 지어진 간이 병영과 훈련 중인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 강철에게 물었다.
“그건? 준비되어가나?”
“71자루째 만들었다. 적당한 품질이면 된다고 해서 서둘러 찍어내고 있지.”
“그것도 얼추 시간이 맞겠군.”
나는 노스플롬을 떠나기 전 붉은 강철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둔 상태였다.
그것은 바로 내가 휘두르기 좋은 적당한 품질의 검을 ‘100자루’ 만들어 달라는 것.
수뇌부들은 혹시 병사들에게 지급할 거냐고 물어봤지만, 나는 대충 쓸 일이 있다는 핑계와 함께 대충 얼버무렸다.
물론 그 이유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붉은 강철이 확인차 내게 물었다.
“오그마르 그놈 때문이지?”
“그래.”
총관 오그마르, 현명한 오크라 불리는 놈이자, 이 북방 식민지를 오랫동안 관리해온 유능한 관리 중 하나다.
하지만 학자처럼 느껴지는 직위와는 다르게 놈은 차원이 다른 오러량과 함께 도끼를 제 몸처럼 다를 줄 아는 실력자였다.
정면으로 맞부딪힌다면 회색 늑대 정도는 돼야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
여태 상대해온 오크 놈들이 뛰어난 전사였다면 여기부터는 이제 초인의 영역이었다.
실력 한 끗 차이로 목이 달아나고 불구가 될 수 있는 치열한 고수의 싸움.
오그마르는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하는 커다란 벽이자 산이었다.
붉은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한은 꼭 맞추마.”
“고맙다.”
말이 좋아 적당한 품질이지, 100자루 전부 붉은 강철이 손수 단조해 만든 물건이다.
나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헌신해주는 강철을 향해 진심으로 감사했다.
병장기가 정상적으로 생산되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또 돌아가 볼 시간이다.
나는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 위 눈을 털어내며 병영으로 들어가려 했다.
다각, 다각, 다각!
하지만 그 순간 전초기지 한가운데 길로 사슴을 탄 병사가 급히 달려왔다.
매번 내게 소식을 전달해주기에 이제는 얼굴이 익숙한 그 병사.
나는 걸음을 멈추며 그를 올려다봤다.
“경! 급히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참 바쁘군. 본진 호출인가?”
“아닙니다! 정문에서 경을 급히 찾습니다!”
“······정문에서?”
“본인을 퇴역병이라 칭하는 자들이 왔답니다! 그들이 꼭 경을 봐야겠답니다!”
퇴역병이라는 말에 순간 깜짝 놀란 나는 본능적으로 옆을 바라봤다.
그러자 덩달아 놀란 붉은 강철이 허겁지겁 정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북방군 퇴역병, 어찌 잊겠는가.
한때 북방을 호령했던 주인공들이자, 이제는 잊힌 우리들의 전우를.
나는 손을 내미는 병사 앞에 서둘러 탑승하고 사슴 털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흰 뿔 사슴이 기다렸다는 듯 정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각, 다각, 다각!
먼저 뛰어간 붉은 강철을 지나친다.
뒤에서 욕설이 들려왔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병사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몇이나 왔었나? 다들 무사한가?”
“서, 서른 명 남짓입니다! 다들 몰골이 추레했지만, 겉은 멀쩡했습니다.”
“혹시 출신 부대는 언급 안 하던가?”
“어······.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근데 다른 자들과는 다르게 대표로 나온 남자가 검을 차고 있었습니다.”
검, 검이라. 검을 다루는 병종은 딱 하나다.
나는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가능성에 사슴을 더욱 재촉했다.
모두가 모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