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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47화 (47/181)

검은머리 기사왕 47화

“촌, 촌장님 어찌 된 거랍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오크 숙영지에 소속된 화살대 마을은 평소와 같이 고된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작과 식량을 조금이라도 더 마련해놔야 이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조용해야 할 어젯밤, 주민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일이 벌어졌다.

지겨운 오크 놈들이 진지를 치고 있는 숙영지 방향에서는 붉은색 화마와 함께 온갖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작년에 있었던 ‘그’ 사건으로 인해 마을이 전체가 어수선했는데 이게 또 무슨 난리인가 말인가.

겁에 잔뜩 질린 주민들은 그나마 안전한 마을회관으로 모여 아침이 올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화마와 비명이 진즉에 잦아들었다.

창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확인한 촌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다녀오겠네.”

“······차라리 이렇게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가셨다가 무슨 변을 당하려고.”

“오크 놈들이 언제는 이유가 있어 죽였나? 차라리 늙은 내가 다녀오는 게 옳지.”

으레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불똥과 화풀이를 당하는 건 바로 이들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상황을 파악하고 오크 놈들에게 납작 엎드리는 게 최선이다.

관리자로 편히 살 수 있음에도 마을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현명한 촌장.

주민들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자청했다.

하지만 그 순간 불안한 얼굴로 창밖을 살피던 마을 청년이 다급히 외쳤다.

“누군가 와요!”

웅성웅성.

젠장, 너무 늦어버렸나.

마을 주민들이 전부 모인 회관은 삽시간에 불안한 웅성거림으로 뒤덮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촌장은 창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 밖을 살폈다.

꿀꺽.

끼릭, 끼릭, 끼릭.

척, 척, 척, 척.

일단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통일된 복장과 무기로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투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오크가 아닌 분명 인간이었고 아직 전투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듯 창날이 날카로웠다.

무장한 인간? 아니 군대?

촌장은 황급히 눈을 비비며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을 믿지 못했다.

그러자 촌장과 함께 마을 밖을 살피던 한 주민이 깜짝 놀라 외쳤다.

“저, 저 사람 아랫마을 부크락 아니야?”

부크락, 농사짓는 암컷 노예.

오크 놈들이 북방 인을 조롱하고자 붙인 흔한 이름 중 하나였다.

하지만 병사들과 함께 수레를 밀고 있는 부쿠락은 노예의 모습이 아니었다.

“3년 전 윗마을로 시집간 아이 아니오?”

“······인구 조정 때 끌려갔었습니다. 잠, 잠깐 벌목꾼네 자식 아니었습니까?”

머릿수를 불린다는 이유로 시행했던 인구 조정 때 마을 아이들 몇몇이 다른 노예 마을로 끌려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저기 수레를 끄는 부쿠락 또한 그런 운이 없는 아이 중 하나였는데, 화살대 마을에는 그 부모가 아직 살고 있었다.

하나 있는 딸을 잃은 슬픔에 3년을 사는 둥 마는 둥 버텨왔던 벌목꾼네 부부.

하지만 산지도 죽었는지도 몰랐던 그 딸이 뜬금없이 병사들과 함께 등장했다.

“아, 아······!”

생기를 잃었던 부쿠락의 어머니는 딸이 왔다는 소리에 이상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주민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본능적으로 문을 열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깜짝 놀라 손을 뻗는 촌장과 주민들.

하지만 부쿠락의 어머니는 이미 대열 옆으로 달려가 어엿하게 자란 딸 아이를 애절한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딸아!”

“엄마!”

역시 부쿠락이 맞다.

수레를 열심히 밀던 그녀는 맨발로 뛰쳐나온 부모를 보며 깜짝 놀란다.

그리고 살아있을 줄 알았다는 듯 서로를 끌어안으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촌장이 먼저 나설 것도 없이 창밖으로 아는 얼굴을 발견한 주민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맨발로 뛰쳐나왔다.

“아들아!”

“누나! 누나, 나야 나!”

누군가는 오래전 끌려간 자식을, 또 누군가는 굶주림에 못 이겨 생이별한 누이를.

졸지에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된 화살대 마을은 순식간에 주민들로 붐볐다.

물론 그들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질서를 지킬 뿐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뿌듯한 얼굴로 주민들을 바라보며 가족 상봉을 지켜보았다.

“가보시죠, 촌장님.”

“······그러세.”

어차피 터질 둑이었다.

그래도 병사 무리가 호의적인 것을 확인했으니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지팡이를 짚은 촌장.

그는 마을 청년들과 함께 회관 밖으로 나가 가장 노련해 보이는 병사를 향해 물었다.

“혹, 혹시 어디서 오신······.”

“이 마을 촌장이오?”

“예, 예!”

“조금만 기다리시오. 곧 그분이 오니까.”

당신들은 누구인가, 오크 놈들은 도대체 어디 갔길래 여기에 모여있는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커다란 도끼를 든 병사는 단숨에 말을 잘랐다.

병사가 존중을 담아 말한 ‘그분’.

노련한 촌장은 그분이 자신들 운명을 결정지을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그 정체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척!

행렬 뒤에서 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경례를 취했고 주민들은 바뀐 분위기에 웅성거림을 멈춘다.

마치 새하얀 눈처럼 휘날리는 털과 고목처럼 높이 자란 아름다운 뿔.

반대로 그 위에는 검은 갑옷과 검은 머리의 소녀가 편안하게 앉아있었다.

촌장은 순간 깜짝 놀랐다.

하필 관리직으로 일했던 그 좋은 기억력이 소녀의 얼굴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왕의 후계 눈투성이.

한낱 노예였던 더벅머리 소녀가 겨우 1년 뒤인 오늘 황금길을 따라 복귀했다.

‘얼마나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더 중요해.’

모두가 미련하다고 혀를 찼던 그 굳센 신념이 과연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가.

촌장은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 *

전쟁을 개전하는 진영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은 바로 선제공격권이다.

더군다나 선전포고라는 개념이 없는 이 야만의 시대에선 더더욱 말이다.

도마 위에 생선을 올려두었는데, 그것을 손질하지 못하는 요리사는 요리사가 아니다.

진영을 한참 철거 중인 오크 숙영지를 보는 우리 입장이 딱 그러했다.

충분히 효과적이고 병력 손실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그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던 우리는 만장일치로 야습을 결정했다.

해가 지고,

화살대 숙영지의 어둠이 찾아왔다.

‘발사!’

슈슈슈슈슉!

어두운 하늘에선 불화살이 떨어졌다.

나무를 베이스로 한 숙영지는 당연히 활활 타올랐고 깜짝 놀란 오크 놈들은 자다 말고 속옷 차림으로 급히 뛰쳐나왔다.

화공 뒤에 몰려올 백병전을 위해 급히 무기만 챙겨 대응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이미 놈들의 습성을 알고 있는 푸른 손과 궁수 부대는 다른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것은 불이 타고 남은 재를 열심히 비벼 까맣게 만든 흑색 화살이었다.

피잉! 핑!

푸슉!

‘컥······!’

아무리 화살이라고 해도 궤적을 놓치지 않고 본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어두운 밤하늘과 동화된 흑색 화살은 동체 시력이 쫓을 수가 없다.

무음, 무형의 화살.

갑옷을 챙겨 입지 못한 오크 놈들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때는 지금이었다.

‘와아아아아아 - - -!’

일찍이 초병을 제거한 허스칼들을 필두로 숙영지를 포위 중이던 보병이 진격했다.

단순히 머릿수는 동수였지만, 전장 상황은 우리에게 너무나 유리했다.

쿵!

쩌억!

두꺼운 앞세워 오크 놈들을 포위하는 떡갈나무 방진과 틈이 보일 때마다 들고 있는 전투 도끼를 내려찍는 허스칼.

갑옷조차 입지 못한 오크 놈들은 몰이를 당하듯 각개격파 당했고 간혹 등장하는 서전트는 회색 늑대가 척살했다.

‘크아아아아아 - - -!!’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족장의 발악.

꽤 수준 높은 오러를 수련한 놈은 커다란 쌍검을 종횡무진 휘둘렀다.

그 모습은 가히 강적이라 할만했다.

‘적의 우두머리는 내게 덤벼라!’

하지만 놈이 아무리 날뛰어본다고 한들 넘어간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다.

눈투성이와 1:1 결투를 원하는 놈의 모습에 감명받은 나는 대답해주었다.

‘지랄 마라.’

궁수 부대!

내 신호만을 기다리던 푸른 손은 놈을 향해 막대한 화살 비를 쏟아부었다.

‘이, 이이! 크아아악!’

회색 늑대 정도는 되어야 날아오는 화살을 오러로 녹이는 묘기를 보일 수 있다.

물론 그럴 능력이 없는 놈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었다.

서걱!

나는 무릎을 꿇은 족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무심하게 목을 베는 것을 끝으로 두 번째 숙영지 점령을 무사히 끝냈다.

이번에도 많은 물자를 얻었고 처음보다 배는 큰 노예 마을을 해방했다.

숙영지 규모가 커졌듯 해방되는 북방인 숫자 또한 점점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승리와 자유가 무엇을 대가로 얻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라.’

적 숫자가 많았던 만큼 사상자도 많았다.

나는 죽은 이들은 따로 모아 깨끗하게 염을 하고 올해 가을 수확한 곡식으로 포근하게 감싸 북방 땅 아래 묻어주었다.

꽤 많은 곡식과 시간이 들었지만, 그것을 아까워하는 전우들은 없었다.

우리는 전시 상황 속 짧은 추모사를 남긴 뒤 한동안 여기서 전력을 추스르기로 했다.

사각, 사각, 사각.

그렇게 어제 있었던 전쟁 과정을 전부 기록으로 옮긴 나는 깃펜을 놓았고,

붉은 강철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보급부대가 가져갈 짐꾸러미에 넣었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네가 좀 와야겠다.]

두 차례 연이어 치른 전투로 인해 주력인 떡갈나무 방진에 공백이 좀 생겼다.

아무래도 1선에서 오크와 부딪히는 병종이기에 사상자가 많은 탓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해방한 주민 중 지원자를 받아 머릿수는 채워 넣기는 했지만,

새로 들어온 신병들을 무장시킬 무기와 갑옷이 조금 부족했다.

몸에 맞지도 않은 오크 갑옷을 햇병아리들에게 입힐 수도 없지 않은가.

여기에 재료와 여건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으니 붉은 강철만 오면 된다.

그리고 겸사겸사 합류하게 된 수많은 북방인들의 처우도 고민해보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모든 기록을 정리해 보관하고 간이 탁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사박, 사박, 사박.

“스승님?”

“음?”

늦은 밤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예고도 없이 내 천막을 찾아왔다.

“헤헤.”

“······술 마셨구나.”

“조금요.”

회색 늑대 이 토끼 고환 같은 놈.

병사들과 잘 어울리는 건 좋은데 아직 어린 제자한테 술을 먹여?

나는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얼굴이 찹쌀떡처럼 풀어진 눈투성이를 바라봤다.

“기분 좋다.”

풀썩 앉은 눈투성이는 탁자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 술 냄새를 풀풀 풍겼다.

하지만 기분 좋다고 말하는 입과는 반대로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있었다.

내가 전장을 정리하는 사이 자진해서 화살대 마을을 다녀온 눈투성이.

복잡한 심경을 알기에 혼자 보냈는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그 모녀를 다시 만난 모양이구나.”

“······네, 촌장님도요.”

벌써 1년도 더 된 이야기다.

모녀를 구하기 위해 검을 뽑은 눈투성이와 도와주기는커녕 도망치기 바빴던 사람들.

구해준 사람에게 외면받은 경험은 아이가 처음으로 느꼈던 배신감이었다.

“말은 걸어봤니?”

“아뇨······.”

“왜?”

“사람들이 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해요.”

그들도 사람이기에 부끄러움을 알았다.

외면하고 개죽음이라 혀를 찼던 어린 소녀가 빛나는 운명을 이룩한 모습에 분명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그것을 시원한 복수나 통쾌한 보복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온 게 아니었으니까.

“너는 그게 틀렸다고 생각했구나.”

“······네, 그들 잘못이 아니니까요.”

눈투성이는 눈처럼 하얀 아이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했지, 절대 그들을 탓할 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하얗지 않았다.

순수한 진심이 아닌, 자신이 찬 검과 갑옷에 의해 결정되는 인간관계.

눈투성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민들 눈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본 것이다.

왕관을 쓴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온갖 인간군상 위에서 북방을 다스릴 아이는 처음으로 그것을 배웠다.

눈투성이는 졸린 눈을 감으며 웅얼거렸다.

“그냥 인사하고 싶었어요······.”

대견하다, 잘해왔다, 기특하다.

부모의 얼굴을 모르고 자라온 아이에게 있어 고향인 화살대 마을은 또 다른 정체성이며 부모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하지만 이미 옛 추억으로 남은 기억처럼 그리움은 현재를 묶어두는 상흔만을 남겼다.

이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슥슥.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성장하기 위한 통증을 감내하고 있는 눈투성이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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