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기사왕 46화
숙영지 기습은 효과적이었다.
당최 이런 대규모 군세를 예상조차 못 한 적 지휘관은 오크 전사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전투를 벌여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냐고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아무리 3선급 군대라 해도 오크는 타고나길 싸우기 위한 존재들이었다.
놈들은 지휘관 명령이 없더라도 인간 군대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방진!’
쾅! 콰직!
전통적인 모루 싸움이 벌어졌다.
선두 공세를 담당한 이들은 다름 아닌 떡갈나무 방진이었고 회색 늑대는 손수 방패를 들어 그들을 선두지휘했다.
강철과 완력으로 무장한 놈들답게 떡갈나무 방진을 무섭게 밀어붙이는 오크들.
병사들이 방패를 들기 무섭게 날카롭고 무거운 도끼들이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겨우 이런 공세에 당하려고 출전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버텨라!’
오늘 출정한 병사 중 가장 고된 훈련을 받은 이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지휘관들은 백이면 백 떡갈나무 방진을 꼽을 것이다.
그만큼 방패를 쥔 그들은 살과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며 방진을 완성했고 그 노력의 성과는 당연히 전장에서 발휘되었다.
쾅!
밀리지 않는다.
방진은 타고난 오크 전사들 앞에서도 한 치 물러남 없이 대열을 유지했다.
그러자 도리어 당황한 건 놈들이었다.
방패 사이로 자기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수많은 인간과 마주해보아라.
오크 놈들은 그 순간만큼은 전사의 본분을 잊고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꼈다.
‘궁수부대!’
방진이 버티자 전장은 넓어졌다.
영리한 푸른 손은 첫 사격이 끝남과 동시에 궁수부대를 우회시켰다.
그리고 오크 놈들이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완벽한 사각에서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
쒜에에에엑 - - -!
파바바박!
직사로 쏟아지는 수많은 화살.
방비할 틈도 없이 원거리 공격에 노출된 오크 전사들은 우수수 쓸려나갔다.
거기까지였다.
전투는 사실상 우회를 허용한 순간 끝났다.
하지만 북방군은 산발적 후퇴를 시작한 놈들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뿌우우우우우 - - - -!!
이제는 익숙한 뿔피리가 울린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발굽 소리가 전장을 강타했고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 놈들이 몰고 다니는 전투마와는 그 위용부터가 다른 흰 뿔 사슴 기병대.
전장을 울리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나와 눈투성이가 이끄는 기병대가 등장했다.
‘돌격!’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압도적인 질량, 속도, 힘!
내리막길 진 언덕을 순식간에 달려간 기병대는 그대로 패잔병을 들이박았다.
콰직!
마갑을 착용한 전투마가 보병을 학살하는 마당에 거대하고 날카로운 뿔을 앞세운 흰 뿔 사슴들은 오죽할까.
오크 놈들은 착용하고 있는 강철 갑옷 채로 몸과 머리가 찢겨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지역 수복을 위한 첫 번째 전투는 북방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까악, 까악!
하지만 우리는 함성과 환희보다는 묵묵히 전장을 정리하고 다음 전쟁을 준비했다.
수복해야 하는 북방은 너무나 넓었고 승리의 기쁨은 아직 일렀다.
뒤늦게 날아온 까마귀들만이 눈치 없이 시체 위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 * *
첫 번째 전투를 무사히 끝내고 점령한 숙영지에 진지를 세운 북방군.
사상자 치료와 전리품 정리를 끝낸 지휘관들은 서둘러 지휘관 천막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자리에 모인 우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공적을 축하하는 치하와 수고했다는 따뜻한 인사가 아닌 뻘쭘한 웃음이었다.
전리품 품목을 확인한 푸른 손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음 보급은 돌려보내도 되겠는데요?”
오크 놈들이 건설한 숙영지는 북방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물자를 저장하고 그것을 본토에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하지만 욕심 가득한 족장 놈들은 그 자원을 몰래 빼돌려 착복했고 손수 만든 개인 창고에 고스란히 저장해두었다.
그 수량만 무려 우리가 충분히 사용하고 후방 기지인 노스플롬으로 보내도 될 정도.
푸른 손 말대로 영지에서 아끼고 아껴 보낸 보급은 다시 돌려보내도 될 것 같았다.
회색 늑대는 어느새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진군 속도를 좀 올려야겠군. 본토로 옮기기 전에 우리가 다 차지해야 해.”
“······동의한다.”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다.
이 물자들은 북방 인간들을 노예처럼 다뤄 착취해낸 피와 땀이다.
적어도 해방한 노예 마을 주민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돌려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눈투성이가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은 창고를 열어 아낌없이 음식을 풀어주세요. 고기도 많이 넣어서······. 따뜻하고 맛있게요.”
“네, 알겠습니다.”
일평생을 씹을수록 거칠고 차가운 음식만 먹어왔을 노예 마을 주민들이다.
지금은 희망과 이상이라는 말보다 따뜻한 고기 수프 한 그릇이 더 간절했다.
특히 ‘맛있게’라고 강조하는 어린 영주님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 지휘관들.
그렇게 첫 번째 사항이 마무리되자 머리를 벅벅 긁은 회색 늑대가 물었다.
“그나저나 다음 표적은 정했나?”
“······음, 예정은 있다.”
우리가 현재 점령한 숙영지를 첫 번째 표적으로 정한 이유는 그저 가까워서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숙영지 분포가 균일하니, 뚜렷한 목적과 표적을 정해 진군을 하는 게 옳았다.
총관을 쳐서 단기전을 유도할 것인가.
마을은 차례차례 정복하고 전초 기지를 세워 장기전을 유도할 것인가.
물론 지휘관들의 생각은 일치했다.
‘겨울이 끝나기 전 이 전쟁을 끝낸다.’
‘단기전으로 장기적 결과를 만들자.’
당최 이 개전 시기는 겨울과 추위라는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정한 것이다.
아무리 겨우내 잘 싸우고 승리했다고 한들 봄이 찾아와 본토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번 전쟁은 단기전이며 동시에 장기적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전쟁과 내정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우리의 선택은 불 보듯 뻔했다.
‘수도 수복.’
한때 왕국이라 불렸던 북방에는 많은 인간이 모여 사는 도시들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대규모 침공으로 하나 같이 파괴당해 대부분 터만 남게 되었는데,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끝까지 보존이 된 곳이 딱 한 곳 있었다.
바로 현재 식민 지배의 중심인 총독과 총관이 있는 옛 북방 왕국의 수도 스노우 가든.
오크 놈들에게 뺏겨버린 북방의 심장이자 왕이 살던 터전이었다.
탁!
나는 지도 위 미리 표기해둔 지점을 손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 병력으로 공성전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남진하는 동안 보이는 숙영지를 해방하고 적을 기만해 전면전을 유도한다.”
우리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려면 총관에 처박힌 병력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고 한차례 야전에서 승리만 할 수 있다면 중심이나 마찬가지인 총관을 부숴 잔당의 각개격파가 가능할 것이다.
“쉽지 않겠군. 하지만 해볼 만해.”
오크 놈들을 쉽게 이길 생각이었다면 전쟁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비장한 얼굴로 눈을 마주치며 앞으로 있을 고난을 굳게 각오했다.
푸른 손이 탁자를 정리했다.
“저는 이만 돌아가서 출정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그럼 다음 숙영지는······. 화살대 마을이군요. 마침 부족했는데 잘됐습니다.”
“아···!”
화살대 마을.
그래, 화살대를 만드는 노예 마을과 숙영지가 이 근처에 있었구나.
참 운명도 얄궂지, 그곳에서 시작된 운명의 대단원이 이렇고 돌고 돌아 다시 돌아왔다.
살며시 시선을 옮기자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눈투성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의 귀환, 지금과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 * *
“자자! 그릇을 들고 와서 한 사람씩 받아 가세요! 양은 넉넉하게 있습니다!”
병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자기 하반신보다 큰 냄비를 들고 왔다.
그 커다란 냄비에는 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은 영양 만점 수프가 팔팔 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병사를 위한 것이 아닌 주민들을 위해 따로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한 그릇씩 받아 가라는 소리에 숨죽이고 있던 주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우리한테도 주는 거요?”
“진, 진짜 고기잖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다른 종족도 아닌 무려 인간이 창과 방패로 무장해 오크를 공격하다니.
도대체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걸까.
그동안 수많은 반란을 봐왔던 주민들은 자신들에게도 악영향이 끼치기라도 할까 싶어 가만히 집에 숨어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숙영지를 점령한 그들은 한낱 도적도 치기 어린 반란군도 아니었다.
군기로 대열을 이루고 점령지를 관리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분명 아주 먼 과거, 자랑스러워했던 그들과 굉장히 흡사했었다.
반신반의하던 주민들은 하나둘 냄비 앞으로 몰려들어 나무 그릇을 내밀었다.
정말 음식을 나눠주는 건가?
굶주림으로 가득한 눈동자들이 병사가 바삐 움직이는 국자를 따라 움직였다.
푹! 쪼르륵 - - - 툭, 툭.
꿀꺽.
병사가 음식을 퍼 담았다.
수프가 얼마나 걸쭉한지 국물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건더기들이 흘러넘친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제대로 된 음식인가.
해가 지고 나서도 가시지 않던 불안감과 의심이 겨우 고기 수프 한 그릇으로 깔끔하게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배급은 금세 이뤄졌다.
주민들은 눈이 오는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미친 듯이 수프를 퍼먹기 시작했다.
속이 따뜻해지고 배가 부른다.
고기가 너무 뜨거워 파하 하고 내뱉는 이 일련의 과정마저 행복했다.
하지만 배가 부르고 이성이 돌아오자 병사들을 향한 의문은 더 커졌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주민 중 결국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 나서 물었다.
“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혹시 다른 곳으로 끌려갑니까?”
보통 숙영지를 점령했으면 그 부속품들인 자신들을 향해 강압적으로 명령을 내리거나 합류를 중용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벌써 해가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배급해주는 병사들 말고는 아무도 마을로 찾아오지 않았다.
“어······. 잠시만요.”
한참 끓어오르는 수프를 열심히 휘적이던 병사가 자신의 상관을 향해 물었다.
“조장님, 혹시 위에서 내려온 명령 같은 거 없었습니까? 노인장이 궁금해하시는데요.”
“다른 명령은 못 들었는데······. 계속 음식만 배급해주라고 들었어.”
“그렇다는데요? 한 그릇 더 드릴까요?”
“예, 예!”
어안이벙벙해진 노인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프 한 그릇을 더 받았다.
그러자 주변 주민들 또한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냄비 앞으로 몰려들었다.
일단 배불리 먹여라.
굶주림이라는 고통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눈투성이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음식을 나누기를 원했다.
하지만 단순하고도 순수했던 그 마음은 오랫동안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노예 마을 주민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왔다.
빛 바란 이상보다 당장 먹을 빵을.
대책 없는 희망보단 명확한 내일을!
이들은 그동안 떠들기만 했던 몽상가가 아닌 현실을 움직일 줄 아는 자들이었다.
더 맛있는 수프!
더 많은 수프!
그다음 날 출정에는 짐을 챙긴 주민들이 자연스레 행렬을 이뤄 군대를 뒤따라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행렬과 군대의 거리는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북방군과 수프 행렬이 융화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 대열을 이룬 북방 인들은 남쪽을 향해 계속해서 진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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