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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45화 (45/181)

검은머리 기사왕 45화

사각, 사각, 사각.

가을이 끝나가는 시점, 북방 식민지를 관리하는 총관에는 각 숙영지에서 보낸 오크 서전트들이 기립한 채 서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서전트가 한자리에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총관에는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있었다.

타고난 전사인 그들조차 바삐 깃펜을 움직이고 있는 한 오크 앞에 꼬리를 만 것이다.

철의 총독 오그마르.

3선급 군대와 인선이 몰린 북방 식민지를 지탱하는 기둥이자, 모든 오크가 존경하는 뛰어난 오러 전사였다.

하지만 그 오그마르가 서전트들이 가져온 보고서를 정리하며 혀를 찼다.

“수확량이 줄었군.”

“그, 그게!”

“나도 안다. 하지만 좀 적당히 해 처먹어야지, 이건 너무하지 않나?”

북방 숙영지는 권력에서 멀어졌거나 타고난 무능력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 때문인지 숙영지에서는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했는데 본토로 넘겨야 하는 자원들을 착복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총관으로 수송이 될 자원이 작년과 비교해 20% 이상 떨어지지 않았나.

한직으로 몰려난 족장들 마음을 최대한 이해하려 했던 오그마르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미간을 짚었다.

“당장 숙영지로 돌아가서 족장들한테 다시 알려라. 정해진 수량, 수확한 그대로 다시 보내라고! 알아들었나?”

“예, 알겠습니다!”

“볼일 끝났으면 꺼져!”

오냐오냐하니까 선을 지킬 줄 모른다.

분노한 오그마르 앞에 사색이 된 오크 서전트들은 문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덜컹, 쿵!

북방 식민지가 생긴 이후로 쭉 총독 자리를 맡아 바쁜 일생을 보낸 오그마르.

충성심 하나로 버텨오던 그는 자신이 슬슬 나이를 먹는다는 걸 느꼈다.

오그마르는 독한 증류주를 마치 물처럼 마시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

위대한 황제가 죽은 이후 본토는 여전히 내전이라는 혼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오크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기는커녕 서서히 옛 정신을 잊어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총독을 맡길 후임자를 찾아 인수인계를 해줘야 할 텐데, 마땅한 인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

오그마르는 칼만 쓸 줄 아는 멍청한 서전트들을 떠올리며 독주를 다시 들이켰다.

똑똑.

“······들어와라.”

쓴맛이 채 가시기 전 누군가 노크했다.

아마 자신이 지시한 일을 알아보기 위해 나갔던 관리가 돌아온 모양이다.

“오그마르님?”

“그래, 알아봤나?”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열리는 문.

집무실을 찾아온 총관 관리를 향해 오그마르는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답답한 걸 싫어하는 상관이다.

관리는 급히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주변 숙영지를 수소문해봤는데, 아예 부족 원들 전체가 사라졌답니다. 침공당한 흔적이 없는 거로 보아 대규모 이동을······.”

“아무런 보고 없이? 독단으로?”

“······네.”

올해 가을 있어야 할 수확량 보고에 한 숙영지가 소식 없이 불참했다.

처음에는 일이 있어 늦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숙영지 서전트는 총관을 찾아오지 않았다.

순간 불안감을 느껴 근처 숙영지로 관리들을 파견해본 오그마르.

돌아온 소식은 숙영지 전체가 무단이탈했다는 충격적인 보고였다.

“······이탈한 날짜는 모르나?”

“그쪽도 처음 알았답니다. 아시잖습니까?”

“정말 미치겠군.”

각 지역과 노예 마을을 관리하는 숙영지들은 부족 단위로 움직이는 독립 개체다.

거기에 척박한 지형도 겹쳐 서로를 향한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게 특징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웃 숙영지 전체가 사라졌는데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게 정말 말이 되는가.

이 엘프 고환 같은 북방 식민지!

오그마르는 무언가가 끓어질 것 같음을 느끼며 찡그린 미간을 짓눌렀다.

“일단 본토에 보고해. 겨울이 지나면 조사단을 파견해서 알아보겠다.”

“······괜찮겠습니까?”

“그럼 덮어? 황제의 자식인데?”

사라진 숙영지의 족장은 티그르.

황제의 44번째 아들이자, 권력에서 밀려나 버린 무능하고 불운한 왕자다.

아무리 북방으로 밀려나고 총독 허락 없이 무단으로 이탈했다지만, 황제의 핏줄을 함부로 외면할 수는 없었다.

멍청한 놈들.

다음 봄이 바빠질 것을 걱정한 오그마르는 한숨과 함께 창밖을 바라봤다.

북방은 자신들이 빨리 꺼져버렸으면 좋겠는지 초겨울을 알리는 눈을 내뿜고 있었다.

“젠장,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들!”

오그마르는 욕설과 함께 일어났다.

눈 치워야 한다.

* * *

“잘 어울리는구나.”

“······너무 부드러워요.”

눈투성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나온 흑곰 가죽 갑옷을 어루만지며 작게 감탄했다.

마을에서 잡힌 거대한 흑곰 가죽을 가공해 붉은 강철이 손수 만들어준 왕의 갑옷.

두꺼운 털 덕에 보온은 물론, 뛰어난 내구성까지 갖춘 완벽한 갑옷이었다.

이 정도면 눈먼 화살은 물론이고 오러가 없는 검 정도는 충분히 막아줄 것이다.

나는 눈투성이 머리 색과 똑같은 흑곰 망토를 입혀주며 등을 툭 쳤다.

“자, 이제 나가자.”

“네!”

거지꼴로 앉아있던 소녀는 어디 가고 위엄 있는 영주가 눈앞에 있다.

눈투성이는 익숙한 몸집으로 왕의 검을 찬 뒤 허리와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터벅, 터벅, 터벅.

후우우우우웅 - - - -!!

복도를 걷자 차가운 초겨울 공기가 얼굴과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열기가 뜨겁게 공존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뱉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는 간지럽고도 격한 감정이었다.

이건 감염이다.

격한 태동을 느낀 흥분의 감염.

“- - - - - - -.”

끼이이익, 덜컹.

눈투성이와 함께 건물을 나섰다.

그러자 열린 문 뒤로 대열을 이룬 북방군과 수많은 주민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떨리는 장관이다.

한 종족, 모든 북방 인간이 오늘 있을 출정식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

병장기를 굳게 쥔 엄숙함.

나는 천천히 눈투성이 곁에서 물러나,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로 걸어갔다.

이제 이 수많은 인간이 보내는 눈빛은 눈투성이가 홀로 감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는 떨지 않았다.

도리어 모두가 보란 듯이 왕의 검을 쥐고 선두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뚜벅, 뚜벅, 턱!

자리에 멈춰 섰다.

눈투성이의 작은 입이 열렸다.

“내게는 타고난 운명이 있다. 마을에서 미숙아로 태어나, 노예처럼 살고, 노예처럼 죽어야 하는 게 정해진 순리였다. 그것은 제군들 또한 같았을 것이다.”

눈투성이는 나와 잠을 설쳐가며 고치고 또 고쳤던 연설을 읽기 시작했다.

오러가 담긴 목소리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인간들에게 속속히 전해졌다.

“단순한 힘의 논리였다. 타고나길 약하게 태어나 핍박받았던 선조들처럼, 우리도 그런 운명을 백 년이고 천년이고 쭉 타고나야 한다. 우리의 자식과 후손들마저도.”

“그런 운명을 정한 건 하늘인가?”

눈투성이는 병사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힘이 빠지지 않는 병장기를 같이 움켜잡았다.

두 눈이 뜨겁다.

평생을 자책하면 살아온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조그마한 왕은 당당하게 발을 딛으며 외쳤다.

“그렇다면 듣지 않겠다! 짓누르면 일어나고, 핍박하면 저항하겠다! 가족과 이웃을 위해, 인간을 위해 무기를 잡은 제군들과 끝까지! 끝까지 운명을 거스르겠다!”

“그것이 천(天)명이라 할지라도!”

역천, 하늘을 거스른다.

타고난 운명에서 벗어나 왕의 검을 쥔 아이처럼 인간은 거스르는 운명을 타고났다.

이를 악문 눈투성이는 흥분으로 떨고 있는 병사들 앞에서 검을 뽑았다.

챙!

“패배하는 것이! 죽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힘의 논리라면 그대로 돌려주자! 이제 죽어야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펄럭!

눈투성이가 검을 뽑자,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붉은색 깃발을 들어 올렸다.

부러진 검을 감싸고 있는 타오르는 불꽃!

왕국 멸망 이후 다시 한번 이어진 인간들의 마음이 날카로운 검을 만들었다.

죽어야 한다면 내일을 위해 죽겠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영지 노스플롬을 빠져나온 군대는 초겨울을 알리는 첫눈과 함께 진군을 시작했다.

* * *

“크하하하하!”

“한 번 더!”

겨울을 알리는 첫눈이 옴과 동시에 숙영지는 예정대로 철거를 시작했다.

시간을 조금만 지체해도 강철을 얼리는 북방의 추위가 몰려올 것이다.

하지만 몇몇 추악한 오크는 마치 마지막 근무를 기념하기라도 하듯 노예 마을로 내려가 인간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아이가 잠자리 날개를 뜯으며 좋아하는 것에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젠장, 죽어버렸잖아!”

머리에 돌을 맞은 소년은 바닥에 쓰러졌다.

오크 놈들 말대로 뛰어가다가 뒤통수에 그대로 돌팔매를 당한 것이다.

내기에서 진 오크 하나가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이 내기에서 졌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지, 근처에 엎드려 있던 한 소녀를 끌고 와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직 하나 남았어!”

털썩!

소녀는 초점이 없는 얼굴로 이미 숨이 끊겨버린 소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배고프다고 칭얼거릴 때마다 항상 산딸기를 몰래 따다 주던 소중한 오빠.

겨우 심심하다는 이유로 돌을 던져 죽인 오크 놈들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울까,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을 가지고 노는 것은.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신은 약하고 비루한 노예니까.

소녀는 조용히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 곧 다가올 끔찍한 고통을 기다리려 했다.

철컥, 철컥, 철컥.

그 순간 시체 바로 뒤 풀숲에서 무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숙영지 건물을 해체하던 동료가 잠시 돌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한참 재밌게 놀던 오크 전사들은 아쉽다는 듯 돌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음?”

하지만 놈들을 찾아온 자는 동료도 상관도 아닌 바로 인간 남자였다.

그것도 검은 흑곰 갑옷과 날카로운 검으로 중무장한 인간 기사 말이다.

기사는 오크 놈들을 무심히 쳐다보다 이내 소녀와 죽은 소년을 발견했다.

그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잘됐군, 마침 북이 필요했는데.”

“퇴, 퇴역 기사인가? 서전트를 불러라!”

“그래, 다 불러와라.”

스릉!

부리지는 검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급히 서전트를 호출하려는 오크 전사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크르르르르······.

아무리 무서운 인간 기사라지만, 놈은 흰머리가 난 늙어빠진 퇴물이다.

오크 전사들은 동료가 서전트를 불러오는 사이 기사를 막고자, 가지고 왔던 도끼를 차례차례 들어 올렸다.

그 숫자만 무려 여덟, 인간 기사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수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뒤이어 들려온 무언가로 인해 처참히 무너져내렸다.

뿌우우우우우우 - - -!!

뿔 나팔이 울렸다.

숲이 흔들린다.

바닥은 지진이 난 듯 흔들렸고 군세가 만들어 낸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새하얗게 질린 오크 전사들.

다가오는 부러지는 검 뒤로 무장한 인간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척, 척, 척, 척!

날카로운 창칼, 질겨 보이는 가죽 갑옷.

털로 만든 투구에선 매서운 눈빛이 흘러내렸고 발을 맞춘 군기는 여기까지 전해졌다.

단순한 민란이 아니다.

고요하던 북방에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서걱!

툭!

부러지는 검이 섬광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도망치려던 오크 전사 둘이 허무하게 쓰러져 녹색 피를 뿌린다.

“다 불러오래도.”

부러지는 검이 피를 털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인간을 비웃어보라는 듯 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오크 전사들이 죽기 직전 본 마지막 시야는 검성의 검날이 마지막이었다.

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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