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기사왕 44화
“안, 안녕.”
푸르륵!
눈투성이가 수줍게 인사한다.
그러자 바로 앞까지 다가온 흰 뿔 사슴 우두머리가 조용히 투레질했다.
마치 커다란 고목처럼 돋아난 뿔, 치열한 삶을 증명하듯 새겨진 수많은 흉터.
오랜만에 마주한 녀석은 여전히 감탄을 자아내는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처음과는 달리 우리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지도 마치 벌레를 보듯 무심하게 보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나와 눈투성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녀석은 영지 노스플롬을 이웃이자 도와줄 친구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우두머리를 향해 물었다.
“네가 보내준 거지? 그 친구들.”
촌장이 말하길, 주민들이 한참 야생 곰들로 인해 고생하고 있을 때 마을 정문으로 서른 마리 흰 뿔 사슴이 찾아왔다고 했다.
녀석들은 이전과는 달린 손길을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친구들을 도와주기 위해 온 녀석들처럼 친근하고 든든했다고 했다.
그렇게 같이 곰 사냥을 해온 인연을 시작으로 재탄생한 북방 기병대.
마을 인근에는 벌써 서른 마리가 넘는 사슴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녀석들은 길들인 가축이 아니다.
언제든 부름에 응해줄 든든한 친구이자 전장을 함께할 전우들이었다.
푸르륵!
내 물음에 우두머리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작게 투레질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높게 들어 마을 주변을 자유롭게 노닐고 있는 사슴들을 지켜봤다.
떨어져 지내게 된 형제들이 걱정되어 대평원에서 잠시 내려온 모양이다.
귀를 팔락이며 한참 집중 중인 녀석.
나와 눈투성이는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해 주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다각, 다각, 다각.
“음?”
하지만 우두머리는 형제들이 아닌 영지로 돌아가려는 우리를 따라왔다.
마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눈동자로 말이다.
“앗!”
촉촉하고 말랑한 코를 뻗어 눈투성이 냄새를 킁킁 맡아보는 우두머리.
마치 촉촉하고 부드러운 빵 같은 감촉에 눈투성이는 살며시 손을 뻗었다.
“와아······.”
코를 만져본다, 얼굴과 뿔도 만져본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꺼리는 기색은커녕 기분 좋게 눈을 감으며 감촉을 즐겼다.
작은 아이와 커다란 사슴.
그 광경은 마치 전설 속 나오는 이야기를 한 폭의 그림으로 옮긴 예술작품 같았다.
다각.
“응?”
하지만 한참 그렇게 교감을 나누던 우두머리는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바닥에 살며시 앞무릎을 꿇으며 공손하게 고개와 얼굴을 숙인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했다.
우두머리는 인간 친구들을 태운 형제들처럼 아무도 올라 타보지 못한 고귀한 등에 눈투성이를 허락하려 했다.
왕과 왕이 서로를 알아보듯, 함께 전장을 활보할 친구를 알아본 녀석.
눈투성이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존중을 표하며 커다란 우두머리 등에 올라탔다.
다각, 다각.
푸르륵!
올라탄 눈투성이가 조심스럽게 자세를 잡자 우두머리는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꿇었던 무릎을 천천히 펴며 그 태산과 같은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새하얀 사슴과 까만 눈투성이.
그 모습은 마치 커다란 눈덩이 위에 까만 콩을 올려둔 것 같았다.
나는 눈투성이를 향해 물었다.
“기분이 어떠냐.”
“좋아요!”
다른 흰 뿔 사슴보다 배는 큰 녀석이다.
아마 조그마한 눈투성이에게는 높은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일 것이다.
그리고 녀석 또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지 두꺼운 귀를 연신 팔락였다.
푸르륵!
앞서 치르게 될 수많은 전장이 걱정되었는데 녀석이 있다면 안심이다.
아마 치열한 난전 상황 속에서도 눈투성이를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다.
“이름을 지어줘야겠구나.”
“이름이요?”
“그래, 이름.”
소중한 친구를 언제까지 우두머리나 녀석으로 부를 수는 없었다.
앞으로 많은 날을 함께 지내려면 우리와 같은 북방식 이름이 필요했다.
내 제안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민에 빠진 눈투성이.
눈치 없는 우두머리는 왜 친구를 귀찮게 하냐는 듯 이쪽을 향해 투레질했다.
놈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잘해라.’
‘너나 잘해.’
얻어타기는 그른 것 같다.
나는 혀를 작게 차며 벌써 자기 친구를 챙기는 녀석을 고깝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소리 없는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한참을 고민하던 눈투성이가 드디어 녀석의 이름을 결정했다.
“하얀 바람······. 하얀 바람 어때?”
아직도 기억이 난다.
흰 뿔 사슴이 무리를 지어 드넓은 평야와 숲을 가로지르는 장관을 말이다.
그 장관은 마치 북방을 질주하는 눈보라와 닮았고 선두에는 그 흐름을 이끌었던 아름다운 하얀 바람이 있었다.
할짝.
이름을 정한 눈투성이는 허락을 구하기 위해 까만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하얀 바람은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은 손을 날름 할짝댔다.
* * *
북방의 늦가을은 짧다.
수확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에 까만 먹구름이 끼었고 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칼처럼 날카로워진다.
또다시 겨울이 다가오는구나.
창문을 열어 새벽 공기를 맡은 주민들은 부쩍 다가온 초겨울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 추위가 무색하게 노스플롬 영지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깡! 깡! 깡!
더 밟아! 더!
붉은 강철이 운영하는 마을 대장간에선 벌써 이주일째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수많은 기술자가 동원되어 병사들이 사용할 무기를 생산 중인 것이다.
벅찬 얼굴로 자신을 상징하는 모루 문양을 날에 새기는 붉은 강철.
그와 기술자들이 만든 질 좋은 무기는 병종 차별 없이 공평히 돌아갔다.
물론 갑옷을 빼놓을 수는 없다.
병사들에게는 무기와 더불어 한해 추운 전장 날씨를 버티게 해줄 두꺼운 가죽 갑옷과 털이 달려 따뜻한 투구들이 보급되었다.
‘이, 이게 우리 거라고?’
‘누비 갑옷이 아니잖아!’
처음에는 병사들도 믿지 못했다.
보통 정예병이 아닌 민병에게는 구색만 갖춘 장비를 주는 게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주 눈투성이는 질 좋은 무기와 갑옷을 병사, 지휘관 가리지 않고 전부 공평하게 보급해주었다.
이게 전부 다 아무런 대가 없이 가죽들을 기부해준 사냥꾼들과 밤새 바느질을 한 병사들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통일된 복장과 질 좋은 병장기.
주민들이 뒤를 봐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명감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우리는 전쟁 소모품이 아니다.
다 같은 형제이며 전우이다.
그렇게 모두가 힘을 합쳐 북방의 통일을 염원한 늦가을, 영지 노스플롬은 통일 전쟁을 위한 준비를 전부 끝냈다.
하지만 편제도 보급도 모두 끝낸 상황에서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우리 영지를 상징함과 동시에 전쟁에서 높이 추켜들 깃발 문양이다.
붉은 강철이 다급히 외쳤다.
“이제는 정말 결정해야 한다! 당장 내일 제작을 시작해도 빠듯해!”
깃발 문양은 넓게는 왕국, 그리고 가문과 영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그만큼 함축적인 의미를 품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뜻을 연상케 해야 했다.
과연 영지 노스플롬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동안 고민한 수뇌부는 각자 생각한 의견을 되는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역시 늑대 아닌가?”
“장미는 어때요? 고풍스럽잖아요.”
“······헤헤, 토끼도 좋아요.”
성향이 짙게 드러나는 의견들이다.
하지만 하나 같이 우리 영지와는 어울리지 않았고 함축된 의미 또한 약했다.
적어도 재건 될 북방을 상징하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시끄럽게 의견을 나누는 수뇌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강철 아저씨.”
“음?”
탁자 위에는 붉은 강철이 예시로 가져온 문양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무의식적으로 뽑은 눈투성이가 붉은 강철을 향해 물었다.
“이건 뭐예요?”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눈투성이가 들어 올린 천에는 부러진 검을 감싸는 불꽃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 깃발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던 붉은 강철은 아련한 얼굴로 대답했다.
“부러지는 검이 쓰던 깃발이다. 어쩌다 보니 거기 섞인 모양이구나.”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려 넣었던 부러진 검이 패배를 상징한다며 큰 질타를 받았던 철없는 젊은 시절이 말이다.
하지만 기사왕은 그런 깃발을 쓰지 못하게 하는 대신 부러진 검 주변으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그려주었다.
‘자, 이제 되었구나.’
치열했던 파괴와 숭고한 재탄생.
쓰임을 다해 부러진 검일지라도 뜨거운 불꽃만 있다면 다시 이을 수 있다.
겨우 붓질 한 번으로 논란을 잠재운 기사왕은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갈 나를 향해 자긍심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저는 이게 좋아요.”
하지만 그때가 끝일 줄 알았던 기억은 시간이 지난 오늘 계승되려 했다.
마치 운명처럼 그 깃발을 골라낸 바로 왕의 후계 눈투성이로부터 말이다.
당황한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잠깐, 그건.”
“할래요, 이걸로 해요.”
평소 모든 의견을 경청하고 조율하는 것을 잘 해왔던 눈투성이다.
하지만 가끔가다 자신이 꽂히는 것에는 절대 양보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 지금 저 얼굴.
고집이 지배하다가 못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저 심통 난 얼굴은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난리를 쳐봐도 절대 바꿀 수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도 모두가 납득해야 하는 문제다. 혹시 이유가 있다면 듣고 싶구나.”
오늘 정하게 될 깃발은 단순한 개인이나 가문의 상징이 아닌 수많은 군대와 영지에 꽂히게 될 중요한 깃발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선정했다가는 기껏 제작한 깃발의 상징성이 떨어질 수 있었다.
독단이 아니라면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이해할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한순간 수뇌부들의 시선이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눈투성이를 향했다.
“······저는 보았어요. 검뿐만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이 부러진 것을요.”
눈투성이는 괴로워했었다.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과 몰려오는 끔찍한 허기보다, 희망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며 괴로워했다.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은 무기가 없는 전사나 마찬가지이며 이상이 없다는 것은 촉이 없는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오로지 살기 위해 눈을 뜬 인간으로 태어나, 그 본분을 할 수 없다는 것.
눈투성이 눈에는 모든 인간이 부러진 세상 속 부러진 마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 마음을 다시 잇고 싶어요. 불꽃만 있으면 다시 태어나는 검처럼.”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눈투성이의 대답이 허무맹랑해서가 아닌 그 어떤 이유보다 뜻깊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구나.”
“······기특하다, 기특해.”
눈을 감으며 동의하는 회색 늑대와 흐뭇하게 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붉은 강철.
부쩍 늘어난 키와 검술처럼 아이는 점점 훌륭한 왕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부러지는 검.”
“응?”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수뇌부들은 각자 맡은 일을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회색 늑대는 병영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그는 무언가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요즘 눈투성이가 나만 보면 토끼를 찾는 것 같다. 왜 그러는 거지? 우연인가?”
“············.”
“토끼 고기가 먹고 싶나? 애들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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