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기사왕 43화
영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한 번도 개발되지 않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북방인 특유의 근면 성실함이 만나 폭발적인 생산력을 뽑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건물들을 감당하지 못해 벌써 2번이나 위치를 옮긴 목책.
걱정이었던 거주지 문제는 여름이 넘어가기 전 완전히 해소되었고 마을 밖 농경지 또한 예정된 넓이만큼 개간이 되었다.
하지만 원래 사람이라는 것이 10명이 모이면 문제가 생기고 100명이 모이면 꼭 범죄가 일어나는 법이다.
성장이 궤도에 올라 슬슬 안정화가 되어가자 그런 현상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고,
암암리에 도박과 매춘은 물론 범죄 조직까지 생겨 치안을 어지럽혔다.
이런 걸 마을이 도시로 넘어가기 위한 성장통이라고 해야 할까, 걱정하는 수뇌부들과는 달리 나는 여유롭게 대처했다.
‘다지시면 됩니다.’
‘아하!’
내 조언을 들은 순찰 대장은 경비병 정원에게 떡갈나무 몽둥이를 보급했다.
그리고 경범죄자들을 잡는 족족 다져서 군대에 입대시키고 중범죄자들은 피떡으로 만들어 채석장으로 보내거나 목을 매달았다.
하지만 이런 주먹구구식 대처와 처벌은 곧 한계와 부작용을 불러올 게 뻔했다.
나는 왕국 시절 지식인들이 집필한 법을 카피해 법전으로 만들었고,
눈투성이가 영주의 정당한 권리인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누구보다 공명정대한 영주의 판결에 반대를 표하는 이는 없었다.
만약 있다면 내 손에 죽었으니까.
그렇게 큼직큼직한 문제가 하나씩 해결되고 나니 영지는 이제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왕국 멸망 이후 처음으로 북방에 제대로 된 인간 영지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영지가 유지되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필요했다.
바로, 영지를 지킬 군사.
멀게만 느껴졌던 북방군의 재건이다.
‘지원자 모집.’
구색을 갖춘 병영 앞에는 신병을 모집한다는 문구가 다다닥 붙었다.
그러자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을 두드렸고,
화전민들 사이에 숨어 살던 퇴역병 몇몇도 살며시 정체를 드러내며 합류했다.
의욕 넘치는 햇병아리들을 밝은 얼굴로 맞아준 회색 늑대와 허스칼들.
신병들은 피땀 눈물과 군기를 맞바꾸며 빠른 속도로 성장해나갔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갈 시기, 신병들을 포함한 기존 병사들은 각자 특기와 의지에 맞는 병종으로 재편성이 되었다.
가장 먼저 북방군의 정통 보병 병과인 떡갈나무 방진과 허스칼은 선두 지휘 능력이 가장 뛰어난 회색 늑대.
두 번째로 그간 없었던 궁수부대는 사냥꾼 출신들을 모아 신설해, 우리 중 원거리 병과 이해도가 가장 높은 푸른 손.
마지막으로 정말 예상치도 못한 기회로 얻게 된 흰 뿔 사슴 기병대는 기사단 경험이 있는 내가 맡게 되었다.
비록 과거 유명했던 궁수부대는 특성상 다시 만들지는 못했지만, 이제 병과라는 것을 보유하게 된 영지 노스플롬.
병사 확충만 주기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지금보다 배는 많은 부대를 창설해 전장을 지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치열했던 봄과 여름이 지나고 내내 식탁 위에 올라왔던 호밀빵이 땀을 먹고 자란 귀리 죽으로 바뀌었다.
길고 길었던 계절이 지나고 북방에도 때 이른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챙!
“늦다!”
내가 공격을 가뿐하게 막아내자 호승심이 생긴 눈투성이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검에 속도가 서서히 더해지며 마치 섬광 같은 검격이 이어졌다.
챙! 채앵!
잔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휘두르는 검에 힘이 실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빠른 몸놀림으로 빈틈을 메꾸며 무게중심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눈투성이.
무릇 수많은 검사가 추구하려 했던 검형이 아이의 손에서 재현되었다.
깡!
이번에는 약하게 흘리는 것이 아닌 검날을 강하게 맞부딪혀 보았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본능적으로 힘을 빼 두둥실 떠올랐고 손과 몸에 오는 무게를 고스란히 바깥으로 내보냈다.
탁!
마치 다람쥐처럼 공중제비를 돈 눈투성이가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멈춘 바람은 암묵적인 대련의 끝.
나는 검을 천천히 집어넣으며 말했다.
“훌륭하다.”
“헤헤...”
아낌없이 칭찬을 건네자 엄숙하던 눈투성이의 얼굴이 웃음으로 풀어진다.
아무리 높은 경지를 엿보고 성취해도 잘했다는 이 한마디는 여전히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기분 좋아지라고 한 빈말이 아니다.
눈투성이는 내가 정해놓은 기준을 아득히 넘어, 이제는 성장했다는 말이 입 아플 정도로 검술을 익히고 있었다.
눈투성이가 내게 물었다.
“동작이 조금 과하지 않나요?”
“아니, 나쁘지 않다. 중간중간 허수를 섞으면 반격을 가할 이는 드물 거다.”
눈투성이는 필연적으로 체구가 상대적으로 큰 자와 싸우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완력과 리치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 점을 보완해주는 방법이 바로 무게중심 이동과 빠른 다리다.
누가 가르쳐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검을 잡은 초기부터 실전을 겪은 눈투성이는 검에 무게를 주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었다.
여기서 만약 오러까지 다루게 된다면······.
이 세상 모든 검사는 여태 상대해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적을 맛보게 될 것이다.
뿌듯함을 느낀 나는 물었다.
“느껴지는 건?”
“손끝이 간질간질해요.”
“곧 무명을 받겠구나.”
눈투성이는 오러를 느끼는 감응 단계다.
하지만 요즘 따라 본인도 모르게 오러를 의식하는 것을 보니 형상화할 수 있는 응집 단계가 멀지 않은 것 같았다.
눈투성이가 되물었다.
“무명은 정확히 뭘 의미하나요?”
“무인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이름이다. 오러가 알려주는 운명인 거지.”
오러 사용자가 오러를 발현하게 되면 무기 위에 반드시 문장이 새겨진다.
그 문장이 왜, 어째서 새겨지는지는 수백 년 동안 풀리지 않은 의문이었지만, 분명한 건 인위적인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오러가 새겨준 문장은 오직 소수의 대장장이만이 ‘느낄 수 있는’ 초월 언어.
기사왕은 그것이 오러 사용자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운명이라 말했다.
모든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눈투성이는 무언가 생각난 듯 내게 물었다.
“······제 무명은 누가 읽어주나요?”
소수 대장장이와 연이 닿지 못한 오러 사용자 대부분은 자신의 무명을 모른다.
여태 만나온 야만인들이 그랬고 오러 사용자인 오크 서전트들이 그랬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경지와 상관없이 무명을 읽어 줄 전설이 존재했다.
“붉은 강철이 있다.”
“아······!”
요즘 동네 흔한 주정뱅이 같은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그렇지, 대륙 몇 없는 무명을 읽을 줄 아는 대장장이다.
수많은 영웅과 기사들이 붉은 강철 덕에 자기 운명을 깨우쳤고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물론 그 위대한 기사왕마저도 말이다.
“늑대 아저씨도 받았겠네요?”
“음, 녀석은 본명과 무명이 같다. 원래 이름이 있었는데 개명했지.”
“엥, 진짜요? 왜요?”
“본명이 토끼 꼬리였거든.”
빵 터진 눈투성이가 꺄하하 웃었다.
녀석이 절대 말하고 다니지 말라 했는데 눈투성이 웃음값으로는 아깝지 않았다.
도란도란 재밌게 떠든 우리는 그렇게 파도처럼 흔들리는 귀리밭을 지났다.
* * *
한 농부가 거대한 쓸게 낫을 휘두르면 다른 농부는 베어진 귀리를 모아 묶는다.
물론 묶어놓은 귀리 더미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맞도록 내려놔야 한다.
한철 머금고 있던 물기를 뱉어 건조 시켜야 낱알도 잘 떨어지고 꺼끌꺼끌한 껍질을 벗겨내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오크와 귀쟁이 놈들이 한낱 가축 사료라고 비웃는 거칠고 흔한 귀리.
하지만 우리 북방 인간에게 있어 이 귀리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주는 고마운 친구이자, 소중한 양식이었다.
잘 익은 귀리를 전부 수확한 농부들은 밝은 미소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 돌림 노래는 풍족한 수확을 허락해주신 어머니 북방을 위한 찬가였다.
그렇게 소소한 수확제를 끝낸 영지는 조금 들뜬 마음으로 저녁을 맞이했다.
“수확이 전부 끝났습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촌장이 가을 수확이 전무 마무리되었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원형 탁자에 모인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어 상석에 앉은 눈투성이와 그 밑에 나를 바라보았다.
대풍작이다.
이 근방 지력이 잘 보존되어서 그런지 턱없이 모자란 비료량에도 불구하고 이번 한해 농사는 대부분 풍작이었다.
덕분에 주민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은 물론 상당한 식량들을 저장해둘 수가 있었다.
풍족한 식량, 잘 훈련된 군대, 그 뒤를 충분히 받쳐줄 충분한 인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 자리에 모인 수뇌부라면 이미 눈치채고 있을 거다.
‘오크 놈들.’
아무리 북방 오지라고 해도 이 정도 규모를 가진 영지는 금방 입소문이 난다.
영지는 앞으로 더욱 발전한 것인데, 오크 숙영지가 그걸 못 알아챌 리 없지 않은가.
우리 존재가 탄로 나는 건 결국 막을 수 없는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제 살을 깎아 먹는 수성전을 벌일 수도, 내정 발전만을 꾀하며 웅크릴 수도 없는 상황.
영지 존속을 위해서는 더 많은 북방인을 해방해 덩치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
회색 늑대가 화두를 열었다.
“······오크 놈들은 겨울을 싫어하지. 갑옷이 차갑게 얼어 살이 눌어붙거든.”
따뜻한 중부 대륙에서 살아온 오크 놈들은 추위에 무척이나 약하다.
하지만 반대로 추위가 곧 집인 북방인에게 있어 겨울 전투는 익숙했다.
초겨울이 오면 매번 그랬듯 숙영지를 해체하고 남쪽 경계로 후퇴할 오크들.
놈들이 가장 취약할 시기인 그때를 노려 뒤를 치면 지배의 상징인 숙영지 함락은 결코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이런 날씨만을 고려해 전쟁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계절도 계절이지만 시기가 정말로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푸른 손을 향해 물었다.
“내전 상황은 어떻지?”
“작년보다 더 치열합니다. 듣자 하니, 2번째 황자가 제 친누이를 죽였다더군요.”
현재 오크 제국은 황제 오그르의 후계 문제로 인해 치열한 내전이 진행 중이다.
작년 말 휴전이 되나 싶더니, 2번째 황자의 변심으로 인해 또 한 번 명예롭지 못한 암투가 오고 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의 위기는 우리의 기회.
내전 중 가장 골치 아프고 치열하다는 후계 전쟁이 벌어지는 중인데, 과연 이 북방으로 군대를 보낼 놈들이 있겠는가.
아니, 설사 있다 하더라도 겨우내 본토에서 지원이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오크 숙영지들은 그대로 고립될 것이다.
“승산이 얼마나 됩니까?”
“놈들이 뭉치지만 않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이깁니다.”
숙영지는 각 노예 마을을 관리하기 위해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있다.
말 그대로 서로 협력하지만 못하게 막는다면 각개격파가 가능하다는 소리다.
숙영지들을 파괴해 보급품을 얻고 노예 마을에서 해방된 북방 인들을 끌어안는 전략.
투쟁과 동시에 확장을 꾀한다면 차후 전면전도 무리는 아니었다.
작년은 일렀고 내년은 너무 늦는다.
우리는 비장한 얼굴로 눈을 마주치며 이것이 올해 유일한 기회임을 직감했다.
때는 다가오는 겨울이 최적의 시기.
회의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눈투성이가 마치 흑요석 같은 눈을 반짝이며 선포했다.
“······전쟁을 준비하세요. 첫눈이 오는 날 남쪽으로 진군하겠습니다.”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채 20명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천막들이 이런 커다란 영지가 되고 한낱 노예였던 아이가 인간을 이끄는 영웅이 될 줄은.
그날 모녀를 지키기 위해 낡은 검을 붙잡았던 눈투성이는 불씨가 되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환하게 타오를 희망의 불꽃을 위한 불씨가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재 한 점 남기지 않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뿐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군부를 포함한 수뇌부는 전부 일어났다.
그리고 영주 눈투성이가 내린 엄숙한 전쟁 선포에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콩콩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올리는 눈투성이.
우리는 벅찬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운명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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