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기사왕-42화 (42/181)

검은머리 기사왕 42화

“하나, 둘, 셋!”

“으라차!”

나와 주민들은 힘을 합쳐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수레를 힘껏 밀었다.

그러자 헛돌던 바퀴가 이제야 움직이며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앓던 이가 시원하게 빠지기라도 한 듯 환호성을 내지르는 주민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작은 기쁨을 나누며 손과 옷에 묻은 흙은 탁탁 털어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눈이 녹은 흙길에 수시로 바퀴가 빠져 짜증이 날 법도 한 상황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며 열심히 수레를 밀고 또 밀었다.

역시 강인한 북방인들답지 않은가.

나는 그들이 건네는 감사 인사에 기분 좋은 손사래를 치며 다시 대열 선두를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한시도 쉴 틈이 없다.

고개를 돌리자 산 아래 풍경으로 끝없이 이어진 이주 행렬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자, 자! 조금만 더 힘냅시다!”

“얼마 안 남았어요!”

이주 행렬과 함께 마을을 떠난 지 벌써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올 때랑은 차원이 다른 인원 탓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기는 했지만, 별 피해 없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다.

방금 넘은 것으로 이제 마지막 산.

능선 아래만 무사히 가로지른다면 우리가 건설한 마을 영향권 아래 들어온다.

처음 말해두었던 기간보다 한두 달 빠른 복귀인데 놀라지는 않을까 싶다.

나는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익숙한 지형을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나와 마찬가지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던 회색 늑대가 말을 걸어왔다.

“농사짓기 딱 좋은 지형이군.”

“터가 괜찮은 곳이지.”

산이 대부분이었던 늑대 마을과는 다르게 우리가 터를 잡은 이 지형은 산과 숲 그리고 평야가 적절하게 배치된 곳이다.

덕분에 풍부한 자연 자원과 더불어 냉대 기후에서 잘 자라는 농작물들에 대한 수확량도 충분히 기대되었다.

식량 생산량은 곧 인구의 증가.

필연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우리는 이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고려해야 했다.

그래도 회색 늑대의 표정을 보아하니 생각보다 괜찮은 지형에 만족한 모양이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계획을 장황하게 설명해주고자 입을 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수 다수 출현! 이쪽으로 향해 빠르게 접근하는 중입니다!”

스릉!

하지만 그 순간 주변을 정찰하고 있던 척후병이 다급히 달려와, 멀지 않은 곳에 기수 다수가 출현했음을 알려왔다.

나와 회색 늑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뽑으며 달렸고 대기 중인 허스칼들 또한 무기를 챙겨 우리 뒤를 따라왔다.

갑작스러운 기수 출현이라니.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세력이 근방에 자리 잡기라도 했던가.

나는 심각한 얼굴로 회색 늑대 뒤를 따라가며 저 멀리 펼쳐진 평야를 바라보았다.

척후병 말대로 드넓은 평야에는 10명 남짓 되는 기수들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음?”

하지만 이상했다.

미지의 적이라 예상했던 기수들은 말이 아닌 커다란 흰 뿔 사슴을 타고 있었다.

나는 하하 웃으며 회색 늑대를 안심시켰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다.”

“······흰 뿔 사슴도 길들였었나?”

“아니, 아마 아닐 거다.”

다른 지역 흰 뿔 사슴과는 다르게 여기 흰 뿔 사슴들은 남다른 구석이 있다.

아마 인간들이 생각하는 ‘길들였다.’라는 의미는 이들에게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난 아직도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인 녀석들의 우두머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겨우 기수 열 명뿐인데 위용이 남다르다.

빠르게 우리 앞으로 달려온 기수 중 얼굴이 익숙한 자가 안장에서 내리며 환히 웃었다.

“경! 정말 경이 맞으시는군요! 오크라도 오는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마을은 별일 없습니까?”

“예!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습니다!”

미리 연통을 넣은 수단이 없어 마을 측에서도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자가 있어 오해는 쉽게 풀렸다.

이제 도착했다는 게 실감이 된다.

나는 환하게 웃는 기수를 향해 길 안내를 부탁하며 흰 뿔 사슴위에 같이 올라탔다.

“대단하군. 이렇게 큰 흰 뿔 사슴들은 처음 봐. 이렇게 고삐를 걸어두면······, 윽?”

푸르륵!

길들인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앙칼진 흰 뿔 사슴을 만지려 하던 회색 늑대는 그대로 뿔에 치였다.

* * *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이주 온 주민들이 바삐 걸어오는 사이 나는 사슴을 타고 먼저 마을로 향했다.

깜짝 놀랐을 붉은 강철과 촌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평야를 빠르게 가로지르자, 저 멀리 목책이 사방을 막은 커다란 마을이 보였다.

분명 떠나온 지 채 석 달도 되지 않았을 텐데 발전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바삐 사슴을 모는 기수에게 물었다.

“중축이 엄청 빠르군요.”

“아, 예! 마을 인원이 많이 늘었습니다.”

인구의 증가는 노동력 향상을 의미한다.

소문을 듣고 몰려든 화전민들을 마을 건설을 위해 투입한 모양이다.

그 수준은 내가 준수하다고 생각했던 늑대 마을과 비견될 정도?

평소 높은 성벽과 방어를 울부짖던 붉은 강철다운 가파른 성장 속도였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마을 목책이 가까워졌다.

그러자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튼튼한 정문과 함께 이미 마중을 나온 사람 여럿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얼굴인 붉은 강철과 촌장.

나는 투레질 하는 사슴 위에서 경쾌하게 뛰어내려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빠르게 멱살을 잡혔다.

“이, 이 미친놈아!”

뒤이어 걸어오는 수많은 이주 행렬을 목격한 붉은 강철이 내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영혼이 빠져나갈 것만 같은 얼굴로 멱을 짤짤 흔들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반응이기는 하다.

가뜩이나 몰려오는 화전민조차 감당 못 하고 있는데 내가 예고도 없이 대규모 이주민을 데리고 와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촌장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계속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흰 뿔 사슴을 타고 마을로 달려온 손님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오랜만이다, 붉은 강철.”

“······회색 늑대?”

내가 이 둘과 긴 인연이 있듯이 둘 또한 서로를 향한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다.

당최 저 거대한 대검을 한땀 한땀 두드려 만든 것도 이 붉은 강철이었으니까.

회색 늑대와 오랜만에 재회한 붉은 강철을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내게 물었다.

“이해할 수 없는 조합이군. 부러지는 검, 설마 네가 여기로 데려온 거냐?”

조력자 역할로 긴 세월을 함께한 붉은 강철은 나와 회색 늑대 사이에 은연중 남아있는 서먹함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와 회색 늑대가 이런 친근한 모습으로 같이 와버리니 인지 부조화가 올 법도 했다.

뭐라고 설명을 해주어야 할까.

늑대 마을에서 겪었던 온갖 사건이 떠오른 나는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허나 회색 늑대는 입 아프게 말해봐야 뭐 하겠냐는 듯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함께 하기로 했다.”

그래, 간단명료한 말이 맞았다.

오해라는 것이 굳어 생긴 밀랍을 털어내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막연하기만 했던 세월을 넘어 마지막 길만큼은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그게 무슨······, 아.”

붉은 강철은 순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와 회색 늑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꾹 입을 다문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맥없이 웃고 말았다.

“······젠장, 더럽게 바빠지겠구먼. 요즘 안사람이 슬슬 눈치를 준다고.”

“붉은 강철이 결혼했다고?”

“왜! 뭐!”

이렇게 셋이 모인 것도 참 오랜만이다.

우리는 한동안 정문 앞에서 두런두런 떠들며 옛 시절을 조용히 곰 씹었다.

못다 한 이야기가 아직 많다.

오늘은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았다.

* * *

한참 진행되던 유입과 대규모 이주로 인해 마을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단순히 사람 머릿수만 보고 따졌을 때 1년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목표치를 채우고도 남았다.

이제 더 이상 마을을 마을이라 부르지 못하는 지경까지 와버린 것이다.

아마 모든 주민을 수용할 수 있는 거주지와 각종 필수시설이 포함된 인프라, 그리고 석재로 만든 성벽만 쌓을 수가 있다면 충분히 소도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런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던 북방 왕국의 재건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을 마냥 낙관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준비되지 않은 인구 증가는 반드시 부작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일단 거주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오죽하면 오늘 늑대 마을에선 온 이주민들을 안전한 마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천막촌을 차리게 하였겠는가.

이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정형화된다면 자연스레 판자촌이 형성될 것이고 치안 악화와 노동력 이탈을 불러올 것이다.

그 외에도 군대 편성, 인력 배치, 식량 배급, 세금 징수, 농경지 파종 등 신경을 써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만큼 영지 경영은 모든 게 유기적으로 엮인 복잡하고 심오한 일이었으며,

조금만 삐끗해도 왕국의 기반이 될 영지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필요성을 느꼈다.

여태 잘게 쪼개 나눠주기만 했던 행정 일을 왕의 후계인 눈투성이와 수뇌부들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쳐줘야겠다는 것을 말이다.

‘스, 스승님 머리가 팽팽 돌아요.’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요직에 앉아있는 자라면 강제적으로 교육에 참여하게 했다.

물론 행정 일과 거리가 먼 일부 이들은 거부감을 표했지만, 이게 다 현장에서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중요한 실무다.

나는 이번만큼은 엄숙하게 그들을 대하며 유능한 관리이자 왕의 신하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그렇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한 건물에 모여 행정 일을 배우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딱 한 달째 되는 날, 나는 수뇌부 인원에게 정식적으로 직위를 임명했다.

영지와 관련된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행정관은 여태 잘 일해준 촌장.

인구수가 급증한 마을 치안을 지켜줄 영지 치안관은 경험 많은 순찰 대장.

북방에선 무척이나 귀한 광물과 재화를 관리해 줄 재무관은 붉은 강철.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군권은 푸른 손과 회색 늑대 그리고 내가 나눠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임명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자리와 사람이 남았다.

바로 북방 부흥의 상징이 될 인간 영지 ‘노스플롬’의 영주 눈투성이다.

왕이기 전에 기사였던 기사왕.

이것은 영지가 발전을 시작하기 전 이건 반드시 해야 하는 정통성의 절차다.

나는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눈투성이를 향해 엄숙히 물었다.

‘너는 누구냐.’

‘위대한 기사왕의 후계.’

‘나는 그런 자를 모른다. 너는 누구냐.’

‘명예로운 검성, 부러지는 검의 제자.’

‘나는 그런 아이를 모른다. 너는 누구냐.’

‘눈투성이, 한낱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검을 받으라.’

8년 동안 홀로 들고 다녀야 했던 기사왕의 검을 드디어 뽑았다.

그리고 마치 왕관을 씌우듯 눈투성이가 들어 올린 손 위로 검을 내려놓는다.

마치 제 주인을 다시 만나 기쁘다는 듯 파르르 공명하는 왕의 검.

나는 떨리는 눈가를 감으며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엄숙히 선포했다.

‘왕에게 받은 지엄한 권한으로 말하노니, 오늘 또 한 명의 기사가 태어났다. 이 땅 위에 서임을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당장, 이 앞으로 나와 검을 뽑으라.’

앞으로 나오는 이는 없었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새로운 기사의 탄생을 축복했다.

43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