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기사왕 41화
그 어느때보다 치열했던 전쟁이 봄비가 오기 시작한 시기 끝이 났다.
봄이 찾아온 따뜻한 북방 오지에는 철이 지났던 새들이 찾아왔고 겨우내 추위와 싸우던 꽃들또한 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천천히 봄을 반기는 북방과는 달리 늑대 마을은 바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이 주고 간 여파는 단기간에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큰 상처를 남겼던 탓이다.
일단 마을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던 병사와 허스칼 전사 반절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수성전 막바지에 벌어진 후방 침투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물론 적의 규모와 사상자를 생각하자면 정말 기적적인 교환비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계상 수치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열린 합동 장례식과 슬픔으로 이들을 보내는 사람들.
이런 경험을 불과 몇 달 전에 겪었던 나는 엄숙한 마음으로 그들의 죽음을 기렸다.
만약 저들이 창을 들지 않았더라면 또 다른 인간 영지는 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늘 가까운 곳에 있듯,
삶 또한 북방에는 중요한 가치였다.
어머니 북방 곁으로 죽은 이들을 보내준 사람들은 또 다른 삶을 시작하려 했다.
바로 이주의 시작이었다.
‘많은 곳이 불타 사라졌다.’
온갖 천혜 자연이 가득한 이 북방 오지에서 목재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원 중 하나였다.
그 덕에 대부분 구조물은 항상 목재가 사용되었는데 문제는 이번 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불에 타 사라져버렸다.
거기다 화재로 상당수 소실된 공동 식량, 공성전으로 심한 손상을 입은 목책, 살아남아 숙영지로 도망친 오크들.
살아남기 위한 이주는 필연적이었으며 주민들 또한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우리와 함께하기로 한 회색 늑대의 의중은 당연히 찬성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이주 목적지가 바로 우리 마을이라는 것이다.
‘미친 새끼!’
나를 욕하는 붉은 강철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쟁을 계획 중인 우리에게 있어 이 정도 수준의 군대와 이주민들을 받는 건 다시는 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한동안 몰려올 업무를 감수해서라도 이들을 포용하고 한 가족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계획을 빠르게 수정했다.
“경!”
“음?”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서둘러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그러자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상석에 앉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회의 중이었지.
희색 늑대가 스스로 근신하는 바람에 졸지에 책임자 자리에 앉고 말았다.
순찰 대장도 있고 푸른 손도 있는데 하필 나를 지목하고 도망치다니.
어디선가 유유자적 돌아다니고 있을 회색 늑대를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하지만 일은 일이다.
나는 헛기침과 함께 되물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습니까?”
“산맥을 넘어가는 문제입니다. 수레가 지나가야 하는데, 마땅한 길이 없습니다.”
“수레가 건널 수 있는 길은 제가 압니다. 예정된 수량으로 제작하라고 하세요.”
이 지역만 수십 번 방문한 나다.
수레가 지나갈 길 정도는 눈감고는 찾을 수 있으니, 예정대로 수레를 제작하라 했다.
그러자 자리에 모인 수뇌부들은 또 쑥덕쑥덕 떠들며 사안을 검토했다.
말이 좋아 이주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수많은 주민을 데리고 가야 하는 만큼 모든 것은 검토하고 반영해야 했다.
하지만 유능한 이들이 많은 마을인 만큼 그 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회의가 슬슬 마무리되어감을 느낀 나는 드디어 이주 날짜를 결정했다.
“출발은 보름 뒤로 합시다.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알겠습니다, 경!”
험난한 길이긴 하지만, 강인한 북방인들인 만큼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회의실에 모인 이들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 빠른 속도로 복도를 뛰어온 병사 하나가 다급히 회의실 문을 열었다.
덜컹!
“허억, 헉! 회, 회의 중 죄송합니다! 그분이 일어나셨다고 해서 급히······!”
그분이 일어났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분이 누군지 알았다.
그날 이후로 벌써 5일째 잠이 든 소녀.
마을 사람들이 진심으로 기도하던 눈투성이가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났다.
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기쁨을 함께했다.
* * *
“후우·········.”
간호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눈투성이는 몰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을과 산맥이 내려다보이는 지붕 위로 올라가 익숙한 명상 자세를 취했다.
마을 곳곳에선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투성이는 불어오는 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봄의 향기를 조용히 내뱉었다.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혼탁하게 끼어있던 안개가 사라지며 깨끗한 호수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일까.
분명 몸과 손은 그대로인데 의식은 한층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에 눈투성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승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몰래 빠져나와 지붕 위로 올라온 자신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스승만큼은 이런 기행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먼발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잔잔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승.
눈투성이는 느낀 바를 솔직히 말했다.
“제 몸이 이상해요.”
“겁먹지 마라.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러라고 부른다.”
오러의 경지는 총 4가지로 나뉜다.
오러를 느끼는 단계인 감응,
오러를 모아 형태로 만들어내는 응집.
오러를 뽑아 날처럼 갈아내는 발현.
오러를 제 뜻대로 움직이는 완성.
오러 수련을 시작한 지 채 보름도 되지 않은 눈투성이는 그 첫 단계에 들어섰다.
회색 늑대조차 반년이 걸렸다는 그 시작을 아이는 고고한 학처럼 뛰어넘은 것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그 경지에 기뻐하기는커녕 저 광활한 창공을 날기 위해 태어난 새처럼 자유롭게 웃고 있었다.
정해진 건 없다, 끝없이 성취해라.
이제 막 왕의 길을 걷기 시작한 눈투성이는 저 멀리, 저 멀리······, 내가 보지 못하는 세상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벅찬 가슴을 숨길 수가 없었다.
훗날 위대한 기사왕이 될 눈투성이가,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북방 위 새로운 세상이 너무나 기대되었다.
또 한 번 고난이 지나 봄이다.
나아가야 할 길은 여전히 많았고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은 하늘 아래 가득하다.
나는 눈투성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네!”
* * *
사박, 사박, 사박.
북방 오지를 하얗게 덮었던 눈은 어느새 녹아내려 풀과 꽃들의 양식이 되었다.
항상 동토일 것 같은 북방에도 이런 태동의 시기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 끝없이 이어진 청 녹림을 뛰어노는 수많은 동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귀환을 알리는 아름다운 철새들.
나는 그 모든 경관을 두 눈에 담으며 높이 솟아오른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러자 기어코 도착한 산 정상에는 맥이 내려다보이는 절경과 늑대가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줄 알더군.”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을 이후 사라진 회색 늑대 때문에 사람들은 은연중 자신들의 영주가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책임지고 마을을 맡겼던 행정관의 어리석은 행동과 수제자 보리 이삭의 배신은 주민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수뇌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지 말 것을 당부했다.
회색 늑대에게는 그저 마음을 정리하고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 - - - - - - -.”
회색 늑대 앞에는 비석이 있었다.
그것은 검으로 힘껏 내리쳐 만든 투박하고도 못생긴 인간의 묘비였다.
비록 제 손으로 베어야 했던 추악한 배신자였지만, 회색 늑대는 혹독한 산 정상 위 녀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놓은 모양이다.
그 죄는 자신이 대신 받고,
이 높은 산 정상에서 영원한 척박함으로 속죄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회색 늑대는 내게 물었다.
“어떤 심정이었나? 네가 직접 가르친 후보들을 보내야 했을 때.”
“슬펐지, 후회했고.”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
눈을 잠시 감은 지금도 후보들과 함께했던 기억과 추억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그 끝은 하나같이 가슴을 찢었으며 치열했던 과거를 후회하게 했다.
누군가는 포기를,
누군가는 죽음을,
누군가는 배신을,
한가지 대의를 위해 만났던 그들은 열 가지 비극을 이유로 헤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체를 땅에 묻으며 사무치는 감정을 스스로 무뎌야 했다.
그것은 슬픈 일이었다.
“슬프구나.”
내 솔직한 대답에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회색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거대한 바위산 같았던 그는 슬프다는 감정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듯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마라.”
하지만 회색 늑대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기사도를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았듯, 북방과 수많은 인간은 여전히 희망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날 봄이 온 것처럼 털어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왕의 탄생을 기다리는 저들에게 남은 삶을 전념해야 한다.
새로운 왕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우리의 눈투성이를 위해서.
“가자, 회색 늑대.”
평화롭던 정착 생활과 보리 이삭이라는 제자는 아픔만을 남긴 채 떠나갔다.
허망한 세월을 먹어가던 이 산맥도 이제 기억 뒤 저편으로 사라질 시간이다.
그는 섞이지 않는 회색이다.
하지만 무리를 지켜야 할 때, 그 회색은 비로소 늑대가 되고는 했다.
“그래.”
이제 모든 걸 털어낸 회색 늑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 바람이 분다.
드넓은 산맥 아래 시야에는 동쪽으로 향하는 수많은 이주 행렬이 들어왔다.
회색 늑대의 합류를 마지막으로 주민들은 산맥을 넘을 준비를 끝마친 것이다.
아, 깜빡할뻔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라.”
“음, 선물인가?”
“눈투성이가 밤새 만든 거다.”
회색 늑대는 목책을 지키기 위해 오른쪽 눈을 희생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눈투성이는 진심으로 슬퍼했고 그를 위한 안대를 손수 만들고자 열심히 십자수를 새겼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흰색 안대 위에 펄럭펄럭 날아다니는 나비 문양.
마치 아이가 만든 것처럼 유치하기 그지없었지만, 꼼꼼한 정성이 느껴졌다.
눈투성이가 이걸 만들었다고?
회색 늑대는 진심으로 웃었다.
“어울리나?”
“아니, 별로.”
“하하하하! 너는 못 받았나 보군!”
빌어먹을 놈, 그렇게 좋은가.
나는 솟아오르는 짜증을 애써 숨기며 내리막길을 앞서 걸어갔다.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다.
빨리 이주 행렬과 합류해 앞으로 있을 통일 전쟁을 계획하고 검토할 것이다.
“고맙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듣지 않기로 했다. 늑대도 이제 우리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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