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검은머리 기사왕
허억, 헉.
오른팔이 통째로 잘려나간 오크 서전트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핏빛 땅이 되어버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맹한 모습은 어디 가고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수많은 오크 전사.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겨우 오러 한 번에 목이 잘린 서전트 형제들.
시체가 가득한 목책 앞은 형제들이 흘린 피와 후회가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게 된 오크 서전트는 떨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회색 늑대가 걸어오고 있었다.
“······말해라.”
모든 건 예정대로였다.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서전트 셋이 오크 본대와 함께 목책을 공격하고,
티그르는 배신자가 안내한 배수로를 통해 성공적으로 후방에 침입했다.
가장 취약한 영지 후방이 뚫려버린 상황.
그것은 아무리 뛰어난 군대라 할지라도 이겨낼 수 없는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하지만 이 남자는 그것을 이겨냈다.
후방이 뚫렸다는 소식에 단신으로 뛰어내려 모든 서전트와 정문을 부수려는 선봉 부대를 베어버린 것이다.
살아있는 전신(戰神) 그 자체.
한쪽 눈을 대가로 목책을 방어한 회색 늑대는 서전트를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어떻게 들어왔지?”
하지만 회색 늑대는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갈수록 짙어지는 분노를 뿜어내며 살아남은 서전트를 향해 물었다.
마을 배수로는 골짜기 아래 숨겨져 있어 마을 토박이가 아니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오크 놈들은 마치 마을 구조를 아는 것처럼 그 좁은 입구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도 웬만하면 끊어낼 수 없는 두꺼운 철장과 초병의 눈을 피해서 말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놈들에게 배수로 입구를 알려주고 안내한 자가 마을 내부에 있다. 같은 가족과 형제를 팔아먹은 더럽고 추악한 배신자가!
“말, 말하면 살려줄 건가?”
전쟁에선 어차피 패배했다.
하지만 숲으로 도망친 오크 전사들은 아직 건재했고 위대한 티그르님 또한 후방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을 것이다.
살수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른팔을 잃은 오크 서전트는 명예와 자존심을 버려가면서까지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자 회색 늑대는 무심히 허락했다.
“말해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놈은 반색했다.
그리고 혹여나 목이 날아가기라도 할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을 배수로 위치를 알려주고 안내까지 한 행정관의 정체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내부자의 존재.
모든 불운과 실수가 엮여 만들어진 운명이 이제야 그 진상을 드러냈다.
모든 세상이 숨을 죽였다.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토독, 톡.
그 모든 진실을 전해 들은 회색 늑대는 마치 핏물 같은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생을 한탄했다.
“·········부질없었구나.”
회색 늑대는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오크 서전트를 향해 다가가 목 옆으로 무심히 검을 겨누었다.
스릉-!
“잠깐! 약속과 다르다!”
“추하다, 죽은 족장을 따라가라.”
“뭐? 티그르님은 분명 후방에······!”
“이미 검성이 갔다.”
검성이 후방으로 갔다.
그 한마디 말은 후방에서 싸우고 있을 티그르의 운명을 결정짓기 충분했다.
결국, 그렇게 되었나.
오크 서전트는 허탈하게 웃었다.
동시에 놈의 목을 가볍게 잘려 진창이 된 시체들 위로 툭 떨어졌다.
서걱!
툭.
토독, 톡.
봄비가 운다.
마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 수많은 생명을 위로하듯 하늘이 울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을까.
허망한 얼굴로 검을 집어넣은 회색 늑대는 쏟아지는 빗물 아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강한 힘과 오러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죽은 이들은 되돌릴 수 없다.
전쟁이 끝이 나자,
지독한 허탈감이 영혼을 갉아먹었다.
이 모든 것이 나로 인한 참상이며 평생을 씻을 수 없는 죄 구나.
“영주님! 영주니이이임!”
“- - - - - - -?”
하지만 그 순간 전쟁의 화마가 막 지나간 목책 위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곳에는 후방에서 급히 달려온 전령이 있었고 그 어린 전령은 눈물을 질질 흘리며 목책 위 모든 이들에게 희소식을 전했다.
“대피소가······! 대피소가 무사하답니다! 주민들 전부 무사하다고요!”
“뭐?!”
“그게 참말이여!”
후방 대피소가 습격당했다는 건 뒤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와 급히 달려온 전령 덕에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화마와 혼란 속에서도 대피소와 주민들 전부가 무사했다니.
가족들을 걱정하던 병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처량히 비를 맞고 있던 목책은 순식간에 희망찬 함성으로 물들었다.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잡았던 창이 끝내 그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눈투성이.”
하지만 모두가 환호하는 상황에서 회색 늑대만큼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따뜻한 훈풍이 불고 온 이름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 * *
쏴아아아아아 - - - - -!!
봄비가 거세다.
날씨도 쌀쌀한 탓에 얼굴을 때리는 빗줄기가 지독하리만큼 무겁고 축축했다.
하지만 나는 온몸을 적시는 빗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를 끌어안았다.
이토록 작고 가벼운 눈투성이 손에는 여전히 부러진 검이 잡혀있었다.
“······도망치지 않았구나.”
목소리가 떨려왔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솟구치는 감정은 세월로 무뎌졌던 가슴을 후벼팠다.
대견하면서도 원망스럽고,
슬프면서도 기뻤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눈투성이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지 않았다.
그 앞이 끔찍한 죽음이라 할지라도.
희미하게 웃은 눈투성이가 작게 속삭였다.
“스승님, 아프지가 않아요······.”
눈투성이 몸은 성한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찾아온 오러 덕분에 목숨을 위협할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저 약속한 하늘이 간절한 부름에 드디어 응해주었던 모양이다.
“······어머니 북방이 잠시 다녀가셨다. 나는 느껴지는구나, 네 용기와 명예가.”
어머니 북방이 잠시 다녀가셨다.
지금은 비록 흩어졌지만, 눈투성이 근처에는 오러의 흔적이 맴돌고 있었다.
그제야 안심한 아이가 내게 말했다.
“저 졸려요······.”
“괜찮다, 모두 괜찮아.”
적과 싸우느라 피를 많이 흘렸다.
나는 억지로 뜨려는 눈을 감겨주며 이제 다 괜찮다는 말을 읊조려주었다.
그러자 가까스로 정신 줄을 부여잡던 눈투성이는 미소와 함께 잠이 들었다.
스윽.
철퍽, 철퍽.
나는 눈투성이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내가 전부 베어버린 적들의 시체를 지나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다.
태생이 고귀하게 태어나 덧없이 지는 자가 위대한가, 아니면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 고귀하게 지는 자가 위대한 건가.
눈투성이!
평범한 이름 아래 왕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왕의 행차를 돕던 그 마음 그대로 품에 안긴 제자와 함께 길을 걸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봄비는 꽃이 되었고 목숨을 걸었던 명예는 왕관이 되었다.
“- - - - - - - -.”
전쟁과 화마가 지나간 길에는 수많은 주민과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왕이 행차할 길을 알기라도 하듯 마치 홍해처럼 양쪽으로 물러났다.
벅차오르는 가슴, 막이 맺히는 눈동자.
사람들은 품에 안긴 ‘작은 왕’ 눈투성이를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가 저들을 지켰는가.
어떤 이가 약자를 외면하지 않았는가.
왕의 적통을 결정하는 건 한낱 핏줄이 아닌 세상을 밝히는 신념이었다.
눈투성이 보아라 봄이 오고 있다.
웅크리고 있던 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세상은 드디어 얼굴을 마주하는구나.
오늘은 새 시대, 새 계절이다.
네가 그토록 바라던 찬미의 날이다.
다각, 다각, 다각!
저 멀리 거세게 내리는 봄비 뒤로 회색 늑대가 뒤늦게 달려왔다.
하지만 그는 영주와 영웅의 지위를 과감히 버리고 주민들 곁에서 멈췄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회색 늑대가 경의를 표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왕이 지나간 길 아래 고개를 조아렸다.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는 군중의 모습.
수많은 이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자, 비는 거짓말처럼 멈췄다.
왕의 귀환, 얼굴 위로 햇살이 드리운다.
치열했던 전쟁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허억, 헉!”
보리 이삭은 미친 듯이 뛰었다.
조금이라도 더 뛰어, 자신이 불타게 만든 마을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그가 저지른 죄는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추악한 원죄처럼!
‘그러려는 게 아니었어!’
행정관 꼬임에 넘어가는 척 배수로 문을 열어 오크 놈들을 끌어들였다.
눈투성이만 죽게 내버려 두고 상황을 수습하려 했던 안일한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상황은 극악으로 치달았고 마을은 화마에 휩싸였다.
아무리 주워 담으려 해도 담을 수 없는 바닥 위 낙수처럼 보리 이삭이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욕심과 질투에 눈이 멀어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죄를 피하고자,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추악한 원죄를 외면하기 위해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 북방은 아무리 가려도 가릴 수 없는 하늘 위에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헉!”
길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깜짝 놀란 보리 이삭은 재빨리 검을 뽑으며 길을 막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부, 부러지는 검.”
다리와 검이 덜덜덜 떨린다.
그나마 휘두르려 했던 용기도 싸늘한 그의 표정 아래 개처럼 꼬리를 말았다.
자신이 올 줄 어떻게 알았지?
설마 마을은 무사한 것일까?
보리 이삭은 주춤주춤 물러나며 변명을 하기 위한 온갖 생각을 품었다.
턱!
하지만 더 물러날 수 없었다.
어느새 나타난 무언가가 녀석이 도망칠 뒷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 스승님······?”
커다란 검, 회색빛 늑대 가죽.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스승이 맞았다.
보리 이삭은 하얗게 변한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결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털썩!
“제, 제가 그런 게 아니라······!”
“왜 그랬나.”
보리 이삭은 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증거와 오크의 증언을 통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온 회색 늑대는 물었다.
왜 그랬나.
하늘 아래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은 우리가 어째서 이런 얼굴로 마주해야 하느냐.
회색 늑대는 지독한 슬픔이 느껴지는 눈동자로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실, 실수였어요. 정말 실수였어요! 행정관 그 악마 같은 놈이 저를 꾀지만 않았어도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
“저 믿으시죠? 보리 이삭이에요! 스승님이 꼭 영웅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던 그 보리 이삭이요! 제발 용서를······!”
제발 용서해달라.
한 번의 실수를 눈감아달라.
보리 이삭은 슬픈 스승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재빨리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회색 늑대는 용서가 아닌 자신의 가슴을 후벼 파는 질문을 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건······!”
“죽음의 무게가 달랐더냐?”
이 오만하고 악독한 놈.
씻지 못할 죄를 끝까지 한 번의 실수고 용서받아야 할 치기라 보는구나.
회색 늑대는 보리 이삭의 눈동자에서 지독하고 더러운 선민의식을 보았다.
그것은 잘생기고 아름다운 금발과는 달리 무척이나 어두운 본성이었다.
스릉-!
회색 늑대는 검을 뽑았다.
그러자 보리 이삭은 경기를 일으키며 콧물과 눈물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수년간 쓰고 있던 가식의 가면이 참벌을 앞둔 오늘 끝내 깨져버리고 말았다.
“달라! 다르다고! 그런 미천한 놈들하고 내가 어떻게 같아! 나는 왕이 될 자야! 수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왕!”
“네놈·········!”
“잘못한 건 너야! 그딴 하찮은 계집한테 오러를 가르친 네 잘못이라고! 나는······! 나는 여기서 끝날 수 없어······!”
챙!
보리 이삭은 기어코 검을 뽑았다.
그러자 회색 늑대의 평정심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눈물을 쏟아지게 했다.
좋은 기사로 키우려 했다.
자신보다 뛰어난 착한 어른으로 성장해 큰 보탬이 되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녀석은 질투와 오만에 잡아먹혀 같은 인간을 팔아먹은 악인이 되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녀석을 거둔 것도, 뒤돌아보지 못한 것도.
“- - - - - - -!!”
보리 이삭은 늑대가 베기를 망설인 틈을 타 전광석화처럼 검을 내찌르려고 했다.
표적은 심장.
제자는 자신을 키워주고 가르쳐주었던 스승에게 망설임 없이 흉수를 던졌다.
서걱!
“컥······!”
하지만 그런 어설픈 공격에 당할 리 없다.
회색 늑대는 슬픈 얼굴로 공격을 피한 뒤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보리 이삭 가슴팍에 붉은색 사선이 생기며 거짓말처럼 피가 새어 나왔다.
“어······, 어?”
보리 이삭은 검을 놓쳤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무릎을 꿇으며 붉게 물든 가슴팍을 매만진다.
내가 베였다고? 스승한테?
마치 꿈만 같던 지난 시절이 주마등처럼 보리 이삭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남은 것은 짙은 후회였다.
“쿨럭!”
보리 이삭은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자신이 흘린 피 위에 털썩 쓰러지며 황금 같던 머리칼을 더럽힌다.
많은 이들을 죽게 한 욕심의 최후.
결국, 남은 것은 상처 입은 이들뿐이었다.
자기 손으로 제자를 죽여야 했던 회색 늑대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4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