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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39화 (39/181)

39화

검은머리 기사왕 39화

주민들이 기억하는 눈투성이는 위엄있는 왕의 후계와는 거리가 먼 착하고 상냥한 한 산골 소녀였다.

어떨 때는 친딸처럼,

또 어떨 때는 친한 형제처럼.

남들이 꺼리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눈투성이를 주민들은 진심으로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저 애정으로 바라보았던 그 작은 아이가 설마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올 줄은.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무기를 들 수 있는 자는 나를 따르라!”

작은 눈투성이가 검을 뽑은 그 순간 왕의 후계와 걸맞은 위엄이 갖춰졌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성장하고 있던 아이가 활공을 위한 날개를 펼친 것이다.

“눈, 눈투성이 님이다!”

“기사님이 오셨다!”

골목으로 도망치던 병사들은 자신들을 앞질러 간 말을 허겁지겁 뒤따라갔다.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다시 생기자, 그들 또한 책임과 의무를 깨달았다.

넘실거리는 화마 사이로 용기 있는 자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흐랴아아압!!”

눈투성이는 곧바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아이를 질질 끌고 가려던 오크를 단칼에 쳐 목을 잘라버렸다.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는 목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어버린 오크 전사.

한참 학살을 즐기던 다른 오크들은 깜짝 놀라 하던 짓을 멈추었다.

어느새 내성 앞에는 도망쳤던 병사들이 모여 떨리는 창을 들고 있었고 그 촉은 분명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다.

한순간 구심점이 된 눈투성이는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있는 병사를 향해 외쳤다.

“말을 타고 목책으로 가요! 가서 대피소가 위험하다고 꼭 전하세요!!”

“눈, 눈투성이 님은요······?”

아무리 모아본다 한들 내성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는 20명 남짓이 전부다.

이 적은 병사로 오크 놈들을 상대하겠다는 건 죽겠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아무런 대답 없이 말을 끌고 와 어린 병사를 태웠다.

그리고 말 엉덩이를 쳐 쫓아내며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대피소 문을 닫으세요.”

“······네!”

입술을 꾹 깨문 병사가 모든 주민이 무사히 들어간 대피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간절히 눈투성이를 부르는 사람들을 외면하며 문을 걸어 잠갔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다.

침을 꿀꺽 삼킨 병사들은 눈투성이 옆을 지키며 내성 입구를 틀어막았다.

“크르르륵·········.”

한참 참혹한 학살을 벌이던 티그르가 짜증 어린 얼굴로 걸어 나왔다.

겨우 저 조그마한 계집 하나 때문에 귀중한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하지만 간사한 놈은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또 한 번 뱀의 혀를 굴리기 시작했다.

“용감한 자로다. 그 뒤에 사람들만 우리에게 넘겨라. 너희들을 존중해, 지금 도망치면 추격하지 않겠다.”

두려움을 참고 있던 병사들이 흠칫 떨었다.

저 말이 자신을 유혹하는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목숨이 걸린 일이기에 혹한 것이다.

혹시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저 말이 진심이지는 않을까.

속에선 지켜야 하는 양심과 살고 싶다는 본능이 끊임없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시선은 자연스레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들이 믿는 마지막 양심이 있었다.

“차라리······.”

눈투성이가 입을 열었다.

작은 입에선 따뜻한 입김과 함께 조금도 떨리지 않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마치 속삭이듯 들려오는 한마디 말이 놈들과 병사들의 귀를 관통한다.

“여기서 이들과 죽겠다.”

불리한 전황 아래 삶을 약속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믿어라, 만약 죽어야 한다면 너희와 같은 피를 흘리며 죽겠다.

철컥.

눈투성이는 검을 앞으로 겨눴다.

그러자 저 뒤에 가족을 지켜야 하는 병사들 또한 전의로 응집하며 창을 들었다.

후욱!

티그르는 얼굴을 붉혔다.

분명 전황은 자신들이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 명예와 전사의 고고함은 저들에게 있었다.

전부 찢어 죽이리.

티그르는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애써 숨기며 남은 전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쳐라!”

“Ewah-ah - - - -!!!!”

오크 전사들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대피소를 파괴하고자 좁은 내성 입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그 속도는 작은 목책과 병사들은 한순간 쓸려 나가버릴 정도로 맹렬했다.

쾅! 콰직!

서걱!

푸욱, 푹!

한쪽은 막으려는 자, 한쪽은 뚫으려는 자.

오크 전사와 인간 병사가 좁은 내성 입구를 두고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창이 부러지고 사방으로 피가 튀긴다.

팔 한번 뻗기 힘든 좁은 공간에서 뜯어진 살점과 내장이 서로를 적셨다.

하지만 확연하게 차이 나는 전력에도 불구하고 내성 입구는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눈투성이가 있었다.

서걱!

“크르륵!”

눈투성이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오크 전사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병사들은 숨을 돌렸다.

소녀의 작은 체구와 민첩함은 도리어 이런 난전에 도움이 된 것이다.

푹, 까드득!

바닥을 굴러 도끼를 피하고 또 피해 두꺼운 갑주 사이로 칼을 찔러넣는 눈투성이.

소녀의 검은 머리는 어느덧 흙과 피가 섞인 진창으로 물들었고 얼굴은 잔가지처럼 생긴 상처 때문에 알아볼 수가 없었다.

채앵!

털썩!

하지만 이런 분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하나씩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아무리 전의를 갖추고 창을 내지른다 한들 오크 놈들은 여전히 많고 강력했다.

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전장을 질주한다.

병사들이 흘린 핏물과 내장이 대항한 대가로 무엇인지를 톡톡히 보여주었다.

압도적인 열세, 인간들의 패배.

이미 결과가 정해진 전투는 오직 참혹한 광경만을 세상 속에 남겼다.

“크으으윽!”

“크르륵, 놓아라!”

창과 팔이 부러졌다.

하지만 이를 악문 병사는 안으로 들어가려는 오크의 발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절대로 들어가게 두지 않는다.

배를 찌르는 끔찍한 고통 속에 눈물이 쏟아져도 병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크 전사는 그 독함에 질려버린다.

그리고 도리어 두려움을 느꼈는지, 결국 고함과 함께 병사를 도끼로 내려찍는다.

서걱!

끝까지 오크를 붙잡다 죽어간 병사의 마지막 모습이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다.

그 단말마와 함께 들려오는 유언은 진창을 지나 눈투성이 영혼의 각인되었다.

‘도망치세요, 기사님.’

그들에게는 무슨 의미였을까.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이 북방 위에 추위를 딛고 일어날 봄의 꽃은······.

“아······.”

눈투성이는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죽음과 삶 사이에서 세상은 아주 느리게 흐르며 삶을 기만한다.

내게 무엇을 묻고 싶은가요.

어머니라 불리는 북방은 작은 아이를 향해 끊임없는 고뇌와 고통을 넘겼다.

여기서 포기할 것이냐.

여전히 죽음이 두려운가.

그리고 모든 핏물이 세상 아래 떨어졌을 때 영혼이 벗은 허물은 눈물이 되었다.

눈가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무형의 정수.

망막을 씻어낸 그 눈물은 눈투성이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고요하되 조용하지 않으며,

성스럽되 찬란하지는 않은 세상.

눈투성이는 무거웠던 검을 가볍게 들어 올려 그런 세상을 양단했다.

그것은 이전과 다른 사선이었다.

서걱!

까가가가강!

수백 번 두드려 만든 오크의 강철 갑옷과 몸뚱이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그 잘려 나간 몸뚱이 사이로는 푸른색 귀기를 품은 눈동자가 맺혔다.

무릇 전사라면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이며 한 줌 먹처럼 더럽혀야 하는 도화지.

수많은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눈투성이는 그 고비 위로 날카로운 발톱을 올렸다.

“- - - - - - -!!!”

서걱!

땡그랑!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이는 다름 아닌 오러 사용자인 티그르였다.

자신이 힘들게 밟아온 경지를 저 어린 계집은 마치 고고한 학처럼 뛰어 날아버렸다.

오러를 느끼기 시작하는 첫 번째 단계.

오직 타고난 핏줄과 전사만이 겪게 되는 이 두 번째 태동은 한낱 오크 전사들이 막을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마지막 발악인 줄 알았던 계집은 마치 위태로운 불처럼 오러를 만들고 있었다.

스걱!

섬광처럼 이어지는 북방 검술 2형.

순식간에 오크 전사 셋이 당했다.

아니, 어쩌면 넷!

마치 한 폭의 춤 같은 유려한 검술 앞에 오크 전사들은 쓸려나갔다.

티그르는 어쩔 수 없이 도끼를 다시 들며 전사들을 향해 외쳤다.

“물러나라!”

겨우 저 나이에 오러를 느꼈다.

저대로 성장하게 둔다면 정말 검성을 뛰어넘는 괴물이 나올지도 모른다.

티그르는 여기서 그 싹을 잘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타오르는 오러를 뽑아냈다.

치지지직, 치직······!

티그르가 내린 지시에 오크 전사들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혼자 남게 된 눈투성이는 여전히 내성 문을 막고 있었다.

여기는 지나가게 둘 수 없다.

눈동자에 맺힌 푸른 의지가 세상을 태우고 스스로마저 태워낼 것 같았다.

순간 알 수 없는 불쾌함이 솟구친 티그르는 눈투성이를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Ewah-ah - - - -!!!!”

아무리 권력과 멀어진 44번째 아들이라 해도 황제의 피는 어디 가지 않는다.

티그르는 이미 오러를 응집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라온 상태였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오러란 넘지 못할 격이 있었다.

후웅, 쾅!!

치지지지직!

머리 위로 오러 도끼가 떨어진다.

막으면 검 채 잘려 나갈 것이다.

이를 악문 눈투성이는 바닥을 굴러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내었다.

챙!

“가소롭다!”

바닥을 구른 눈투성이는 티그르의 아킬레스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눈치챈 놈은 그대로 검을 튕겨냈고 하단을 노린 눈투성이를 차버린다.

콰직!

“커억- - -!”

내장이 끊어질 것 같은 격통.

피를 토해낸 눈투성이는 그대로 날아가 저 멀리 내성 입구 근처에 처박혔다.

갈비뼈가 그대로 부러졌을 것이다.

발에 챈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후욱!

티그르는 흥분한다.

열등감을 느낀 상대를 짓밟고 부시는 행위에서 쾌락을 얻은 것이다.

자, 이제 누가 이겼느냐.

위대한 황제의 아들인 바로 나다.

작고 조그마한 인간 계집이 아닌 바로 나!

꿈틀.

“뭐?”

하지만 그 쾌락이 당황으로 바뀌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간 놈의 얼굴에 웃음이 지워졌다.

파르르르르.

“···끄르륵, 끅.”

피가 끓는 소리를 낸 눈투성이는 빠져나간 손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비틀비틀 또 한 번 일어나며 한 손으로 내성을 꼭 부여잡고 닫았다.

끼이익, 덜컹.

모두가 죽어버린 시체 위.

덜덜 떨려오는 손.

하지만 눈투성이는 떨어진 검을 줍고 적들을 향해 다시 겨누었다.

왕의 후계는 여전히 서 있었다.

같이 죽기로 약속했던 사람들 앞에.

“크아아아아아아아 - - - -!!!”

티그르는 이성을 잃었다.

그리고 눈투성이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 미친 듯이 도끼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넘어질지언정 쓰러지지 않는다.

작은 몸에 깃든 전사의 혼 앞에 오크들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쾅! 쾅! 쾅! 쾅!

지지지지직, 쨍그랑!

붉은 강철이 만들어 준 검이 오러를 이겨내지 못해 유리처럼 깨져버린다.

그리고 끝까지 버티던 눈투성이 또한 짙게 생긴 상흔과 함께 털썩 무릎을 꿇는다.

“허억, 헉!”

티그르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떨리고 있는 눈동자에는 경악과 두려움이 진하게 맴돌고 있었다.

할 말을 잃은 오크들과,

화마조차 경의를 표하는 밤하늘.

아이는 여전히 부러지는 검을 쥐고 있었다.

전율한 티그르가 물었다.

“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너는 도대체, 도대체 누구의 자식이냐······!”

검은 머리, 꺾이지 않는 신념.

왜 모르고 있었을까.

티그르는 한 때 오크를 북방에서 몰아냈던 한 영웅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눈투성이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점 미련없는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이며 그날, 그때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내 이름은 눈투성이.”

티그르는 헛숨을 들이켰다.

오크 전사들은 동요했다.

“- - - - - - - -!!”

그것은 눈투성이라는 이름 뒤이어 몰려오는 세상을 짓누르는 거대한 무형 때문이었다.

무언가가 여기로 오고 있다.

마치 불의한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거대한 이빨을 드러낸 지옥 야차가!

“북방 왕의 후계이자.”

티그르는 서둘러 뒤돌았다.

그리고 모든 화마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돌풍을 향해 서둘러 도끼를 들었다.

아차,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지금이라도 빨리 후퇴해야 한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말은 그 모든 행동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검성 부러지는 검의 제자다.”

티그르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한 줄기 불꽃이 되어 돌아온 검성이 경악한 티그르의 목을 베었다.

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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