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검은머리 기사왕 38화
티그르는 그리 생각했다.
아무리 인간 놈들이 영지를 만들고 목책을 세워봤자, 자신이 이끄는 전사들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예상은 공성을 시작한 첫날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고 본진을 세운 그다음 날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사다리는 올라가는 족족 떨어져 내렸다.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과 투창 때문에 감히 방패를 내릴 수도 없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인간 병사들이 노련한 오크 전사들을 상대로 한 치 물러섬 없이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충격적인 선봉 전 패배.
또 다른 문제는 그 이후였다.
‘다 비어 있습니다, 티그르님!’
자신들이 올 것을 예상하였는지 이미 싹 비어버린 농경지 창고들과 현지 수급은커녕 온갖 독초와 맹수가 도사리는 척박한 땅.
봄이 왔음에도 살얼음이 끼는 이 끔찍한 날씨는 용맹한 오크 전사들의 사기를 빠른 속도로 갉아먹기 시작했다.
단기전을 예상하고 올라온 북방 오지는 하얀 지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거기서 끝났다면 티그르는 골머리를 앓지도 않았을 것이다.
첫 공성전에서 패배한 이후 살아남은 노병의 증언이 아직도 머리를 맴돌았다.
‘회색 늑대가 분명합니다.’
최고 최후의 허스칼이자 단신으로 오크 근위대를 쳐부쉈던 회색 늑대.
놈과 동시대 전쟁에 참전했던 오크라면 절대로 모를 리가 없는 인간 영웅이었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 모습을 완전히 감췄다고 들었는데 설마 이런 변방에서 놈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노병의 증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사는 분명 둘이었으니까.
‘또 다른 한 명은 제 기억과는 다릅니다. 그래도 검술은 분명 그와 닮았습니다.’
‘빨리 말해 보아라!’
‘부러지는 검입니다.’
묵직한 공기가 천막 내부를 짓눌렀다.
그 초라한 이름 한 글자가 주는 위명에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어서였다.
북방 아래 가장 빛나는 검성, 부러지는 검.
기사왕의 영원한 종자이자 왕국 건설의 가장 큰 공신인 그는 다른 인간 영웅과는 차원이 다른 전설적인 자였다.
티그르는 뒤이어 생각했다.
쉽게만 생각했던 이 전쟁, 어쩌면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게 맞는 건 아닐까.
단순한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수많은 부족민을 책임져야 하는 티그르는 신중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성과 없이 출정한 군대를 후퇴시킬 수는 없었다.
‘패전을 책임져야 한다.’
오크는 공적과 전투에 집착하는 종족답게 신상필벌이 무척이나 단호했다.
심지어 본진 허락 없이 숙영지를 움직인 상황인데, 영지 하나 멸망시키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처벌은 불 보듯 뻔했다.
아마 자신이 실수하기만을 노린 형제들에게 정말 목이 잘릴 수 있지 않을까.
티그르는 결국 침통한 얼굴과 함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방법은 언급했다.
“놈을 불러와라.”
“티그르님!”
“나도 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전쟁이 한참 소강상태였던 오늘 새벽, 인간 진영에서 인간 하나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첩자인가 싶어 목을 베려 했지만,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그 늙은 인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후, 후방에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대피소와 민간인들이 있으니 그들을 취하십시오.’
‘지금 네놈 말을 믿으라는 거냐?’
‘배, 배수로 문이 열리고 판단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만약 거짓말이라면 거기서 제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어라.
간사한 놈은 세 치 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입에서 뱉은 정보는 설득력이 있다 판단될 만큼 솔깃한 제안이었다.
긴 고민 끝에 티그르는 놈을 불렀다.
그러자 한참 갇혀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행정관이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배수로를 지키는 병사는 없나?”
“미리 내통해둔 자가 있습니다! 신호를 보내면 분명 문을 열어 줄 겁니다.”
“······이것으로 네놈이 얻는 건 무엇이냐. 그래도 같은 인간일 터인데.”
“저, 저는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죽은 목숨입니다. 이 오지에서 도망친다 한들 가망이 있겠습니까? 이것 말고 방법이 없습니다.”
같은 종족을 팔아먹는 역겹고 추악한 놈.
만약 같은 오크였다면 뼈와 살을 발라 본보기를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인간이었고,
추악한 배신자이기에 믿음이 갔다.
마음을 굳힌 티그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했다.
“그래, 좋다! 만약 네 말대로만 된다면 곧 만들어질 노예 마을의 관리자는 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인간 영웅들이라 할지라도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공격은 쉽게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만약 막아낸다 해도 상관없었다.
적당히 싸우다 밀린다 싶으면 대피소에서 저항 못 할 인간들만 죽이거나 끌고 가 면책용 공적만을 챙기면 될 테니까.
철저하게 약자 처지에서 성장해온 티그르는 욕망과 절제 사이에서 충분한 보험까지 미리 생각해둔 상태였다.
그는 뒤이어 서전트들을 향해 명령했다.
“내일 밤 모든 전사를 동원해 목책을 공격해라! 내가 후방 배수로를 칠 테니, 전방 지휘는 너희들에게 맡기마.”
“······혼자서는 위험하시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일이다. 내가 직접 나서야지.”
회색 늑대와 부러지는 검을 묶어두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서전트 셋이 전부 필요할 것이다.
주요 표적은 후방 대피소.
티그르는 묵직한 도끼를 휘두를 생각에 흥분으로 찬 콧김을 후욱 내뱉었다.
전장에서 풍겨오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온몸의 피를 끓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 * *
쿵쿵! 쿵쿵! 쿵쿵!
칠흑같이 어두운 밤, 목책 앞 숲에선 수많은 횃불과 함께 전쟁 북이 울렸다.
그러자 그 엄청난 숫자의 오크 본대가 발맞추어 진격을 시작했는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와 속도였다.
드디어 오크와 인간, 양측의 운명을 건 2번째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꿀꺽.
하지만 치열한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목책과는 달리 마을 후방인 배수로 입구는 정말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전투가 힘든 최소 인력만을 남겨둔 채로 모두 목책으로 동원된 탓이다.
그리고 운 좋게 남게 된 최소 인력 중 하나인 작은 떡잎은 친구이자 동료인 나비 날개를 향해 조심히 물었다.
“정, 정말 이번 공격이 마지막인가 봐. 진격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반드시 이길 거야. 난 믿어.”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참 다행이지만, 이렇게 가만히만 있어야 한다는 것도 참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힘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자신도 싸울 수 있었을 텐데.
작은 떡잎은 자신의 짤막한 팔과 다리를 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여전히 조용한 배수로 입구.
한참 주변을 경계하던 친구 나비 날개가 작은 떡잎을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보리 이삭님 요즘 이상하지 않아? 저기 봐, 오늘도 또 혼자 계시잖아.”
“그러게······.”
평소에는 멋진 외모와 성격으로 마을 주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보리 이삭이다.
하지만 스승과 함께 수련을 다녀온 이후로 분위기가 많이 변해버렸다.
지금도 보아라.
원래라면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위로해주어야 할 보리 이삭은 혼자 망루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무슨 힘든 일이 있으신가.”
가뜩이나 적은 인원인데 책임자인 보리 이삭까지 저러니 분위기가 좋지 않다.
여전히 보리 이삭을 좋아하는 떡잎과 날개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턱!
“어? 일어나셨다.”
하지만 그 순간 넋 놓고 밖을 바라보던 보리 이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망루 위에 달린 경고 종을 끊어버린 뒤 그 둘을 향해 다가와 말했다.
“배수로 문을 열어라.”
“네? 문을요?”
“그래, 조금 전 요격을 나갔던 스승님이 배수로로 돌아오시는 중이다.”
영주님이 요격을 나가셨나?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 떡잎은 의아한 얼굴로 친구를 날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비 날개 또한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배수로 문은 열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책임자인 보리 이삭이 열라고 하니 무엇이 우선인지 헷갈렸다.
“지금 명령을 무시하나?”
“열, 열겠습니다!”
그래, 설마 영주님의 하나뿐인 제자인 보리 이삭이 설마 거짓말을 하겠는가.
마치 죽일 듯 노려보는 눈빛에 겁이 난 떡잎과 날개는 서둘러 잠금장치로 달려갔다.
쿠르르릉!
“이래도 되나······.”
“당기기나 해.”
두 사람은 이번에 설치한 잠금장치를 풀고 연결된 밧줄을 열심히 당겼다.
그러자 녹슨 도르래가 돌아가며 배수로를 막고 있던 철창이 위로 올라간다.
보리 이삭님 말대로라면 곧 자랑스러운 영주님이 저곳으로 나올 것이다.
손을 털고 복장을 반듯이 한 떡잎과 날개는 반듯한 경례 자세를 취했다.
“응?”
하지만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저쪽에 있었던 보리 이삭이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다.
분명 망루 아래로 내려왔었는데······.
후웅!
콰직!
그 순간 배수로에서 커다란 도끼가 날아와 나비 날개의 몸을 꿰뚫었다.
그리고 영주님이 오신다고 하셨던 배수로 입구에선 인간이 아닌 수십 개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 아······!”
다시 닫아야 한다.
친구가 갑작스레 죽은 이 순간에도 의무를 잊지 않은 작은 떡잎은 밧줄을 잡았다.
서걱!
하지만 벌써 마을 안으로 들어온 티그르가 작은 떡잎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피 묻은 도끼를 어깨 위로 걸치는 족장 티그르.
그는 개처럼 끌려온 행정관을 향해 물었다.
“네 말이 정말 맞았군, 쥐새끼 인간. 대피소는 어디에 있지?”
“저, 저쪽으로 쭉 가시면······.”
“그래, 고맙다.”
서걱!
콰직!
모든 볼일을 끝낸 티크르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행정관의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그 머리마저 무참히 밟아버리며 오크 전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불을 질러라, 대피소로 간다.”
처음부터 보리 이삭을 속일 생각으로 오크를 마을로 끌어들였던 행정관.
하지만 본인만 살아남겠다는 그 추악한 계획은 성공하기는커녕, 마을 후방을 위험에 빠트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화르르륵!
오크 전사들은 배수로를 지키고 있던 모든 병사를 사살하고 횃불을 들었다.
그리고 건물이 보이는 족족 불을 지르며 대피소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 오크······. 컥!”
서걱!
어둡던 마을 후방이 화마로 물들었다.
동시에 골목을 빠르게 지나간 오크 전사들은 암세포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오른 불씨들과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후방 병사들.
하지만 그 실상을 확인하기에는 이미 빠른 속도로 확산한 지 오래였다.
도끼에 묻은 피를 털어낸 티그르는 저 멀리 나무로 급조해서 만든 내성을 발견했다.
저곳이 바로 쥐새끼 같은 인간이 자신에게 알려준 마을 내 대피소였다.
“크라아아아아아 - - -!!”
티그르는 워크라이를 내뱉었다.
그러자 오크 전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꺄아아아악 - - -!!”
“오, 오크다! 오크가 왔다!!”
대피소만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내성 앞은 부상병을 치료하는 임시 병동 역할도 겸하고 있었는데, 졸지에 후방을 점거한 놈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내, 내성 안으로! 빨리 내성 안으로 도망치시오! 문을 닫······, 커억!”
무방비하게 노출된 채 공격당하는 사람들.
부상병 치료를 도와주던 주민들은 혼비백산 도망쳤고 그나마 이성을 유지한 치료사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려 했다.
하지만 오크 놈들을 막기에는 급조한 내성 목책과 문은 너무나 허술했다.
눈이 붉게 변한 티그르는 도망치는 주민의 몸을 반으로 쪼개며 광소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놈들은 죽여 귀만 챙겨라! 암컷과 애새끼들은 전부 잡아!”
비명, 공포, 두려움, 화마.
그래, 이 느낌이다.
무력한 가축을 비참히 죽이는 이 행위만큼 놈에게 즐거운 것은 없었다.
그렇게 참혹한 지시를 내린 티그르는 전사들과 함께 내성으로 진격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부녀, 서둘러 손주 눈을 가리는 노파, 하나둘 참혹하게 죽어가는 병사들.
오직 붉은 화마만이 마지막으로 가려지는 아이의 눈동자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잿더미만 남게 될 비극의 서장은 그렇게 비릿한 핏물로 쓰인 채 사라지려 했다.
스르르릉, 챙!
하지만 그 순간 거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청아한 목소리가 전장을 강타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전군! 대열을 유지하라!”
빛나는 검, 흩날리는 검은 머리.
전신에서 뻗어 나온 강하고 굳센 아우라가 희망을 삼킨 어둠과 대적했다.
스승의 둥지에서 처음으로 벗어난 왕의 후계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날았다.
“후퇴하지 마라! 끝까지 무기를 들어라!”
급히 달려온 말을 타고 혼란스러운 전장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눈투성이.
도망치던 병사들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러서지 마라, 끝까지 무기를 들어라!
모두가 사방으로 도망칠 때 오직 눈투성이만이 화마를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 - - - - - -!!”
전장의 흐름이 변했다.
전설을 재현할 날카로운 송곳이 오크 놈들 눈동자에 그대로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