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검은머리 기사왕 37화
모든 전력이 단기간 격돌한 첫 공성전은 양측 진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북방 인간 진영에는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는 희망을 오크 진영에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경계심을 가지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오지까지 침공해온 오크들이 겨우 한 번 패배했다고 물러날 놈들은 아니었으며 북방 인간 또한 겨우 승리 한 번으로 방심할 자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목책을 포위한 채 공성 사다리를 만들며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하는 오크들.
겸허히 승리를 받아들인 병사들 또한 최선을 다해 목책을 복구하고 있었다.
“영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 꽁지 빠지게 도망치더라니까? 크으······. 거기서 내가!”
“아이고, 허세 그만 떨고 다음 전쟁 때는 더 조심하세요. 아셨죠?”
수뇌부는 최대한 자제하라 했지만, 승전이 가져다준 흥분은 감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교대로 가족들을 만나고 온 병사들로 인해 더욱 번져나갔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 입에서는 수성전에서 맹활약을 펼친 이들의 이름이 오고 내리고 있었다.
“- - - - - - - -.”
하지만 모두가 들떠있는 시기, 이야기에 끼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붉게 충혈된 얼굴로 방금 지나간 부부를 노려보던 보리 이삭이었다.
꼴깍꼴깍.
본인이 책임지는 근무지에서 벗어난 것도 모자라 중요한 전시 상황에 당당히 술을 마시고 있는 보리 이삭.
독주가 담긴 술병은 이미 반쯤 비어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진득하고 더러운 감정으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보리 이삭이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눈투성이를 향해 느끼는 지독한 질투와 스승인 회색 늑대를 향한 원망이었다.
‘여전히 스승이라 부르지 않는구나.’
처음에는 모든 게 완벽했었다.
자신에게는 항상 빛나는 외모와 재능이 있었고 그것을 가르쳐주는 스승 회색 늑대 또한 세상 제일가는 영웅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모두가 칭송해주고 걷기만 해도 손을 뻗어오는 사람들.
보리 이삭에게 있어 이 영지는 신나는 놀이터이자 타고난 허영심을 채워줄 수 있는 지상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두 놈이 오고 모든 게 변했다.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예정이었던 보리 이삭 일대기에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다.
오러를 쓰지 못하는 반쪽짜리 기사 주제에 영웅 행세를 하는 부러지는 검.
여우처럼 꼬리를 쳐 스승의 관심을 독차지해버린 눈투성이 계집.
모든 게 결점인 놈들이었다.
시간만 조금 있었다면 언제든지 뛰어넘고 좌절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승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갈수록 살가워졌고 자신을 보는 눈빛에는 매번 실망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네가 나설 전장이 아니다, 보리 이삭.’
‘겸손해지는 방법부터 배워라!’
갈등과 분쟁, 성급한 감정.
그래, 결국 이 지경이 났다.
위대한 왕이 되어야 할 자신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배수로로 내몰렸다.
꼴깍, 꼴깍.
보리 이삭 속 안에 뱀이 똬리를 텄다.
크기는 비록 작지만 언제든지 독니를 드러낼 수 있는 추악한 마음이 말이다.
“어머? 보리 이삭 님 여기서 뭐 하세요?”
“······꺼져.”
“네?”
“꺼지라고!”
쨍그랑!
평소 눈에 자주 익던 마을 소녀가 보리 이삭을 향해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진즉 선한 가면을 벗어버린 보리 이삭은 소녀를 향해 병을 집어 던졌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소녀와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난 보리 이삭.
마지막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인 검을 꾹 움켜쥔 그는 인적이 드문 골목 사이로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흐릿한 귓가로 어젯밤 자신을 몰래 찾아왔던 행정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줄까? 너나 나나 이 전쟁 끝나면 둘 다 나가리야.’
‘뭐? 그럴 리가 없다고? 지금 주민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모르는구나.’
처음 행정관이 저지른 온갖 패악질이 드러났을 때는 거기에 엮일까 싶어 최대한 철저히 외면하며 모른 척했었다.
하지만 거기에 앙심을 품은 행정관은 사람들 몰래 자신을 찾아왔고 그동안 자신이 받아온 뇌물 장부로 공멸을 협박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화가 났다.
가뜩이나 복잡한 심경 때문에 짜증이 치솟았는데 곧 죽을 놈이나 마찬가지인 행정관이 자신을 괴롭히니 말이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행정관은 자신을 변호하라는 협박이 아닌 서로가 공존할 방법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 계집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그 계집만 죽으면 네가 걱정하는 후계 문제는 전부 해결이 된다고.’
‘방법? 없긴 왜 없어. 내가 오크 놈들을 속여서 유인할 테니 너는 배수로 길만 열어줘. 사고인 척 일만 수습하라고!’
눈투성이가 담당하고 있는 대피소와 배수로 입구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리고 둘 다 안전한 후방이기에 최소한의 방어 인력만이 배치된 상태다.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마을 후방인 배수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뚫려버린다면 대피소를 맡은 눈투성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꿀꺽.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당장 지옥에 떨어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끔찍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보리 이삭은 생각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적만 들여보낸 뒤, 눈투성이가 죽고 나서 깔끔히 토벌해버린다면 모든 게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그 책임은 탈옥범 신분인 행정관에게 뒤집어씌우면 될 테니 말이다.
원래 시체란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스윽.
보리 이삭은 그날 눈투성이가 검을 겨눴던 목을 매만지며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한낱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자멸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끔찍한 흉상 같았다.
* * *
퓽! 퓨융!
어두운 밤, 방패 벽 뒤에 몸을 숨긴 오크 궁수가 불화살을 쏘아댄다.
하지만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은 목책에 불이 붙자마자 젖은 가죽을 비벼 소화했고 꽂힌 화살은 다시 챙겼다.
이것으로 벌써 21번째 소규모 습격.
말이 좋아 습격이지 방금처럼 궁수들로 불화살을 쏘거나 어둠을 틈타 몰래 목책을 넘으려는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오크 놈들 수작은 뻔하다.
장기전으로 이어지는 공성을 위해 병사들 힘과 정신을 빼놓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수성전 경험이 많은 나와 회색 늑대는 이와 같은 뻔한 작전을 파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기적인 대응 편람과 빠른 동원이 가능한 준비 체계, 그리고 피로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로테이션이다.
물론 그 덕에 나를 포함한 수뇌부들이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지만,
전쟁이 가져다주는 암울한 분위기만큼은 마을에서 최대한 덜어낼 수가 있었다.
마을 내부에 우물은 건재하고 주민 전체를 징발해 쌓아둔 공용 식량 또한 충분하다.
하지만 단기전을 생각하고 급히 달려온 오크 놈들은 그렇지 않았다.
척박한 북방 오지가 선사하는 청야전술.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한 것은 우리가 아닌 바로 오크 놈들이다.
나와 수뇌부는 양측이 끝을 보게 될 전면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부러지는 검.”
오늘 밤은 내가 목책 방어를 책임지는 당번이라 아무도 없는 망루 위 혼자 앉아 오크 본대를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교대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막사에서 쉬고 있어야 할 회색 늑대가 망루 위로 뚜벅뚜벅 올라왔다.
“······회색 늑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나는 의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목책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회색 늑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내게 다시 앉을 것을 권했다.
“편히 앉아라, 이야기하러 온 거니까.”
할 이야기? 혹시 수성전과 관련해서 또 상의해야 할 게 남아있는 건가.
나는 기어코 망루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한 회색 늑대를 따라 털썩 앉았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한참 화살을 쏘면 귀찮게 구는 오크 놈들이 물러가자 숨을 죽이고 있던 풀벌레들이 돌아와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음이라기보다는 전쟁의 열기를 잠시 잊게 해주는 노래 같았다.
회색 늑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깊어가는 밤을 되짚어보는 듯했다.
길게 이어진 침묵.
회색 늑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전쟁은 이길 거다.”
오만한 선언이다.
하지만 그 선언을 한 자가 회색 늑대라는 점에서 결코, 오만하지 않았다.
현 전황은 우리가 충분히 유리했고 수뇌부와 병사들에게는 이어질 전면전을 능히 이겨낼 힘이 남아있었다.
아마 승리를 자신한 회색 늑대의 말처럼 전쟁 중 벌어질 고비만 무사히 넘기면 이번 침공은 무사히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오크와 벌인 전쟁이 아닌 그 이후를 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잿더미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말이다.
회색 늑대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보이지가 않아.”
“전쟁 이후?”
“그래, 전쟁이 끝난 이후.”
전쟁이 끝이 나면 나는 아마 중단되었던 눈투성이의 오러 훈련을 마무리할 것이다.
그리고 훈련이 끝나면 예정대로 마을로 돌아가 다음 겨울에 있을 통일 전쟁을 바삐 준비하고 있을 예정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회색 늑대의 경우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8년간 그래왔듯 우리는 맹약이 끝나면 서로 다른 노선을 걷고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회색 늑대는 대답을 듣고자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전부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조금만 신경 썼어도 고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였지. 하지만 나는 달관했고 무심했다.”
“네 잘못이······.”
“아니, 내 잘못이다. 내 과오로 죽은 이들 앞에 거짓말하게 하지 마라.”
모든 게 지독한 운명이었음을 알고 있기에 회색 늑대를 탓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을을 위기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또한 수많은 이를 책임지는 자였고,
인간을 위해 살아온 영웅이었으니까.
아무리 허송세월 8년을 보냈다고 한들 그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근데 너는 달랐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가장 힘든 일을 묵묵히 해냈지. 겨우 검만 휘두를 줄 아는 멍청한 나와는 달리.”
“어쩌면 왕이 너를 믿은 이유도 그런 우직함 때문이었을 거다. 다른 잘난 영웅들한테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너는 우리를 진심으로 아껴줬다. 그저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회색 늑대의 눈동자는 뜨거웠다.
그것은 지난 전쟁과 맹약에선 절대로 볼 수 없었던 격한 감정의 홍수였다.
회색 늑대가 내게 물었다.
“너에게 왕이란 무엇이냐?”
“아우르는 자다.”
커튼 짙게 깔린 달빛, 마치 지켜보고 있다는 듯 북방에는 불어오는 맹렬한 바람.
회색 늑대는 마치 돛을 크게 펼친 범선처럼 조용히 일어나 내게 물었다.
“부러지는 검! 그렇다면 눈투성이는 왕의 재목이 확실한가?”
“······그래,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들었다. 부러지는 검이 그리 약속했다.”
위대한 왕은 핏줄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숭고함은 어미의 배가 아닌 우리가 만든 요람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회색 늑대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맹렬한 바람은 마치 그가 울부짖는 하울링 같았다.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마리 늑대.
그는 북방이 날뛰는 파동 아래 이를 악물며 거대한 검을 단숨에 뽑았다.
스릉! 쿵!
떨림과 바람이 멈췄다.
내가 고개를 들어 회색 늑대를 마주하자, 뽑았던 검이 망루 위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상흔과 세월이 가득한 손잡이는 늑대가 아닌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나.
내 앞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내 검을 받아다오.”
눈꺼풀이 저절로 닫혔다.
이번에는 밖이 아닌 내 속에서 뒤늦은 파동이 몰아친 탓이다.
왕이 죽고 뿔뿔이 흩어졌던 영웅들.
나는 그들과 다시는 함께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으로 이 고독한 세월을 보내왔다.
“주민들을 내일로 이끌어다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동안 행해온 모든 노력과 인간을 향한 찬미는 마치 쌓이고 쌓이는 하얀 눈처럼 커다란 결과를 이뤄내고 있었다.
왕이 그 누구도 아닌 나를 믿었던 이유.
회색 늑대가 심장과도 같은 검을 맡기자, 8년간 나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던 불신과 설움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스릉, 챙!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았다.
그리고 회색 늑대가 꽂아둔 미래 위로 내 검을 조용히 교차시켰다.
* * *
개미닝겐님이 눈투성이 팬아트를 그려주셨습니다! 너무 커엽지 않습니까? 3년 동안 글 쓰면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팬아트이자 최고의 팬아트입니다ㅠㅠ...거의 표지로 해도 손색 없지 않나요? 독자님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오늘 화에 깜짝 공개하고 공지로 평생 걸어두겠습니다
내일은 연참합니다!!! 이번 파트도 끝을 향해 달려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