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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36화 (36/181)

36화

검은머리 기사왕 36화

쉬익!

방패 벽을 무너뜨리고 바닥에 떨어지자, 수많은 창이 가시처럼 쇄도한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몸을 뒤튼 나는 칼부림 한 번으로 가뿐히 공격을 상쇄했다.

챙!

튼튼한 통나무로 여러 겹 겹쳐 만든 마을 목책과는 달리 수시로 여닫을 필요가 있는 정문은 조금 가벼운 감이 있었다.

그 덕에 공성추와 같은 물리적인 공격에 상당히 취약했는데 아마 사전에 차단하지 않았더라면 금세 무너졌을 것이다.

“기사님을 엄호해라!”

“와아아아아 - - - -!!”

무너진 방패 벽을 향해 화살과 투창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절묘한 타이밍에 가한 반격 덕분에 목책 위 사기는 빠르게 치솟은 것이다.

하지만 한참 모자라다.

놈들이 강철을 도금해 만든 양 뿔 모양 공성추를 아예 파괴해버려야 했다.

나는 뒤에서 쏟아지는 엄호 사격을 힘껏 등지고 다시 앞으로 뛰쳐나갔다.

챙! 서걱-!

까앙! 끼기기기긱!

내게 도끼와 창이 쏟아진다.

하지만 치열한 난전 속에 공격을 흘리는 여유 따위는 가질 수가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힘과 힘이 부딪히는 육박전을 펼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공성추를 방어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놈들이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 - - - - - - -!!!”

한 오크가 고함을 내지른다.

그러자 물러났던 오크 전사들 뒤로 숨겨둔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노련한 놈들답게 단일 기사를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다.

끼기기기긱!

팽팽하게 당겨지는 시위.

이쪽을 향해 노려지는 수십 개 촉.

미간을 찡그린 나는 직사로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기 위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쉬익! 피잉!

쿵 - - -!!!

하지만 그 순간 목책 뒤에서 육중한 무언가가 떨어져 화살을 녹여버렸다.

아니, 정말 말 그대로 입자로 되돌렸다.

그것이 대검 전체를 감싸고 있는 순도 높은 오러의 막강한 위력이었다.

파스스스.

사방으로 흩어진 입자가 안개처럼 걷힌다.

그러자 내 위치로 뛰어내렸던 회색 늑대가 땅에 박힌 대검을 뽑고 일어난다.

찌르르 울리는 피부.

저절로 침이 삼켜지는 위용.

역사상 가장 위대한 허스칼 회색 늑대가 8년간 침묵을 깨고 전장 위에 다시 섰다.

“그리운 기분 아닌가, 부러지는 검.”

“······그래.”

짧게 대단했지만, 마음을 그렇지 않았다.

그 무심한 회색 늑대가 옛이야기를 꺼낼 만큼 나 또한 끓어오르는 흥분과 넘실거리는 전의는 감출 수가 없었다.

이 환호성이 들리는가.

우리는 나이를 먹어도 전장은 영원했다.

나와 회색 늑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찐득한 진창을 해쳐 앞으로 뛰쳐나갔다.

쿵!

콰지지직!

대지가 울리는 커다란 진각이 울린다.

앞으로 뛰쳐나간 회색 늑대가 대검을 휘두르자 방패는 물론이고 겹을 이룬 오크 방진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회색 늑대의 등을 사다리처럼 밟고 뛰어올라 구멍이 나버린 방진 사이로 안착했다.

“크륵?”

서둘러 거리를 벌리려던 오크 궁수들은 앞을 가로막는 검을 보며 깜짝 놀란다.

나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검 손잡이를 돌려 수십 가지 형이 섞인 쾌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벌들 사이로 뛰어든 포식자가 이러했을까.

검을 휘두를 때마다 으드득 걸리는 뼈의 감촉이 손아귀에서 떠나지 않았고 얼굴과 갑옷은 어느새 선혈로 물들었다.

“후우, 후욱······!”

무아지경, 손과 하나 되는 검.

그렇게 마지막 오크 궁수마저 뒤쫓아 죽인 나는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뒤를 보았다.

그러자 살과 내장으로 진창이 된 전장 뒤로 활활 타오르는 사다리가 보였다.

하나, 둘, 셋, 밀어어어!

파스스스스, 쿵!

회색 늑대와 가한 합격(擊)이 마을 정문으로 향하던 부대를 와해시켰다.

그 여파는 도미노처럼 전장에 뻗어나갔고 결국 마지막 사다리도 바닥에 떨어졌다.

전쟁은 결국 병사들 사기를 가져간 부대가 이기게 되어있는 법.

그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오크 서전트들은 대열을 흐트러트리는 부하들을 발로 차며 서둘러 후퇴 명령을 내렸다.

두둥! 두둥! 두둥! 두둥!

전쟁 북 박자가 변했다.

동시에 큰 피해를 본 오크 전사들은 비틀비틀 일어나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 - - - -!!

놈들이 후퇴한다.

죽을 각오로 싸우던 병사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록 중간에 큰 위기가 한 번 있었지만, 마을을 침공한 놈들을 기어코 무찔렀다.

하지만 회색 늑대는 추격 명령 대신 흥분한 병사들을 진정시키는 데 집중했다.

“젖은 가죽으로 목책에 붙은 불을 꺼라! 다친 병사들을 빨리 병영으로 옮겨!”

기세가 결정되는 선봉 전투에서 이겼다.

하지만 놈들 본대는 여전히 멀쩡했고 후퇴하는 움직임도 일사불란했다.

섣부른 판단은 곧 독.

금세 침착함을 되찾은 병사들은 목책에 붙은 불을 끄며 부상병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입안에 고인 피와 살점을 내뱉으며 완전히 떠오른 주황빛 여명을 맞이했다.

산과 숲을 타고 흐르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내 코끝을 조용히 찔렀다.

* * *

쿠르르르릉······.

흔들흔들.

모두가 숨을 죽인 대피소 안.

밖에선 치열한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지 작은 진동과 함께 등불이 흔들렸다.

도대체 어떤 전투가 벌어지고 있기에 여기까지 진동이 느껴지는 것일까?

그동안 평화롭게 지내고 있던 주민들은 겁에 질린 채 서로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섣불리 패배를 입에 담거나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밖에서 싸우는 이들이 바로 내 가족과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제발 무사해다오.

사람들은 어머니 북방을 향해 손을 모아 기도하며 그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

응애! 응애! 응애!

“쉬, 쉬······. 아가야 제발.”

하지만 모두가 숨을 죽이던 그 순간 조용하던 대피소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묵직한 분위기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아기가 울기 시작한 것이다.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울고 있는 아이를 어쩌지 못해 당황하는 애 엄마.

그동안 짓눌려있던 어수선한 분위기는 마치 깨진 둑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전쟁으로 예민해진 후방 병사들이 대피소로 들어오게 생겼다.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애 엄마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펄럭!

“여기가 많이 답답한가 봐요.”

“아······!”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대피소로 들어온 사람은 험상궂은 병사가 아닌 자상하게 웃고 있는 검은 머리 눈투성이였다.

자신이 맡은 구역이 소란스러워지자, 병사들과 함께 직접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오구구, 엄마가 무서워하니까 아가도 무서웠어요? 자~ 여기 달콤한 사탕이다~”

아기가 울고 있는 것을 확인한 눈투성이는 어쩔 줄 몰라 식은땀을 흘리는 애 엄마 대신 아기를 가볍게 들어 안았다.

그리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아기를 달래주며 입에서 살살 녹는 과일 청 사탕을 눈앞에서 작게 흔들었다.

온갖 어두운 감정으로 불안해졌었던 아기는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까.

한참 대피소를 시끄럽게 울리던 울음소리는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눈투성이가 내뿜는 맑은 오오라는 마치 어수선한 어둠을 밝히는 빛 같았다.

“아기가 너무 예뻐요.”

“감, 감사합니다.”

가뜩이나 신혼이던 남편이 징병당한 마당에 주변 시선이 한순간 모여버리니 정말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책임자로 등장한 눈투성이가 괜찮다는 말과 함께 상냥히 다가와 주자, 바짝 얼어붙어 있던 몸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래, 내가 힘을 내야지.

엄마는 갓난아기를 소중히 끌어안으며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남편을 기다렸다.

까르륵!

아기 웃음소리는 그 어떤 천상의 노래와 악기보다 감미롭다고 했던가.

침울하던 대피소 분위기는 해맑게 웃는 아기로 인해 환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 - - - - - -.”

하지만 정작 이 변화를 주도했던 눈투성이는 사람들과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그녀의 속 또한 이미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잘 싸우고 있을까?

혹시 스승님이 위험한 건 아닐까?

야만인들과 벌였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위기 앞에 몸과 마음이 초조하게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어야만 했다.

반드시 이기겠다고 말한 스승과 맞서 싸울 기회를 준 어머니 북방을 말이다.

눈투성이는 그렇게 분신이나 다름없는 검을 꽉 움켜잡으며 저 멀리 보이는 목책과 뒤로 투영되는 여명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저 위에 설 것이다.

모든 병사를 지킬 수 있는 전장 위에, 그리고 모든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왕좌 위에,

반드시 자랑스러운 기사왕이 될 것이다.

눈투성이가 두 눈을 질끈 감자, 세상을 진동시키는 함성이 목책에서 들려왔다.

전쟁이 시작된 첫날, 희망이라는 불씨를 지피는 첫 승전보가 북방에 울려 퍼졌다.

* * *

“젠장, 젠장!”

쾅! 쨍그랑!

행정관은 찬 바람이 불어오는 자택 집무실에 홀로 앉아 손톱을 뜯었다.

그리고 더 이상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겠는지 책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전쟁이 끝난 후 주민들 앞에서 처리하겠다. 행정관 권한은 영구히 박탈한다.’

회색 늑대가 영지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이번 사건이 벌어진 원인과 책임자에 대한 증언을 전해 들었고 변명을 듣기도전 과감하게 죄인을 가려냈다.

물론 마을이 한참 전시 상황인지라 정식적인 아직 재판은 열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포함한 여러 이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거나 가택 연금을 시키는 것으로 단호한 처벌 의지를 드러냈다.

그동안 일해온 시간을 고려해 이 정도지, 아마 전쟁이 무사히 끝나면 자신은 높은 확률로 처형될 게 뻔했다.

살아남을 방법은 없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영주 회색 늑대가 차라리 쳐들어온 오크 놈들과 싸우다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지만······.

와아아아아아 - - - -!!

밖에서 온종일 들려오는 승리의 함성을 듣자 하니 그것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결국, 행정관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얼마 없는 머리칼을 잡아 뜯어야 했다.

“아.”

하지만 머리카락이 빠져버린 그 순간 생각 하나가 트기라도 한 것일까, 행정관은 작은 탄식과 함께 미쳐 날뛰던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서둘러 집무실 서랍에서 질 좋은 술과 함께 얼굴과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커다란 로브를 꺼내 입었다.

행정관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동아줄 하나를 문득 기억해내었다.

바로 보리 이삭과 그런 그에게 매주 빼돌렸던 수많은 터민 뿌리와 재화를 말이다.

감히 비싼 뇌물을 받아먹고는 회색 늑대 앞에서 모른 척하고 있었겠다.

벼랑 끝까지 몰린 행정관은 실성한 웃음과 함께 뇌물 장부를 챙겼다.

어떻게든 자신을 변호하게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1년간 쌓아온 이 추악하고 더러운 욕심을 전부 공개해버릴 테니까.

행정관은 마지막 희망인 장부를 소중히 끌어안고 고급술에 조용히 약을 탔다.

그리고 집무실 밖 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큰 바위. 자네 어머니는 잘 계시는가? 저번에 한 번 시장에서 뵈었는데.”

“······계속 말 거시면 영주님께 말씀드려서 지하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

“아, 왜 이러는가. 우리 사이가 겨우 그 정도였나? 그냥 별 뜻은 없고 주변이 적적하니 술이나 한잔 나눌까 싶어서······.”

보리 이삭 이 나쁜 새끼 딱 기다려라.

내가 살지 못한다면 한 명이라도 같이 끌어안아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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