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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35화 (35/181)

35화

검은머리 기사왕 35화

어젯밤 회색 늑대가 정문 앞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은 어수선했던 결집력을 다시 대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잡음이 생길 것을 예상했던 징병과 징발에도 문제가 없었고 다른 전쟁 준비 또한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일단 회색 늑대 마을은 비교적 지형이 높은 산 아래 건설된 목책 요새다.

덕분에 정문까지 딱 하나 있는 길을 제외한 지형은 경사가 상당히 높아서 초보자가 아래로 활을 쏘기 쉬웠다.

그리고 뒤쪽은 높은 산맥을 통해 극단적으로 막혀 있었는데, 사실상 드러난 공격 지점은 3곳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곳은 바로 정문을 기준으로 왼쪽, 오른쪽 목책, 저번 인질 사건 이후로 보수를 끝낸 마을 뒤쪽 좁은 배수로였다.

자연스레 인선이 배치되었다.

가장 중요한 왼쪽, 오른쪽 목책은 나와 회색 늑대가 지휘봉을 잡았고,

뒤쪽 정문을 막을 병력과 예비병력은 푸른 손과 순찰 대장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제자들 또한 자연스럽게 한 구역씩 맡게 되었는데, 그나마 가장 안전한 배수로와 비전투 인력이 전부 모여있는 내성 안 회관이 바로 그 구역이었다.

‘그 누구보다 잘 싸울 수 있습니다, 스승님! 제발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보리 이삭은 의욕적이었다.

검술 실력이 대단하다는 풍문과 그 자신감은 역시 거짓 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전쟁 경험이 없는 탓에 중요한 구역은 담당할 수는 없었고,

회색 늑대는 보리 이삭에게 마을 뒤쪽 배수로 입구를 지키게 했다.

‘사람들을 지킬게요.’

그와 반대로 눈투성이는 자진해서 비전투 인력이 모여있는 대피소와 앞 내성 입구를 책임질 수 있도록 청했다.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통제해야 하는 특수적인 역할에 합숙 경험이 있는 자신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회색 늑대는 당연히 흔쾌히 수락했으며 그렇게 인선은 배정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또다시 해가 지고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타닥, 탁.

잡목을 모아 만든 화로통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즐겁게 잘 타오른다.

하지만 그런 불꽃과 씨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들의 심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전쟁이 곧 다가온다.

영주님이 도적을 토벌하고 돌아와 환호성을 지르는 그런 행진이 아닌,

인간을 학살하고 잡아먹는 오크를 향해 창을 찔러야 하는 진짜 전쟁이다.

훈련과 실전을 거친 병사들조차 긴장하고 있는데 징병당한 주민들은 오죽할까.

오늘 저녁부터 목책 위에서 대기 중인 이들은 가벼운 잡담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

나는 한동안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자신에게 지급된 창을 넋 놓고 바라보는 청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헉! 충······!”

“괜찮다, 계속 앉아있어.”

깜짝 놀란 청년이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다시 앉히며 비어 보이는 옆자리에 따라 앉았다.

설마 같이 앉을 줄은 몰랐다는 듯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는 청년.

나는 그런 청년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몇 살이지?”

“······아! 수, 수레를 몰 나이는 지났고 다음 달에 약혼자랑 결혼할 예정입니다.”

결혼이라······. 그렇다면 곧 성인이구나.

내 관점에서는 아직 어려 보이는 이 청년은 다음 달이면 약혼자와 결혼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축복했다.

“축하하네.”

“야, 새신랑! 꼭 살아남아라!”

“결혼하면 죽을 맛이니까! 하하하!”

목소리가 적당히 커지지 않는 선에서 청년을 향해 축하와 농담을 던지는 병사들.

역시 곧 결혼하게 될 신랑을 놀리는 것만큼 재밌는 건 없는 모양이다.

마치 시체 더미와 같던 침울한 목책 분위기가 좋은 소식 덕에 많이 좋아졌다.

병사들이 떠들도록 잠시 내버려 둔 나는 부끄러운 듯 붉어진 얼굴로 웃고 있는 청년을 향해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좀 괜찮나?”

“······네, 감사합니다.”

청년은 어느새 흉물처럼 바라보던 창을 소중히 꽉 쥐고 있었다.

자신이 든 이 무기만이 소중한 것을 지킬 유일한 수단임을 안 것이다.

그래, 무사히 살아남자.

나는 청년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쳐준 뒤 다시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밤이 길고 깊다.

한동안 이어지던 두런거림을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 뒤로 고요히 잦아들었다.

목책 위 모인 병사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대로 위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 * *

‘왕이시여, 제 모자람을 압니다.’

어느 날은 답답한 마음을 참다못해 왕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었다.

평생을 수련해도 오러를 습득하지 못한 내게 왜 실망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왕은 이리 대답했다.

‘아니다, 종자야. 오러는 수단이지 결코 가치가 될 수는 없다.’

‘그 수단마저 제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네게는 그 누구보다 빛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천년을 사는 엘프도, 강철을 지배한 오크도 얻지 못한 것이다.’

‘왕께서는 얻으셨습니까?’

‘아니,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보았다. 하지만 보았음에도 얻지 못했느니라.’

왕은 태양처럼 빛나는 검을 휘두르고 인간 시대 중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 위대한 왕조차 내가 가진 것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오직 검을 향했던 노력? 집착? 열등감? 좌절? 도대체 내가 가진 게 무엇인가.

하지만 왕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훗날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이끄는 소중한 등불이 될 테니까.’

왕은 그렇게 웃었다.

땡땡땡땡땡땡땡!!!!

“적이다! 오크 본대가 왔다!”

“- - - - - - - - !!!”

잠에서 깬 나는 급히 눈을 떴다.

그러자 귀를 찢는 경고 종과 함께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는 병사들이 보였다.

젠장, 잠깐 꿈을 꾼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무기를 챙긴 다음 병사들이 뛰어다니는 목책 위로 올라갔다.

파스스스, 파스스.

쿵, 쿵, 쿵, 쿵, 쿵, 쿵.

Whoo! Whoo!

Ewah-ah - - - -!!!!

여명은 산 끝에 걸쳐있다.

하지만 조용해야 할 숲의 수평선은 파스스 흔들리기 시작했고 갑작스러운 소란에 깜짝 놀란 새들은 하늘로 도망쳤다.

진동하는 대지, 들려오는 고함.

오크 놈들이 내뱉는 더러운 전의가 인간이 세운 마을을 정면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웅성웅성.

병사들은 동요했다.

엄청난 오크 본대의 숫자와 그 기세 앞에 순간 전의를 잃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 혼란은 옆쪽 목책에서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로 인해 빠르게 잦아들었다.

“모두 전투준비!!!”

오러가 실린 묵직한 목소리.

수많은 도적과 야만인을 척살하고 이 마을을 세운 위대한 영주 회색 늑대다.

한순간 갈피를 잡지 못하던 병사들은 순간 깜짝 놀라 입을 헤 벌렸다.

그리고 곧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배정받은 자리로 달려가 창과 화살을 분배했다.

채앵!

역시 회색 늑대다.

나는 안심하며 빠르게 검을 뽑았다.

그리고 내가 지휘해 할 목책을 향해 뛰어가 대열을 이룬 병사들에게 외쳤다.

“방패를 더 들어 가슴과 안면을 가려라! 하반신은 목책이 충분히 가려줄 것이다!”

“궁수 부대- - -!! 발사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 시위를 놓지 마라!”

투둥! 투둥! 둥! 둥!

오크 본대는 멈추지 않고 진군한다.

그리고 동시에 전쟁 북을 맹렬하게 두드리며 공격 진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놈들이 들고 온 수많은 나무 사다리와 금방이라도 정문을 부술 듯 옮겨지는 양 머리 공성추도 시야에 들어왔다.

꿀꺽.

누군가 마른 침을 삼켰다.

아무리 이겨내려 해도 막강한 오크 군대를 향한 두려움이 몰려온 것이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다.

여기서 내가 겁먹고 도망친다면 가족과 이웃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용기란 비로소 지킬 때 나온다.

나는 목책 위를 부지런히 걸어 다니며 마음을 굳게 먹은 병사들과 호흡을 같이 했다.

그러자 한참 공격 진형을 이루던 오크 놈들이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척.

휘날리는 오크 깃발,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울부짖는 오크 전사들.

검은 무리와 목책의 거리는 서서히 가까워지며 시끄러운 워크라이가 사방을 메웠다.

하지만 회색 늑대의 마지막 외침은 그런 워크라이마저 집어삼켰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 - - -!!!!!!!!!!!”

뿌우우우우우우우 - - - - -!!

청아한 뿔피리가 숲을 강타한다.

궁수들은 이를 악물며 활시위를 당겼고 지휘관의 신호를 기다렸다.

한걸음, 한걸음, 그리고 또 한걸음.

놈들이 온다,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머지않은 순간 산맥에 걸쳐있던 여명이 깨진 달걀처럼 빛을 흘려보냈다.

나는 눈부신 세상 위로 검을 추켜들었다.

“발사!!!”

“발사아아아아 - - -!!”

“궁수 부대 발사하라!!”

푸슝! 퓨웅!

촤아아아아아악!

일제히 발사한 수많은 화살이 마치 소나기처럼 목책 아래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제히 달려오던 오크 놈들은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끄아아아악!”

“죽어, 이 새끼들아!”

하지만 겨우 화살 한 번으로는 앞서 달려온 놈들밖에 떨쳐내지 못했다.

나는 궁수들을 향해 자유 사격을 명령했고 이내 투창을 부지런히 잡아 날렸다.

푹! 푸욱!

병사들이 날린 화살과 묵직한 투창이 놈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것은 아무리 두꺼운 갑옷을 입었다고 한들 완벽히 막을 수 없었고 놈들은 뒤엉키고 넘어지며 바닥에 피를 뿌렸다.

놈들이 당황한 게 보인다.

나는 최대한 화력이 집중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벌써 4번째 투창을 던졌다.

하지만 그 지형적 우세도 이내 뒤이어 들려온 고함으로 인해 멈춰버렸다.

“크워어어어어!!”

“Ewah-ah!!!”

“사다리다! 사다리가 왔다!”

놈들이 데려온 궁수들이 방패 뒤에 숨어 목책 위로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방패를 든 사이 대열 뒤로 사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개수만 해도 무려 수십 개.

놈들은 목책을 아예 넘어버릴 생각인지 사다리를 빠른 속도로 옮겨왔다.

하지만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날아오는 화살을 빠르게 쳐낸 나는 뒤에서 대기 중인 병력을 향해 외쳤다.

“뜨거운 물을 가져와라!”

마을 아낙네들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밤새 관리해 만든 뜨거운 물이다.

내 지시를 듣자마자 병사들은 무거운 솥을 옮겨 목책 위로 가지고 왔다.

“부어버려!”

“으랴차!”

지체할 것 없다.

솥을 세운 병사들은 사다리가 걸리기 전 뜨거운 물을 아래로 부어버렸다.

치이이익!

“크아아아악!”

사다리를 들고 오던 오크 놈들이 그대로 뜨거운 물을 뒤집어 써버린다.

비록 끓인 기름이 아니라 아쉬웠지만, 이 또한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덜컥! 덜컥!

“도끼 가져와!”

“밀어내!”

끓인 물이 가지 못한 목책에선 끝에 걸린 사다리를 열심히 밀고 도끼로 부쉈다.

쉴 틈 없이 날아가는 화살과 사다리를 막아주는 유기적인 움직임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균형에 힘을 더해준 것이다.

됐다, 이대로만 가면 된다.

나는 필사적으로 싸우는 병사들을 고취하며 목책 위에 걸린 사다리를 베어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 망루에서 열심히 시위를 당기던 병사 하나가 다급히 외쳤다.

“옵니다! 공성추가 옵니다!”

“- - - - - -!!”

공성추라는 말에 다급히 시야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공성추를 나눠 든 오크들과 튼튼한 방패 벽이 있었다.

아무리 활을 쏘고 투창을 던져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방패 벽.

나는 목책 위를 밟고 정문 위로 뛰어갔다.

타닥!

그리고 한 치 망설임 없이 놈들이 세운 방패 벽 위로 몸을 날렸다.

“기사님!”

병사들은 경악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오크들 또한 넋 놓고 내가 떨어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서걱!

하지만 검에 의해 갈라진 것은 이 알량하고 늙은 몸이 아닌, 오크 놈들을 보호해주던 두꺼운 강철 방패였다.

휘두른 검이 동토의 여명처럼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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