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검은머리 기사왕 34화
때 이른 동이 텄다.
그리고 하늘 위 떠오른 햇살 아래 멀쩡히 살아남은 오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면전으로 각오하고 무기를 뽑았던 군대가 기어코 놈들을 섬멸시킨 것이다.
하지만 대열을 정비해 복귀를 시작한 우리는 섣부른 승리의 함성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승전 아래 엄숙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 내 옆을 지키다 죽은 전우와 부상병을 마을로 데려갈 뿐이었다.
“끄아아악, 아아악!!”
“조금만 참아, 이놈아!”
이제는 병사가 된 대원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청년을 온몸으로 눌렀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오크 화살을 뽑아내며 샘솟는 피를 지혈한다.
얼마나 깊숙이 박혔는지 상처 부위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핏물.
청년은 마을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지만,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가져다준 참혹한 광경.
칼로 벤 상처만큼이나 아픈 것은 내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전우가 고통받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같은 소속이었던 병사 하나가 눈물을 흘리며 피투성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맨정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기에는 전쟁 후 몰려온 스트레스가 너무나 짙었다.
“무리하셨습니다.”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내 앞으로 어느새 다가온 푸른 손이 붕대를 가져와 상처를 닦아주려 했다.
한참 난전 속에서 오크 놈들과 싸우느라 눈먼 무기에 베이고 만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깨끗한 붕대를 거부하며 수통 속 물로 상처를 대충 씻어냈다.
겨우 이런 상처로 붕대를 사용하기에는 앞으로 사용할 곳이 너무 많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붕대를 다시 집어넣는 푸른 손을 향해 물었다.
“도주한 놈이 있나?”
“아뇨, 전부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 오크 놈 시체에 본대와 주고받은 서신이 있더군요. 벌써 멀지 않은 곳까지 진군했습니다.”
됐다, 위치를 알아냈다.
이제 놈들 본대가 있는 그 근방으로 정찰을 보내 앞으로 어떤 움직임을 취할지, 언제 공격할지 확인만 하면 된다.
때는 오늘 밤이 적당하다.
회색 늑대가 오기 전 충분한 전쟁 여건을 만들어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병영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빠른 걸음으로 뒤를 따라온 푸른 손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경, 기뻐하지 않으시는군요.”
“······기뻐하다니?”
“무려 야전에서 오크를 이긴 겁니다. 경도 아시잖습니까? 엄청난 승리입니다.”
병사들은 민병 수준이었고 동원된 허스칼은 잘 쳐주어 봐야 1~2년 차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족한 전력으로 전쟁을 업으로 삼는 오크 정찰대를 전멸시켰다.
그것도 유리한 수성전이나 매복이 아닌 양쪽 진영이 맞부딪히는 야전에서 말이다.
그래, 참 잘 싸워 이겼구나.
나는 승리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늙는가 보군.”
눈투성이와 만나고 두 차례 전장을 겪었다.
그리고 그 두 차례 전장에선 내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었고 항상 선두에 섰다.
영광스러운 승리.
함성을 지르는 군대.
이 모든 요소는 내가 종자였던 시절 수없이 치러왔던 전쟁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받는 느낌은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아, 그래.
검이 녹슬 듯 부러지는 검도 녹슬었다.
나는 까끌까끌한 수염을 만지며 새삼 신념 위로 지나가 버린 세월을 실감했다.
마치 두꺼운 책을 넘겨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또 다른 장을 연 기분이다.
나는 푸른 손을 향해 물었다.
“혹시 가정이 있나?”
“음, 아직은 없습니다.”
“좋은 상대가 있으면 이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떠도는 것도 이제 지겨우니.”
나처럼 죽이는 자가 있다면 단란한 가정처럼 소박한 행복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점을 새삼 깨달은 나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만약 하나만 낳는다면 딸이 좋겠군.”
“······그렇습니까?”
“그래.”
푸른 손은 참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전멸······, 했다고?”
분명 어제 먼저 출발한 정찰대가 마을 위치를 확인했다는 전령을 보냈었다.
티그르는 당연히 기뻐하며 그 공적을 칭찬했고 속히 본대로 복귀해 합류하라는 명령을 그들에게 내렸었다.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온 전령이 정찰대가 있었던 위치에서 까맣게 타버린 시체 더미를 발견한 것이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전멸.
티그르는 순간 몰려오는 아찔함과 분노를 참지 못해 의자를 내려쳤다.
쾅!
지금은 전사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때다.
그런데 자신이 부리는 전사 중 정예라고 볼 수 있는 정찰대 전원이 죽어버렸으니,
가뜩이나 빈약한 숙영지 전력에 커다란 공백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이 씹어 죽여도 모자랄 인간 놈들.
그나마 남아있던 자존심마저 생존을 위해 포기했던 티그르는 인내하기를 포기했다.
“내 갑옷과 검을 가져와라!”
“예!”
우습게 보았던 놈들 전력이 드러났다.
하지만 아무리 정찰대를 전멸시켰다고 한들 자신에게는 아직 본대가 남아있었다.
마을 위치라 알려진 장소까지 거리는 속보로 행군을 시작한다면 불과 이틀.
명예롭게 죽지 못한 형제들을 위해 쓸개를 씹기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갑옷을 입고 거대한 검을 챙긴 티그르는 뜨거운 콧김과 함께 천막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대기 중이던 각 서전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레그나! 노예들을 시켜 사다리를 만들어라! 놈들 마을로 도착하는 즉시 공성한다!”
“예, 티그르!”
“오그라! 너는 기병들을 끌고 도망치는 인간들이 없는지 확인해라!”
“알겠습니다, 티그르!”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많은 인간의 목을 소금으로 절여 자신을 무시한 형제들에게 당당히 제 능력을 보여줄 것이다.
당당히 앞으로 걸어간 티그르는 어느덧 진군 준비를 끝낸 수많은 전사를 바라보며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계속 진군한다! 하찮은 인간 놈들에게 진짜 전쟁이 무엇인지 보여 줄 시간이다!”
Whoo! Whoo!
Ewah-ah - - - -!!!!
강철로 만든 두꺼운 갑옷, 살점을 통째로 짓뭉갤 것 같은 육중한 무기.
수백마리 오크가 내지르는 워크라이는 조용하던 북방을 진동시켰다.
척, 척, 척, 척.
각 위치로 이동한 서전트들이 자신이 이끄는 부대를 선두로 진군을 시작한다.
그 속도는 그동안 기민한 움직임으로 이동하던 본대가 아닌 적 진영을 금방이라도 휩쓸 것 같은 녹색 물결이었다.
1년 뒤라 예상했던 북방인과 오크의 전쟁 서막은 조금 이르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마을에서 출발한 인간 정찰대는 오크 본대의 진군을 확인했다.
* * *
“······숙영지 전체를 데리고 왔군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놈들이 가지고 있던 서신을 바탕으로 본대가 진군하는 경로를 추측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파견한 정찰대가 진군 중인 오크 본대를 포착했는데 그 숫자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총 규모로 따지면 숙영지 전체.
머릿수로만 우리 병력의 3배가 넘는다.
그것도 하나 같이 강철 무기로 무장한 숙련된 오크 전사들로 말이다.
“하, 맙소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순찰 대장이 아찔하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는다.
경험 많은 그가 이렇게 반응할 정도인데 주민들과 병사들은 어떠하겠는가.
분명 오크 본대가 목책을 포위한다면 패닉 상태에 빠질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듯, 북방 인간에게 후퇴란 죽음뿐이었다.
나는 푸른 손을 향해 물었다.
“화살은 얼마나 있지?”
“거의 반년 치가 쌓여있어서 충분합니다. 촉이 달린 투창도 넉넉하고요.”
“주민들은?”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요. 그들도 여기가 무너지면 끝인 걸 알 겁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마을을 발전시킨 회색 늑대가 그간 전쟁 준비를 착실하게 해왔다는 것이다.
1년간 열심히 보수해온 튼튼한 목책과 온종일 쏘아도 충분한 화살과 투창.
아무리 적이 많고 강대하다 할지라도 지형이 익숙한 터전 위 수성전이다.
이 전쟁, 충분히 가능성 있다.
나는 한껏 숨을 들였다 내쉬며 회관에 모인 이들을 향해 단호히 외쳤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창을 들 수 있는 모든 주민을 징집하고 비전투 인력은 회관으로 피신시키세요.”
한마음으로 한뜻으로 뭉치지 않는다면 결집력은 순식간에 와해 될 것이다.
나는 주민 징집과 식량 징발을 지시하며 마을 전체가 전시 체제를 갖추게 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우리는 왼쪽 가슴 위에 주먹을 올리는 경례를 끝으로 마지막 회의를 끝냈다.
하지만 그 순간 정적만이 가득하던 회관 밖에서 소란스러운 함성이 들려왔다.
“영, 영주님이다!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와아아아아 - - - !!”
오직 절망적인 소식만이 가득하던 마을에 처음으로 기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내일이나 도착할 줄 알았던 회색 늑대와 제자들이 하루 일찍 산맥을 빠져나온 것이다.
덜컹!
갑작스러운 함성에 깜짝 놀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회관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어느덧 몰려나온 주민들 사이를 해치고 지나가 방금 열리기 시작한 마을 정문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끼리리리릭, 쿵!
초병들은 잠시 꺼두고 있던 횃불을 환히 밝히며 돌아온 영주를 반겼다.
하지만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회색 늑대가 아닌 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이 중 가장 작고 당찬 눈투성이의 그림자였다.
다행히 무사했구나.
나는 제 발로 열심히 걸어오는 눈투성이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스승님!!”
아서라, 그러다 넘어지겠다.
내가 눈투성이를 발견했듯 눈투성이 또 한 마중 나온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람쥐처럼 잽싸게 달려와 옷깃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후우, 후우······.”
나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숨을 몰아쉬는 아이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밤하늘을 밝히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무언가를 잔뜩 말하고 싶은지 연신 달싹이며 오물거리는 입술.
비록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회색 늑대와 함께 떠났던 수련은 아이의 기운을 더욱 총명하고 맑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던 눈투성이는 결국 내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스승님.”
“그래.”
다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나는 이제야 웃기 시작한 눈투성이를 쓰다듬어주며 그간 쌓인 걱정을 털어냈다.
그러자 주민들이 내뱉은 함성 사이로 회색 늑대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바뀌지 않은 위풍당당한 모습 그대로였다.
순간 웅성거림이 거짓말처럼 잦아들며 회색 늑대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부러지는 검.”
“······회색 늑대.”
사실 그에게는 책잡힐 게 많았다.
비록 마을이 위기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가 가진 권한을 잠시 대행하고 내 입맛대로 다룬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원칙을 중요시하는 회색 늑대, 경우를 따져가며 넘어갈 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순찰 대장과 푸른 손을 나를 변호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다.
“영주님! 생각하신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그만, 알고 있다.”
회색 늑대는 단호하게 손을 들어 그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려온 안타까운 탄식이 지금 현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결국, 추방인가?
나는 마음을 굳게 먹으며 불안해하는 눈투성이를 조용히 토닥여주었다.
괜찮다. 각오하고 한 행동이다.
일을 잘 마무리하지 못하고 떠나는 현실만이 조금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고맙다.”
“·········뭐?”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그 모든 체념을 부숴버리기 충분했다.
깜짝 놀라 바라본 그곳에는 회색 늑대가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네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정말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을 거다. 정말······, 정말 진심으로 고맙다, 부러지는 검.”
그동안 살면서 쌓아왔던 타인을 향한 편견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편견에는 오랜 세월 색안경을 쓰고 보았던 회색 늑대의 모습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해야 했던 이유를 이해하고 처음으로 융통성을 발휘한 회색 늑대.
우리 사이를 미묘하게 막고 있었던 벽은 마치 얇은 유리막처럼 흔들렸다.
“- - - - - - -.”
나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차분한 늑대의 눈동자에서 마을과 주민들을 아끼는 진심 어린 마음을 보았다.
1년간 네가 꾸렸던 이 정착 생활이 단순한 유희나 욕심 때문이 아니었구나.
‘나도 늙었나 보군.’
한때 전장을 호령했던 영웅은 사라지고 어느새 늙어버린 기사만이 남았다.
하지만 흘러간 세월은 육체의 기억만을 가져갔을 뿐이지, 북방을 활주하던 이 뜨거운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영웅이기 전에 북방인이였던 회색 늑대가 나를 향한 예를 표했다.
그리고 두꺼운 손을 내밀며 부탁했다.
“도와달라 할 면목이 없다. 하지만 마을과 사람들을 위해 한 번만 더 검을 빌려다오.”
그래, 우린 그렇게 뭉쳤었지.
세상에서 도태된 이 북방 위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겠다는 듯 대의 아래.
나는 그간 늑대와 쌓아왔던 설움과 오해가 찾아온 봄처럼 사르르 녹아감을 느꼈다.
쿵!
손을 뻗어 맞잡았다.
그리고 그리웠던 그 날처럼 어깨를 부딪치자, 지난 8년간 잊고 있었던 북받치는 감정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