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검은머리 기사왕 33화
어제 하루, 정신없이 일과를 보냈던 나는 늦은 밤이 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피곤이 채 풀리기도 전 호출을 받고 일어나야 했는데, 상황이 너무 급하다고 전달을 받은지라 검만을 챙겨 나가야 했다.
아직 여명조차 찾아오지 않은 이른 새벽.
빠르게 달려간 마을 광장에는 많은 이들이 원형을 이룬 채 모여있었다.
“모두 진정들 하시오! 이 아이 잘못이 아니지 않소! 어허, 거기 그만!”
“잘,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저희 아버지 좀 구해주세요.”
울음, 좌절, 원망, 분노.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들려오는 시끄러운 고성이 내 신경을 자극했다.
시선을 내렸다.
광장 중앙에는 한 아이가 엎드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광장에 모인 주민들은 그런 아이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활화산 같은 분노보다는 허탈함과 원망이 섞인 한탄이었다.
불안함을 느낀 나는 대열 속으로 살며시 들어가 순찰 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아이는 누구고 사람들은 왜 이리 모였는지······.”
“아······! 오셨습니까!”
순찰 대장은 급히 달려온 나를 반겼다.
하지만 그 반가움도 잠깐뿐일 뿐, 그의 얼굴은 이내 천천히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내게 말했다.
“오크 놈들이 농경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분명 무장한 전사들이랍니다.”
“올 게 왔군요. 누가 발견했습니까?”
“······외지로 나가 있느라 소식을 듣지 못한 주민이 있었습니다. 지금 농경지에 이 아이 아버지가 붙잡혔답니다.”
웅성웅성.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순간 생길뻔한 동요를 빠르게 가라앉혔다.
하지만 주변에 모인 이들은 그렇지 않은지 시끄럽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 - - - - -.”
원망이 아이에게 쏟아진다.
조금 전 휘몰아치던 감정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사람들 눈동자에 담겼다.
만약 급히 달려온 대원들이 없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집단 린치를 당했을 것이다.
나는 순찰 대장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다른 가족들은 어디 있습니까?”
대중은 생각하길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을 위험에 빠트린 이 아이를 향해 분노하고 싶은 게 뻔했다.
하지만 당장 이 많은 주민을 설득할 수는 없으니 분위기를 달래는 척을 위해서라도 대처를 보여주어야 했다.
“······몰래 회관으로 데려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역시 경험 많은 순찰 대장이다.
그는 주민들 기분도 고려하면서 억류라는 명분으로 가족들을 분리했다.
참 상황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동시에 억울했지만, 지금은 일단 파탄이 나버린 현 상황을 수습하는 게 가장 급했다.
저 멀리 허스칼이 보였다.
“다들 자택으로 돌아가시오!”
“모여있지 말고 흩어지세요!”
적절할 때 와주었다.
허스칼들은 주민들을 빠르게 해산시키며 어수선해진 치안을
그리고 순식간에 흩어지는 주민들 뒤로 푸른 손이 빠르게 걸어왔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광장 한가운데 엎드린 아이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었을 텐데, 주민들이 흥분했군요.”
흥분한 주민들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이 아이가 뭘 알고서 그랬겠는가.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동의하며 현장에 가장 먼저 온 순찰 대장을 향해 물었다.
“규모는 확인했습니까?”
“워낙 어두워서 제대로 확인을 못 했답니다. 전면전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찰 대장과 푸른 손은 사실상 오크들과 전면전을 고려하고 있었다.
아이 아버지가 인질이 붙잡혔다는 것과 그 위치가 농경지였다는 사실상 마을 위치를 들켰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발견 당시 그 근방이 어두웠다는 건 놈들이 횃불을 끄고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다.
피 터지는 전면전을 명예로 아는 놈들이 그러는 이유는 대부분 한가지였다.
“정찰대가 먼저 온 게 분명합니다.”
“·········정찰대 말입니까?”
“예, 확신합니다. 원래 놈들은 정찰을 저런 방식으로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찰과 놈들이 생각하는 정찰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아무리 정찰대라 할지라도 그 규모가 만만치 않은 오크 정찰대 놈들은 약탈과 전투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있었다.
아마 우리 마을 위치를 확인한 뒤에도 높은 확률로 주변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돌아가기 전에 죽여야 합니다.”
듣기로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했다.
지금 급히 채비를 갖추고 출발한다면 충분히 놈들을 섬멸할 수 있다.
내가 전장에서 배운 전략 전술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바로 즉각적이고 철저한 대응.
놈들이 주민을 인질로 잡아 위치를 알아냈다면 우리는 놈들을 철저하게 말살하고 본대 위치를 알아낼 것이다.
“믿겠습니다.”
“조장! 지금 당장 허스칼을 집합시켜!”
하나하나 따지고 볼 겨를이 없다.
나를 신뢰한 순찰 대장은 바로 수긍했고 푸른 손 또한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다들 움직여!”
“서둘러, 빨리! 빨리!”
바삐 뛰어다니기 시작한 허스칼들과 집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는 주민들.
마을 주변에는 감히 형용 못 할 전운이 먹구름처럼 감돌고 있었다.
“흐윽, 흑······.”
“- - - - - - - -.”
그리고 모두가 각자 정해진 위치로 떠난 광장 한가운데 선 나는 무장을 위해 서둘러 자택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 스쳐 지나가는 눈길 사이로 여전히 엎드린 아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서우면서도 억울했는지,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리며 떨고 있는 소년.
신발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맨발은 흙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복잡한 감정을 뒤로 숨긴 채 옷을 벗어 아이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전운이 감도는 마을을 가로질렀다.
* * *
“끄으으, 으그윽······!!”
쑥대밭이 된 농경지와 멀지 않는 숲에는 인질로 붙잡힌 아이의 아버지가 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고 있었다.
이미 부서져 버린 팔다리와 성치 않은 몸. 잔혹하기로 유명한 오크답게 포로를 향한 고문 또한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에선 흘러나오는 것은 살려달라는 구걸이 아닌 무거운 비명뿐이었다.
“인간 잡종치고는 질기군.”
원래라면 겁에 질린 인간이 마을 위치는 물론이고 자기 집 새끼가 몇 명인지도 전부 토해내야 정상이었다.
허나 이놈은 무슨 귀신에 씌었는지 아무리 고문을 해도 위치를 토해내지 않았고 결국 오크 전사는 짜증으로 질려버렸다.
“흐으으, 흐······.”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여기서 다 말해버린다면 도망친 아들은 물론이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전부 위험해져 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이가 뽑히고 발가락이 잘리는 고통 속에서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고 자신이 빨리 죽기만을 신에게 기도할 뿐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굳센 의지는 참혹한 현실 앞에선 한낱 헛수고에 불과했다.
“도망친 인간은 잡았나?”
“크륵, 전사를 뽑아 흔적을 쫓고 있습니다. 아마 마을로 돌아갔으면···.”
“위치를 알 수 있겠군.”
참으로 희소식이다.
두꺼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은 오크 전사는 침과 피를 질질 흘리는 인간 남자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마을을 찾는 건 시간문제다.
가뜩이나 질긴 놈 때문에 짜증이 났는데 이제 속 시원하게 치워버릴 수 있다.
바닥에 걸쭉한 침을 뱉은 오크 대장은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발로 차며 말했다.
퍽!
“목은 잘라 장대 위에 꽂고 남은 사지는 늑대들 먹이로 줘라.”
오크는 고귀한 명예를 모른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입을 열지 않는 인간은 그저 귀찮은 놈일 뿐이었다.
입으로 담기도 힘든 잔혹한 처사.
정신이 흐릿한 상황 속에서 남자는 죽음이 자신을 천천히 찾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털썩, 질질질질.
명령을 받은 오크는 귀찮다는 얼굴로 도끼를 쥐고 남자를 뒤로 끌고 갔다.
그리고 목을 꽂아 둘 장대를 내려놓은 뒤 남자를 바닥에 쓰레기처럼 집어 던졌다.
“흠!”
단순한 도축에 불과하다.
남자가 세월을 견디며 겪었던 모든 경험과 기억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다.
도끼를 들어 올리는 오크 전사.
짙은 어둠 사이로 날카로운 도끼날이 단말마와 같은 마지막 빛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방황하는 현실을 남자의 목을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떨어진다.
후웅!
처음으로 돌이킬 수도 그렇다고 쉽게 털어낼 수도 없는 이 지독한 후회.
남자는 그렇게 떨리는 눈을 감으며 죽음으로서 평안을 얻으려고 했다.
서걱!
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았던 광경 위로 처음 보는 핏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그것은 두려운 악마와도 같던 오크 놈의 더럽고 추악한 초록색 피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꿈인가?
남자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뒤 풍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화르륵!
동시에 어두웠던 숲에서 수십 개가 넘는 횃불과 깃발이 들어 올려졌다.
그 깃발은 섬멸해야 할 적을 노리고 있는 회색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이었으며 횃불은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의지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며,
인간 대의를 위해 무기를 든 자들.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오크 전사들과 단 한 치 물러섬 없이 싸웠던 허스칼이 수년이 지난 오늘 다시 한번 깃발 아래 뭉쳤다.
그리고 오크의 목을 순식간에 베어버린 기사는 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며 읊조렸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척, 척, 척, 척.
그 숫자는 끊임없이 늘어난다.
하나 된 발소리는 마치 거인의 심장 박동 같았고 수많은 투구는 급히 흐르는 강물처럼 횃불 아래 일렁였다.
몸이 천천히 뜨거워졌다.
심장이 뛰어 미칠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앞을 향해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모든 열기를 등진 부러지는 검은 오크 놈들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로 뚜벅뚜벅 올라가 일갈했다.
“허스칼!”
스릉!
철컥! 스릉!
모든 인간이 무기를 뽑았다.
오크들은 서둘러 달려오다 넋을 잃었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곳은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자, 놈들이 묻힐 차가운 무덤이니까.
기사가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적을 섬멸하라!”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무기를 뽑은 허스칼과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당황한 오크들은 서둘러 대응해보려 했지만, 그 맹렬한 기세 앞에 마치 급류 아래 흙들처럼 파스스 무너져내린다.
하지만 단연코 눈에 띄는 흐름이 있다면 바로 전설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자 전장을 나선 부러지는 검이었다.
바위 위에서 뛰어내린 부러지는 검은 한 치 망설임 없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콰직!
서걱!
오크의 목이 마치 나무처럼 베이고,
수십 마리 놈들 사이에서도 한 치 흐트러짐 없는 검술을 펼치는 그.
횃불 위 타오르는 불씨를 따라 휘둘러지는 검날은 마치 한 폭의 춤과 같았다.
으아아아아아 - - -!!!
전의는 마약이다, 흥분은 동화된다.
마치 자신이 세상을 쓸어버리는 급류 그 자체가 된 것 같은 병사와 허스칼들은 부러지는 검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치열한 난전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벗어날 수 없는 난전 속에서 오크들은 처음으로 절망했다.
인간 놈들은 하찮고 약하다.
하지만 한 놈을 죽이면 또 한 놈이 달라붙고 또 한 놈을 죽이면 또 다른 두 놈이 달려들어 도끼를 휘두른다.
이 광경을 어디서 보았던가.
그래, 기필코 터전을 지켜야 하는 개미들이 포식자를 물어 죽이던 그 모습 아닌가.
하지만 이 위협을 본대에 알리기도 전, 숲으로 도망치던 오크 대장은 목이 잘렸다.
서걱!
전면전을 알리는 피비린내가 평화롭던 북방 오지를 차갑게 적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