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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32화 (32/181)

32화

검은머리 기사왕 32화

컹컹! 컹!

늑대가 거칠게 짖는다.

그러자 오크 전사는 강철로 만들어진 목줄을 완전히 놓으며 놈이 방금 맡은 냄새를 따라갈 수 있게 명령을 내렸다.

아우우우 - - -!!

목줄이 풀린 늑대들은 난리가 났다.

이곳과 멀지 않은 장소에서 자신과 동족인 늑대들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쏜살같이 앞으로 뛰쳐나가 마치 개처럼 냄새를 쫓기 시작하는 늑대들.

그런 놈들이 도달한 장소는 무너진 전초기지와 타버린 늑대시체 더미가 있었다.

오크 전사가 콧김을 내뱉으며 외쳤다.

“크륵, 여기다!”

컹컹! 컹!

화르륵!

수많은 횃불이 숲 사이에 나타난다.

깜짝 놀란 동물들은 사방으로 도망쳤고 흙바닥에는 커다란 오크 발이 찍힌다.

이 평화로운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철과 진한 피의 냄새를 뿜는 오크 전사들.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온 놈들이 기어코 북방 오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횃불을 높게 들어 올린 오크 전사 하나가 무너진 전초기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인간 놈들 흔적이군.”

“크흐흐, 티그르님 말이 맞았어.”

크게 돌아갈 것도 없이 강 상류를 따라 올라온 오크 전사들은 갑자기 반응하기 시작한 늑대들을 따라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지난 행군 중 사라졌던 늑대들의 흔적이 있었고,

그 흔적 끝에는 인간과 늑대 놈들이 교전을 벌였던 전초기지가 남아있었다.

늑대와 싸워 이긴 것 같은데 아무리 태워 지우려 해도 그 흔적은 남는 법이다.

족장 티그르 말대로 이 부근에는 인간 놈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 근방이군. 흔적은 이어지나?”

“아니, 끊겼다. 노련한 전사가 있어.”

하지만 아쉽게도 전초기지에서 이긴 인간 놈들은 이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노련한 전사가 그들을 인솔한 듯 깔끔하게 지워진 것이다.

노련한 인간 전사, 커다란 마을.

오크 정찰병들은 큰 사냥감을 찾았다는 생각에 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티그르님께 알려야 하나?”

“크륵, 그래. 전령을 먼저 보내. 분명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전해라!”

“흐흐, 기뻐하시겠군.”

오크 종족은 민간인과 전투 인력인 전사의 구분이 희미한 편이다.

그만큼 많은 인원을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기에 한낱 정찰대 규모 또한 상당했다.

거기다 늑대까지 데려왔으니 이 근방에서 인간 마을을 찾는 건 시간문제겠지.

두꺼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은 오크 전사는 바닥에 걸쭉한 침을 뱉었다.

“길이란 길은 전부 점거해라! 보이는 족족 전부 잡아 들여 마을 위치를 찾아!”

오크들은 하늘을 향해 환호했다.

곧 다가올 전쟁은 놈들을 흥분시켰다.

* * *

타닥, 탁.

빛 한점 들지 않은 어두운 산맥.

은신처로 쓸만한 동굴 앞에는 작은 모닥불과 함께 사람 셋이 누워있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강행군 끝에 결국 회색 늑대가 적당히 불을 피할 장소를 골라 휴식을 취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모르고 잠이 든 보리 이삭과는 달리 눈투성이는 모닥불을 등진 채 고요하고 깊은 명상에 빠져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깊은 호수 같았고 막 쌓이기 시작한 눈더미 같았다.

살며시 눈을 뜬 회색 늑대가 말했다.

“······앞으로 3시간 뒤면 새벽이다. 지금이라도 자두는 게 좋을 거야.”

따지고 보면 신체적, 체력적으로는 보리 이삭이 눈투성이보다 뛰어나다.

하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눈투성이는 이런 힘든 행군 뒤에도 제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다스리고 있었다.

눈투성이가 대답했다.

“조금만 더 하면 끝이 납니다, 경.”

“끝까지 스승이라고는 부르지 않는구나. 방금은 조금 섭섭했다.”

“············.”

“농담이다.”

회색 늑대가 처음 보리 이삭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은 바로 놀라움이었다.

과거 영웅이라 불리기 충분한 자질을 한낱 화전민 아들에게서 발견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회색 늑대는 이것을 당연히 기회라 여겼고 평생 처음으로 제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열심히 검술과 오러를 가르쳐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올 부러지는 검에게 보리 이삭을 소개하고자 했다.

자, 이 아이는 어떠냐.

내가 직접 가르친 제자다.

하지만 참 야속하게도 그런 1년간 노력과 기대는 전부 헛수고로 변해버렸다.

‘눈투성이.’

제 스승인 검성을 그대로 빼다 닮은 검술, 가르쳐주면 가르쳐주는 족족 물처럼 흡수해버리는 타고난 오러 재능.

하지만 그런 재능보다 대단한 것은 아이는 성취를 이뤘음에도 만족하지 않았고 끝을 볼 때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 재능과 노력은 오로지 정의와 대의만을 향하고 있었다.

정말 그 이름을 닮아 순수한 아이.

마치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 신념을 관철하려는 듯 부러지지 않는 심지.

보면 볼수록 기특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 또한 강한 끌림으로 느꼈다.

그것은 기사왕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오묘한 기분과 상당히 유사했다.

‘아니다.’

하지만 회색 늑대는 그런 기분이 들면 들수록 강하게 부정하고 싶었다.

보리 이삭이 요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해도 1년간 쌓아온 유대감은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여전히 제자 보리 이삭을 향한 의무를 다할 것이고 기사로서 장성해 제 몫을 다할 때까지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나이를 먹은 어른으로서 눈투성이에게 조언하고 싶었다.

“그 누구도 아닌 부러지는 검이다. 겨우 오크 따위한테 당할 사람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움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아니다.

아무리 강한 척 해봐도 그 나이에는 그 나이에 맞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회색 늑대의 예상이 맞았는지, 조금 전까지 별 동요 없던 눈투성이가 오른쪽 어깨를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등지고 있기에 앞모습이 어떤지는 모른다.

하지만 회색 늑대는 굳이 알지 하려 않았기에 하늘을 보며 눈을 감았다.

“네 스승은 너를 믿고 있을 거다. 그러니 너도 스승을 믿고 무사히 돌아가자.”

“······네.”

지금은 마을까지 무사히 돌아가는데 모든 신경과 체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야 마음으로 받아들인 눈투성이는 조용히 명상을 끝냈다.

하늘 가득 뜬 별이 지붕이 되었으니,

그 끝을 알 수가 없어 이 땅이 집이구나.

눈투성이는 그렇게 믿으며 부러지는 검과 같은 땅 아래 몸을 뉘었다.

“·········.”

잠이 든 줄 알았던 보리 이삭이 몸을 뒤척이며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 * *

드디어 총대를 잡은 부러지는 검 주도하에 마을 방비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회색 늑대가 워낙 전쟁 준비를 잘해두기도 했고 푸른 손의 합류로 준수한 전투 인력인 허스칼을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넉살 좋은 순찰 대장의 설득으로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한 주민들과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며 주변을 경계하는 병사들.

그렇게 모두가 구슬땀을 흘렸던 하루가 지나고 회색 늑대의 합류가 촌각을 다투는 밤이 서서히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가지 말아야 할 그 시각, 마을과 30분 정도 떨어진 산길에선 망아지가 끄는 수레 하나가 올라오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아버지! 오늘 유난히 조용하지 않아요?”

“그러게,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구나.”

농부인 큰 뿌리와 아들 뱁새눈은 봄에 심을 모종을 구하기 위해 고향이었던 화전민 마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거리가 꽤 멀어 5일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무사히 모종도 구하고 교역으로 큰 이득도 본 농부 큰 뿌리.

수레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줄 재밌는 물건과 간식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마을 근방 산길이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 흔히 산 초입까지 순찰을 다니던 허스칼도 오늘은 보이지가 않았으니까.

뱁새눈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

“예끼, 이놈아! 영주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그냥 다들 한참 봄이라 바쁜 것뿐이야.”

이 주변에서 화전민들을 괴롭히던 도적과 야만인 놈들은 마을의 영주인 회색 늑대가 전부 쓸어버린 지 오래다.

그 위용을 눈앞에서 목격한 적이 있는 큰 뿌리는 회색 늑대를 향한 굳은 믿음을 표하며 아들의 머리를 콩 때렸다.

방금처럼 재수 없는 말을 하면 재수 없는 일이 생기는 법이다.

큰 뿌리는 계속해서 수레를 몰며 유난히 조용한 길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큰 뿌리가 말했다.

“농지 창고에 들렀다가 가자꾸나. 내일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니 모종 좀 내려놓고 농기구도 가져다 수리해야지.”

“네, 아버지.”

시기를 보아하니, 내일부터 마을은 농사일로 한참 바빠질 것이다.

밤이 짙게 깔린 숲길을 부지런히 빠져나온 부자는 그렇게 10분가량을 더 나아가 농경지와 창고 앞에 도착했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끼익!

“자, 나는 모종 주머니를 넣고 올 테니까, 너는 농기구들만 따로 챙겨.”

“네, 조심하세요.”

농경지는 어둡고 조용했다.

한참 동안 주변을 살펴본 큰 뿌리는 수레에서 짐들을 내리며 뱁새눈에게 밭 근처에 두고 온 농기구들을 챙겨오라 시켰다.

앞으로 수확 전까지 자신들을 위해 바삐 일해줄 귀한 몸들이다.

마을 대장간으로 가져가 때 빼고 광내고 새 단장을 시켜줄 것이다.

“휴, 또 나만 힘든 일이네.”

“그럼 늙은 아비가 가리?”

농기구가 무거웠던 뱁새눈은 투덜거린다.

하지만 한 대 더 쥐어박히기는 싫었는지, 농경지를 향해 서둘러 줄행랑쳤다.

5일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집으로 돌아가면 간식 하나쯤은 주실지 모르겠다.

보고 싶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생각한 뱁새눈은 부지런히 농기구들을 주워 담았다.

“- - - - - -?”

하지만 그 순간 짙은 의문 하나가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풀벌레가 왜 울지 않지?’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나니 밤마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이 숲 천지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어두운 밤하늘처럼 고요했다.

뱁새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 창고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덜그럭, 덜그럭.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자.

창고 근처까지 도착한 아들은 아버지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덜컹! 쾅!

“아·········?”

그 순간 굳게 닫혔던 창고 문이 열리며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가 뛰쳐나왔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자신을 향해 찢어지는 목소리로 고함을 내지른다.

“도망가라, 아들아!!! 도망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어둠 사이로 일렁이기 시작하는 수많은 갑옷.

피, 검, 도끼, 콧김, 더러운 침.

그저 어둠 속 두려움 일 줄 알았던 형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어린 뱁새눈은 숨을 제대로 삼킬 수가 없었다.

그림으로만 보던 오크다.

그런 놈들에게 붙잡힌 아버지의 끔찍한 비명은 아직 들키지 않은 자신을 재촉했다.

“끄아아아아아악 - - - -!!”

뱁새눈은 농기구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마을이 있는 방향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가며 눈물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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