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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31화 (31/181)

31화

검은머리 기사왕 31화

“거기서 그러더라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하!”

순찰 대장이 건물이 떠나가라 웃었다.

그리고 벌써 21번째 행정관 흉내를 내며 그날 있었던 일을 재연했다.

반복되는 자랑이 지겨울 법도 하다.

하지만 순찰대가 그동안 받았던 수모가 상당했던 모양인지, 대원들 그 누구 하나 그만하라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위명을 내세우는 행위가 상당히 부끄러웠지만, 이렇게 좋아하고 기뻐하니 감수한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한참 의기투합하던 시간이 지나니 본론을 꺼낼 때가 왔다.

나는 순찰 대장에게 물었다.

“행정관이 이대로 가만히 있겠습니까?”

“죽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야 할 겁니다. 여태 해온 짓도 충분히 추방 감이니까요.”

“그럼 문제는 회색늑대가 오기 전이군요.”

답답하고 짜증났던 마을 내 알력 다툼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기엔 아직 적을 향한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우리가 알아낸 것은 그저 한가지 증거를 통해 외부의 적이 존재한다는 사실뿐,

놈들이 어디 있는지, 얼마나 큰 규모를 가졌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제부턴 치열한 정보전이다.

놈들이 늑대 마을을 발견하기 전, 우리가 먼저 놈들을 발견해야 했다.

나는 이제 한창 의욕이 생긴 것 같은 순찰 대장을 향해 공손히 부탁했다.

“행정관을 압박해서 출입문 통제를 해야 합니다. 한참 농사가 바쁠 시기지만, 마을 안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멱살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꼭 닫아놓겠습니다.”

“그리고 전초기지는 폐쇄하고 따로 정찰병을 꾸리지는 마십시오.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저와 함께 움직입시다.”

회색 늑대와 눈투성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워야 한다.

나는 이 넓은 산맥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지를 추리하고 또 연상하기 시작했다.

오크, 왕국을 멸망시킨 원수이자 인간들을 핍박하고 짓밟았던 악몽.

그런 오크를 상대하게 될 날이 이렇게 빨리 오게 될지는 몰랐다.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이길 수 있을지, 내가 소중한 이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런 불확실성의 불안감과 막강한 적은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지켜야 할 때 비로소 강철처럼 단단해지는 눈투성이가 그 짧은 사이 내게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심어놓았다.

그것은 변화, 그리고 태동.

오랜 실패로 무뎌져 있던 내 마음속 검은 여전히 부러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전운이 감도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투성이의 무사 귀환을 기도했다.

“······어머니 북방을 위해.”

어머니, 당신의 아들과 딸들을 돌보소서.

* * *

후욱, 훅.

눈투성이의 숨이 거칠다.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많이 기른 머리 또한 촉촉하게 젖어있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높은 절벽과 빽빽한 나무를 타고 넘어 마치 한 마리 다람쥐처럼 가파른 허공을 날았다.

오늘도 힘들었던 수련을 끝낸 뒤 개인 정비가 허락되어있던 이른 저녁 시간이었다.

원래라면 스승님이 보낸 편지를 읽고 하루 피곤을 달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오늘 도착한 편지에는 달콤한 간식도,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는 조언도 아닌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크 침공의 전조.

눈투성이는 전서구를 받자마자 서둘러 회색 늑대를 향해 뛰어갔다.

덜컹!

“음, 눈투성이?”

허름한 숙소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지체할 것 없이 문을 열자, 한참 제자들에게 먹일 영약을 다듬던 회색 늑대가 깜짝 놀라 아이를 바라봤다.

항상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던 눈투성이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노크도 없이 불쑥 찾아와 자신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마, 마을에 문제가 생겼어요!”

“뭐? 행정관은 무얼 하고.”

회색 늑대는 오려 수련을 하러 갈 때면 영지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그리고 이번 수련 여행도 어김없이 마을과 관련된 모든 일을 각 권한을 부여한 이들에게 잘 맡겨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눈투성이가 건넨 편지의 발신인은 행정관이 아닌 부러지는 검이었다.

회색 늑대는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안감에 서둘러 편지를 읽었다.

‘오크 침공 전조 발견, 회색 늑대에게 알려 서둘러 마을로 복귀할 것,’

“- - - - - - - -!!”

부러지는 검만큼 오크와 관련된 지식을 갖춘 자는 북방에서 드물다.

그런 그가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면 그곳은 무조건 침공 전조가 맞았다.

오크가 북쪽으로 올라왔다는 건가?

도대체 왜?

회색 늑대는 평소 담담한 모습답지 않게 표정과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만큼 오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북방인에게 남달랐기 때문이다.

덜컹!

“하하, 스승님! 오늘은 술 한잔 어떠십니까? 제가 출발할 때 챙겨온······.”

“눈투성이! 서둘러 짐을 꾸려라!”

“네!”

문을 열고 들어온 보리 이삭이 눈치 없이 술병을 들고 스승을 찾아왔다.

하지만 회색 늑대는 그런 보리 이삭을 가뿐하게 무시하며 벌써 지시를 기다리는 눈투성이를 향해 짐을 꾸리라 외쳤다.

술병을 든 채 당황하는 보리 이삭과 대답을 끝으로 자기 방으로 뛰어가는 눈투성이.

한참 진행 중이던 오러 수련은 그 과실을 맺기도 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쨍그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짐을 챙긴 회색 늑대와 눈투성이가 순식간에 방을 나온다.

그리고 각자 든 횃불에 불을 밝히고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한 보리 이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급히 짐을 챙기려다 술병을 떨어트렸다.

마을과 스승이 위험하다.

* * *

“아니, 이보게! 이렇게 못 나가게 막아두면 올해 농사는 어쩌라는 건가!”

“아이고, 어르신······. 오크 놈들이 주변에 있다니까요! 나가시면 큰일 나요!”

“오크는 무슨 놈의 오크! 내가 이 오지에 평생을 살았는데 오크는 본 적도 없어!”

기본적으로 허스칼 대장 출신인 회색 늑대가 만든 마을은 완벽한 요새였다.

하지만 산맥을 끼고 있는 탓에 농사를 지을 공간이 부족했는데, 회색 늑대는 어쩔 수 없이 영지 외부에 농경지를 만들어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영지 밖을 오고 나가는 것이 일상이 된 농부들.

하지만 오늘 정문은 아침은 평화로운 노동요가 아닌 고성으로 가득했다.

“초롱이 네 이놈! 내가 너를 갓난아기 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이럴 거냐!”

“저도 어쩔 수가 없다니까요!”

행정관을 반나절 넘게 괴롭힌 순찰 대장이 기어코 마을 정문 권한을 얻어냈다.

그리고 전초기지 인원까지 복귀한 다음 날 새벽 우리는 정문 출입을 제한했다.

당연히 주민들은 난리가 났다.

원래 멀리 있는 위험보다 직면한 굶주림이 무섭다고 씨를 뿌릴 중요한 시기에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행정관 어디 갔어! 행정관 불러와!”

“아이고, 이놈들 사람을 치네!”

“너희 대장 저 윗집 살제!? 내가 인마···!”

그렇게 온갖 고성과 추한 몸싸움이 오가며 정말 난리가 난 마을 정문.

하지만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순찰 대원들은 묵묵히 일을 수행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마을 주민 상대로 힘들겠군요.”

“하하, 아닙니다. 겨우 저런 일로 사이가 금이 가면 같은 마을에 못 살았죠. 시간이 지나면 분명 이해해줄 겁니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한참 고생 중인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다른 이들이 그걸 몰라준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상기했다.

“전서구가 무사히 도착했을 겁니다.”

3일만 기다리면 수련을 위해 떠났던 회색 늑대가 마을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조금만 버티면 수월하게 전쟁을 준비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먹구름이 낀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다, 주변 목책과 무기들을 몰래 둘러보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묵직한 병장기 소리와 함께 시끄럽던 고성이 멈췄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소란을 멈추시오!”

“아······!”

정문으로 모여든 주민이 깜짝 놀란다.

그리고 마치 무서운 짐승을 본 사람처럼 우르르 뒤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묵직한 목소리, 험악한 얼굴, 심상치 않은 기세와 날카로운 도끼.

정문 앞 소란을 듣고 몰려온 무리는 바로 전투 집단 허스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문에만 온 것이 아니었다.

바로 뒤에서 그들과 비슷한 기운을 가진 여성 한 명이 천천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순찰 대장이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여긴 왜······.”

“아는 사이입니까?”

“그 사람입니다. 허스칼 부대장.”

아, 순찰 대장과 행정관은 전부 봤지만, 허스칼 부대장은 오늘 처음 본다.

순찰 대장 말대로 붉은 머리 그녀는 마치 게으르지만 노련한 암사자 같았다.

뚜벅, 뚜벅, 뚜벅, 척.

묵직한 병장기를 착용한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와 당당히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사나운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내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기선 제압을 하려는 것일까, 아니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확인하려 하는 것 같다.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유난히 눈에 띄는 그녀의 눈물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전신을 훑던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내가 착용한 검으로 향했고,

그녀는 검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하자마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행정관 말이 틀렸군요. 그런 검과 문양을 만드는 이는 딱 한 사람뿐이죠”

과거 북방 왕국을 위해 싸운 이들이 전부 내 얼굴을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북방군 출신이라면 왕국의 무기를 만들었던 붉은 강철의 상징, ‘모루 문양’만큼은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붉은 강철?”

“예를 표하는 게 늦어 죄송합니다. 오늘 마을로 복귀한 푸른 손이라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부러지는 검.”

이 여자, 북방군 출신 허스칼이다.

어안이벙벙해진 나는 다급히 물었다.

“회색 늑대 밑에서 싸웠나?”

“그때는 제가 막내였는데, 상관들이 다 죽고 나니 선임이 돼버렸네요.”

내가 마을에서 마주친 허스칼 대부분은 마을이 건설되는 시기, 회색 늑대가 직접 훈련을 시킨 후세대들이다.

하지만 설마 그들 사이에 과거 ‘진짜’ 허스칼이었던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북방을 떠돌던 나처럼 그녀 또한 돌고 돌아 다시 옛 전우를 찾아온 것인가.

나는 순간 반가움을 참지 못해 본능적으로 대뜸 오른손을 내밀었다.

쿵.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내 손을 붙잡았고 이내 망설임 없이 어깨를 부딪쳐 과거 북방군처럼 친밀감을 표현했다.

“제가 죽기 전에 정말 전설을 보는군요.”

“하하!”

회색 늑대, 이 나쁜 새끼.

자기 말고 옛 전우가 있었다면 소개나 좀 해주고 떠날 것이지 홀라당 가버렸다.

나는 이 자리에 없는 회색 늑대를 욕하며 푸른 손과 잡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순찰 대장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였소? 근데 왜 저번 주에 찾아오지 않은 거요?”

“행정관 그 작자가 업무를 밖으로 이관시키더니 보고를 고의로 누락시켰더군요. 오늘 마을로 돌아와 처음 알았습니다.”

“······정말 갈 때까지 가려 했군. 나중에 영주님이 알게 되면 어쩌려고.”

전서구를 두고 서로 싸우기 전, 행정관은 허스칼 부대장인 푸른 손과 나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려 한 모양이다.

하지만 운명의 얄궂은 장난으로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그나마 변호 가능성이 있던 행정관은 자기 스스로 무덤을 파버렸다.

미리 소개해주지 않은 덕이라 봐야 하나.

회색 늑대의 무심함 때문에 이 난리가 났는데, 또 그 무심함 덕에 내부를 좀먹는 자를 파낼 수가 있었다.

나는 순찰 대장을 따라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정문을 바라봤다.

“- - - - - - - -.”

한참 시끄럽던 정문은 허스칼들 덕에 서서히 잠잠해지고 있었다.

그러자 주민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리던 푸른 손이 내게 넌지시 본론을 꺼냈다.

“오크 놈들이 온다고 들었어요.”

“음, 곧 회색 늑대가 돌아오니······.”

“기다리면 늦죠. 저희 허스칼도 돕겠습니다. 지시만 내려주십시오.”

자격이 없는 이가 군권을 건든다는 건 영주를 향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영주 직속 부대인 허스칼 전사들을 움직이는 건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푸른 손이 자진하고 나서 우리를 돕는다면 그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투 인력인 허스칼을 동원할 수 있게 된다면 정찰 중 전투는 물론이고 혹시 모를 소규모 국지전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한참을 꼬여있던 불운이라는 실타래가 서서히 풀려나가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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