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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30화 (30/181)

30화

검은머리 기사왕 30화

저녁 늦게 마을로 복귀한 우리는 다친 병사를 막사로 인계한 뒤 순찰 대장에게 급히 상황 보고를 올렸다.

이미 모두가 퇴근한 저녁이라 내일 보고하는 게 옳았지만, 시간을 지체하기에는 내용이 너무나 중요했다.

‘오크가 부리는 늑대가 나타났다.’

당연히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순찰대는 늦은 밤 난리가 났다.

앞뒤 전후 상황과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는 충분했고 애매하다고 말하기에는 전초 기지에서 이미 사상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 일이 심각한 사항임을 충분히 인지했는지, 심각한 얼굴을 한 순찰 대장.

그는 다른 관리자들과 수련을 떠난 회색 늑대를 호출하는 절차를 서둘러 밟았다.

그래, 늦지 않았다.

준비만 하면 대응할 수 있다.

그들에게 현 상황을 전달해 준 나는 안심하고 한발 뒤로 물러나려 했다.

어쨌거나 이곳은 회색 늑대의 마을이고 내가 나서는 것은 월권행위였으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하지만 그것이 내 실수가 될 줄은 몰랐다.

사태를 방관하기 시작한 바로 다음 날 순찰대 행보에 제동이 걸리고 만 것이다.

“왜, 왜 안된다는 겁니까? 오크라고요, 오크! 그냥 넘기면 큰일 나요!”

“젠장! 내가 그걸 몰라? 행정관이 전서구를 틀어막고 안 놔주는데 어쩌라고!”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는 회색 늑대다.

만약 영주가 없다면 그 지휘권은 보리 이삭이 대행하고 만약 보리 이삭마저 없다면 다른 관리자 셋이 그 권한을 이어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행정 총괄, 순찰, 허스칼로 나뉘어 있는 그 관리자 셋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행정관 그 새끼는 병신이에요? 왜 상황 파악을 못 하는데!”

순찰 대장은 기본적으로 선한 이다.

마을이 위험하다는 소리에 가장 먼저 움직이기도 했고 정체를 알기 전인 내 의견도 귀 기울여 잘 들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 제동을 건 행정관은 오직 보이지 않는 파벌을 키우는 데 관심이 있는 이기적인 자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상황이 어떻든 말든, 순찰 대장 말이라면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대충 그림이 나오지 않는가.

인간 사회에서 빠지지 않은 감초인 알력 다툼을 여기서 또 보게 될 줄 몰랐다.

그렇게 한참 고성이 오가고 난 뒤 목이 제대로 쉬어버린 난초꽃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러지는 검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믿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려는 거겠지. 젠장, 이런 취급을 받으실 분이 아니라는 거 나도 아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

“영주님이 말씀만 해주시고 가셨어도······.”

시간이 꽤 흐르긴 한 모양이다.

한때 기사왕 밑에서 싸웠던 나는 나이를 먹은 이방인이 되었고, 회색 늑대는 전설 속 허스칼이 아닌 영주가 되었다.

세월을 인정해야 할 때다.

북방 오지 화전민으로 태어나, 이 영지가 이 세상 전부인 그들을 이해하고 이제 내 방식대로 움직여볼 것이다.

크게 숨을 들이 내쉰 나는 답답함을 시원하게 떨쳐내며 다시 한번 물었다.

“허스칼 쪽은 반응이 없습니까?”

“하아, 아마 영주님이 직접 명령하기 전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전투 외에는 워낙 관심이 없는 자들이라······.”

“그래도 나쁜 자는 아닌가 보군요.”

“예, 그렇지는 않습니다. 엉덩이들이 무거워서 그렇지 괜찮은 사람이니까요.”

한쪽은 교활한 여우고

또 다른 한쪽은 게으른 사자다.

허스칼 부대 특징을 잘 아는 나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과 함께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허탈함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허스칼은 의무를 다할 것이고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충분히 마을을 수호할 전우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순찰 대장을 향해 다시 물었다.

“제자에게 보낼 수 있는 전서구가 하나 있습니다. 회색 늑대가 떠나기 전 내린 명령이니 행정관도 함부로 할 수 없겠죠.”

“아······!”

이 마을은 원리원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공과 사가 철저한 회색 늑대와 많은 부분이 닮아있었다.

그 덕에 행정관은 정해진 원칙이라는 명분으로 나를 압박할 수 있었고 자신을 변호할 보험마저 뒤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자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원리원칙이라는 검은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아, 언제든지 휘두르는 자의 목을 노릴 수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저쪽에서 치사하게 나오면 저도 한번 치사하게 응수해주려 합니다.”

나는 회색 늑대에게 눈투성이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전서구를 받았다.

그 전서구에는 어떤 내용을 쓰던 내 자유였고 보내는 시간에도 제한일 없었다.

그 말인즉슨,

행정관이 회색 늑대를 호출하지 않는다면 내가 제자를 통해 그를 부르면 된다.

영주의 명은 곧 지켜야 할 원칙.

만약 그것마저 막으려 든다면 행정관은 자신이 주장한 명분에 자신이 오류를 범하는 수를 두게 될 것이다.

나는 넋을 놓은 순찰 대장에게 물었다.

“순찰대 권한이 어느 정도죠?”

“아! 일단 마을 밖 정찰 활동은 전부 저희가 담당하는 편입니다.”

“주민들 출입을 통제할 방법은 없습니까?”

“그게 정문은 이상하게도 행정관 권한이라······. 아마 그럴 방법은 없을 겁니다.”

나와 편지를 주고받은 눈투성이가 말해주길 훈련 장소인 연무장까지 도보로 총 3일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했다.

그렇다는 건 전서구가 도착하고 회색 늑대가 돌아올 때까지 최소 4일 이상이 소요될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때 대책을 마련하면 늦는다.

적어도 회색 늑대가 돌아오기 전 늑대를 소유한 오크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북방 오지로 왔는지 미리 확인을 해둬야 했다.

회색 늑대 없이 움직이는 건 되도록 자제하려 했지만, 주민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나는 어느덧 의욕을 되찾은 순찰대 사람들을 바라보며 공손히 부탁했다.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험난한 마을 밖을 돌아다녀야 하는 순찰은 사람들이 하기를 꺼리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마을을 위해 기꺼이 고생을 업으로 삼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순수하게 가족과 이웃을 걱정하고 있었다.

세상은 이런 자들이 주역이 되어야 한다.

나는 마을을 욕심으로 더럽히는 저들에게 진짜 치사함이 무엇인지 보여 줄 생각이다.

* * *

사각, 사각, 사각.

“젠장······. 내가 캐다 준 터민 뿌리만 몇 개인데 미리 언질이라도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어? 어렵냐고!”

권력이란 참으로 무섭다.

어떨 때는 모두를 조아리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 과욕이 된다.

그리고 행정관이라 불리는 이 남자는 후자에 속하는 추한 자였다.

그 알량한 권력이 뭐라고, 오늘도 온갖 패악질을 벌이려 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입 다물고 지켜보고 있던 보조 서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러다 저희 전부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영주님이 아시기라도 하시면······.”

“입 닥쳐! 그걸 아니까 내가 지금 먼저 움직이려는 거 아니야!”

오크 늑대의 등장은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행정관에게 있어 그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전설 속 인물, 부러지는 검을 칭하며 나타난 한 남자였다.

오합지졸이라 생각한 순찰대와 함께 성공적으로 전초기지를 구해낸 것도 모자라,

수십 마리 늑대 무리를 단신으로 베고 오크 침공의 전조를 알아 온 부러지는 검.

평범한 이가 본다면 마을을 구원하기 위해 온 영웅의 등장이었겠지만,

어리석은 행정관 눈에는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또 다른 파벌의 등장이었다.

공을 세운 부러지는 검이 마을에 정착하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까딱하다가는 권력이라는 맛있는 파이를 나눠 먹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 순찰대가 물어온 공을 자신이 주도한 방향으로 꾸며야 한다.

행정관은 벌게진 눈으로 작성한 편지 두 장에 재빨리 직인을 찍었다.

“이건 영주님께 급히 보내라. 그리고 이건 보리 이삭에게 보내.”

“네, 행정관님.”

부하인 보조 서기 말대로 이번 대처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행정관은 그동안 쌓아놓은 든든한 재물과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며 보좌해온 후계자 보리 이삭을 믿고 있었다.

순찰대 녀석들이 멍청하게 헤매는 사이 자신이 먼저 소식을 전할 것이다.

물론 거기서 다른 이가 받는 부가적인 피해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심하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 그 순간 동태를 살피기 위해 나갔던 또 다른 서기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와 외쳤다.

덜컹!

“큰, 큰일 났습니다, 행정관님!”

“또 뭐야!”

“순찰대 놈들이 사육장으로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떼거리로 모여서요!”

행정관은 두 눈을 뻔쩍 떴다.

그리고 방이 떠나가라 웃으며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놈들!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이런 무력행사로 판을 뒤집으려 하는구나.

하지만 이곳은 평범한 화전민 마을이 아닌 회색 늑대가 다스리는 영지다.

원칙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무언가를 바꾸려고 했다가는 도리어 역풍을 맞는다.

“나와 함께 사육장으로 가자! 그리고 너는 허스칼 전사들을 호출해!”

“네!”

겉옷을 입은 행정관은 자신을 따르는 서기들과 함께 서둘러 방을 나왔다.

그리고 건물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전서구 사육장을 향해 한걸음 달려간다.

놈들은 분명 잔뜩 흥분했겠지?

사람 몇 명 때려주고 물건도 부숴준다면 허스칼이 와서 진압하기 딱 좋다.

음흉한 생각을 가득 품은 행정관은 헛기침과 함께 건물 앞으로 들어섰다.

크흠, 큼!

소란을 듣고 왔는지 주민들이 무리 지어 시끄럽게 웅성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사육장 건물을 찾아온 순찰대 열댓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빠르게 웃는 낯을 지운 행정관은 그들을 향해 위엄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어허! 이게 무슨 짓인가! 아무리 경우가 없다고 해도 이런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야! 허스칼들을 불렀으니 당장······?”

파닥파닥!

그 순간 행정관 목소리에 삑사리가 났다.

왜냐하면, 도착한 사육장에는 정체를 모를 남성이 창문 밖으로 이미 전서구를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악한 행정관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깊은 산맥까지 비행할 줄 아는 전서구는 방금 그 녀석이 유일했다.

하지만 이 남자가 먼저 날려버리는 바람에 그 유일한 통신 수단이 사라져버렸다.

“이······! 이놈이!”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행정관인 자신을 무시하고 전서구를 함부로 사용하는가.

분노한 그는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 - - -?”

하지만 걸어갈수록 분위기가 이상했다.

원래라면 순찰대 놈들로 인해 쑥대밭이 되어있어야 할 사육장이 조용했다.

그리고 전서구들을 관리하는 사육사 녀석 또한 얼굴이 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도대체 뭐지? 누가 찾아왔길래 순찰대 놈들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행정관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도리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낡은 옷, 새어버린 머리, 평범한 검이다.

하지만 세월이 가져다준 품격은 황금 옷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마치 온갖 자연과 풍토가 오랜 시간 합쳐져 쌓은 커다란 태산처럼 말이다.

남자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부러지는 검. 이 땅 위에 영주가 허락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자 왔다. 나에게 볼일이 있는가, 행정관?”

전설이라는 것이 원래 그랬다.

이야기로 듣고 기록으로만 볼 때는 인물과 거리가 너무 멀어 그 전설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행정관은 영광스럽게도 자신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그 이방인의 전설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검성 부러지는 검.

행정관은 이마 위에 맺힌 식은땀이 무거워 남자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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