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검은머리 기사왕 29화
서걱서걱,
찌익!
수없이 많은 늑대 사체 사이에서 죽은 우두머리를 꺼내 가죽을 도려냈다.
그리고 손으로 펼쳐보자 더욱 선명해진 노예 낙인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전히 오크 문장이 맞다.
수십 년간 수백 가지 오크 깃발을 봤던 내가 그것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전투 늑대.”
힘이 전부인 오크라고 해도 야생 동물을 길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방식인 일반적인 ‘사육’과는 차원이 달라 결과물은 마물, 괴물이라 불릴 만큼 끔찍한 게 보통이었다.
그렇다면 딱 느낌이 오지 않는가.
아마 전초 기지를 습격한 늑대들은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전투 늑대들일 것이다.
꾹.
주먹을 꽉 쥐었다.
도대체 어디서 온 놈들이기에 이런 북방 오지까지 전투 늑대를 끌고 왔는지 모르겠다.
마을을 발견한 걸까?
아니, 8년간 단 한 번도 북방 오지로 진출하지 않은 오크들이다.
아무리 이번 봄이 유난히 따듯하다 한들 그럴 이유도 의욕도 그들에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지어 버리기에는 분명한 증거가 내 앞에 있었다.
마치 예상치 못한 우연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젠장.”
아무리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려 해도 불안한 마음은 떨쳐 낼 수가 없다.
답답함에 인상을 찡그린 나는 결국 들고 있던 가죽 조각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기사님!”
그 순간 상념이 깨졌다.
위험을 무릅쓰고 주변 정찰을 끝낸 순찰대원들이 기지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조금 전 전투를 끝으로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작은 곰을 향해 물었다.
“혹시 찾았습니까?”
“없었습니다! 반경 200m를 모조리 뒤졌는데,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습니다!”
보통 길들인 늑대라 하면 가까운 곳에 녀석들을 통제하는 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직후 대원들과 함께 주변을 수색한 결과 오크는커녕 누군가 다녀간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투 늑대를 통제하는 오크 사육사가 없었다는 것은 이번 사태가 적어도 놈들이 작정하고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일단 급한 불은 껐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대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위험한 일이었는데.”
“아닙니다! 다 마을을 위한 일이 아닙니까! 아무리 위험해도······!”
“킥킥. 야 작은 곰! 너무 과하게 행동하는 거 아니야? 다들 웃겨 죽으려고 하잖아.”
“아, 아니야!!”
오래된 유명세라는 게 참 그랬다.
빛이 나긴 하지만, 들고 다니기 무거워 꺼내놓고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숨겨 놓았다가는 이상한 상황을 즐긴다는 괜한 오해만 산다.
하지만 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검을 뽑았으니 그 과정과 선한 결과가 전부 내 이름을 증명할 수단이 되어주었다.
내가 나이를 먹어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해야 하는 게 얼마나 웃기던지.
본의 아니게 동명이인이 아니라는 걸 알려지게 된 나는 온갖 난리와 호들갑을 떨어오던 그들에게 한참을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이는 대원들을 웃으며 바라보다 이내 복귀를 제안했다.
“일단 돌아갑시다. 마을에 알려야 할 소식이 한둘이 아닙니다.”
“네!”
대규모 늑대 무리가 출현한 원인을 파악하고 습격받은 병사들을 전부 구해냈다.
이 정도라면 순찰대 본연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공을 자축하기에는 우리가 찾은 전조 현상은 너무나 위중한 사항이었다.
오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여태 상대해온 야만인과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눈투성이의 수련을 중단하고 회색 늑대와 대책을 마련하는 게 옳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며 대원들과 함께 마을로 복귀하는 길을 밟았다.
불타지는 전초 기지의 화마가 고약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마을로 돌아가는 길 작은 곰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형씨······. 아니, 경!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혹시 결혼하셨습니까? 아니라면 제 동생이 마침 좋은 배필을 찾아······.”
“음.”
마침 내리막길이다.
나는 몸이 쏠린 척 빠르게 뛰어갔다.
* * *
“북방은 봄인데도 참 춥군.”
“······면목이 없습니다, 티그르.”
황제 오그르의 44번째 아들 티그르는 치열한 후계 싸움에서 패배했다.
앞선 형제들이 많다고 변명하기에는 그의 세력이 너무 약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력이 약세하다는 이유로 그는 후계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그것을 안 형제들은 티그르를 죽이지 않는 대신 북방으로 좌천시켰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티그르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다, 다 내 잘못이지.”
어차피 자신과 같은 약소 세력은 전쟁 한 번이면 쓸려나갈 모래알이다.
차라리 목숨만이라도 건져 이렇게 북방으로 온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북방에서 꾸준히 공을 세워 인정을 받는다면 훗날 내전에서 승리하고 황제가 된 형제에게 또 다른 부름을 받을지.
제 분수를 너무나 잘 아는 티그르는 작은 야망을 불태우며 마음을 다잡았다.
“숙영지 건설은?”
“저희가 새로 편제된 탓에 부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장소를 찾았으니 금방 짓게 될 겁니다.”
“그래, 최대한 빨리 서두르도록.”
북방 숙영지는 근무 환경이 좋지 못해 사령관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중앙 대륙과 비교하면 그 근무 강도가 현저히 낮았는데, 자신들과 같은 3선급 군대가 공을 세우며 성장하기에 딱 좋았다.
기한은 1년, 빨리 건수를 찾아야 한다.
티그르는 열심히 숙영지 건설 중인 부족민들을 바라보며 콧김을 훅 내뱉었다.
마침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나저나 늑대들은 찾았나?”
“반절은 다시 잡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다 도망가버리는 마당에······.”
티그르는 야생 동물을 길들여 전투원으로 육성하는데 타고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개체가 바로 교배종인 전투 늑대였는데 이번 원정에도 당연히 데리고 왔었다.
하지만 척박한 산맥을 넘어가던 마차가 전복되어 버리는 마당에 반절이 넘는 녀석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티그르는 전사들을 탓하기보다는 사기를 올리는 데 신경 썼다.
“괜찮다, 그깟 소모품들은 다시 교배하면 그만이다. 마침 북방 늑대들이 그렇게 크다는데 좋은 기회가 생긴 거지.”
“······정말 죄송합니다.”
“자자, 오늘은 기쁜 날 아닌가? 숙영지 건설이 끝나면 연회를 열자고! 하하!”
썩어도 준치라고 위대한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티그르는 좋은 지도자였다.
전사들은 그 넓은 아량에 감동하며 다시 한번 족장을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연회를 열자는 말에 환호를 보내는 오크들.
비록 쫓겨난 몸들이었지만, 북방에 도착한 오크들은 시작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안도는 뒤이어 들려온 소란으로 인해 빠르게 깨져버렸다.
다각! 다각! 다각!
웅성웅성.
“티그르님은 어디 계신가!”
“티그르님! 급한 보고입니다!”
오크를 태운 말 두 필이 급히 달려온다.
그들은 숙영지 건설 전 주변을 정찰하기 위해 나갔던 오크 전사들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티그르가 급히 손을 올리며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렸다.
“이쪽이다!”
푸르륵!
“티그르님!”
티그르를 향해 급히 달려간 오크 전사들은 고삐를 당겨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급히 숨을 몰아쉰 다음 족장인 티그르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일이지? 또 적인가? 설마 형제들이 여기까지 추격해온 것은 아니겠지?”
티그르는 안절부절 물었다.
그동안 형제들에게 깨지고 쫓기면서 온갖 보고를 받아본 탓에 이제는 말만 보면 불안한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소식을 가져온 오크 전사들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 오랜만에 좋은 보고를 올릴 수가 있어서 기쁘다는 듯 말이다.
“아닙니다, 티그르님! 적이 아닙니다!”
“저희가 구해온 것부터 봐주십시오!”
적이 아니라는 소리에 안심하는 티그르.
말을 타고 온 오크 전사 하나가 품에서 다급히 무언가를 꺼냈다.
“비둘기······? 아! 전서구인가?”
“맞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비둘기는 이미 온몸이 난자되어 숨통이 끊긴 지 오래였다.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동안 매와 같은 포식자에게 붙잡혔던 모양이다.
하지만 전사들이 이런 비둘기 사체를 주워온 진짜 이유는 바로 발목에 매달려있던 전보 한 조각 때문이었다.
티그르는 의아한 얼굴로 물에 푹 젖은 전보 조각 속 인간 언어를 읽었다.
‘정체불명 늑대 무리와 접촉하지 말 것, 반나절 뒤 막사에서 순찰대를 보내겠음.’
‘파견 인력은 작은 곰, 난초꽃, 울지 않는 새 포함해 4명으로 예정.’
‘보리 이삭과 영주님은 부재중.’
내용은 마을과 주고받는 평범한 전보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이 중앙 대륙이 아닌 인간이 사는 북방이라는 것이다.
버젓이 쓰여있는 북방식 이름.
마치 세력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튀어나오는 기지와 영주님이라는 단어.
티그르는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이, 이것을 어디서 찾았지?”
“근처 강에서 찾았습니다. 강 상류에서 떠내려온 것이 분명합니다.”
북방 왕국의 멸망과 동시에 이루어졌던 대토벌은 그나마 반란 가능성이 있는 웬만한 세력권을 뿌리 뽑아 버렸다.
그렇다 보니 현재 북방에서 공을 세우는 방법은 드물게 보이는 산적 무리나 더러운 야만인들을 죽이는 게 유일했다.
하지만 그런 북방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인간 영지가 버젓이 존재한다고?
앞으로 할 고생에 막막했던 티그르는 순간 터져 나오는 환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하늘이 공을 세우라고 내린 절호의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티그르는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강 상류! 그럼 더 북쪽인가?”
“예! 흔히 오지라고 불리는 지역입니다. 봄이 왔으니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이 전서구는 강 상류를 따라 내려왔다.
발견된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본다면 충분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티그르는 외쳤다.
“너희는 당장 전사들을 모아 정찰대를 꾸려! 위치를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본진에는 알리지 말도록. 단순한 지형 정찰이라 보고해.”
원래 절차라면 숙영지들을 관리하는 본진에 주기적으로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섣불리 보고했다가는 먼저 냄새를 맡은 다른 숙영지가 기회를 가로채기 위해 먼저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인간 머리는 곧 공적.
공적은 곧 출세의 기회!
다른 오크 숙영지가 알아채기 전 자신이 그 마을을 독차지해야 한다.
“흐흐.”
어울리지 않게 강행수를 둔 티그르가 두꺼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항상 불운만 가득하다 생각했던 자신에게 드디어 행운이 찾아오자,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것으로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동안 짓밟혔던 자존심도 자신을 따라와 고생한 부족민들도 전부 말이다.
티그르는 욕망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저 멀리 척박한 북방 오지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인간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오크 침공의 끔찍한 전조였다.
티그르가 외쳤다.
“숙영지 건설을 서둘러라! 너희들에게 명예로운 전쟁을 선물하마!”
오크들 관심이 멀어졌다는 이점을 이용해 건설할 수 있었던 인간 마을이다.
하지만 그 정체가 탄로 난 이상 더 이상 안전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8년 전, 북방을 휩쓸었던 오크 침공이 또 한 번 평화로운 인간 영지를 향해 검을 겨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