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검은머리 기사왕 28화
늑대!
다른 맹수들과는 다르게 무리 지어 다니는 녀석들은 우리 인간과 활동영역이 겹치는 원시적 경쟁 상대였다.
그만큼 놈들의 지능과 사냥 방식은 영리했으며 소규모 마을은 늑대 때문에 개를 키워야 할 만큼 위협적이고 무서운 적이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늑대 특성상 이런 오지들이 더 위험했는데,
대원들 반응을 보아하니 마을에서 녀석들 존재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 동네 사슴 우두머리가 더 무서웠던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녀석들이겠지?”
“그래, 전초기지가 멀지 않으니까.”
순찰대원들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원래 임무부터가 전초기지 근처에서 발견되는 비이상적인 늑대 무리를 찾아내 보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초기지와 조금 전 들려온 늑대 울음소리.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가자.”
난초꽃은 노련한 리더였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대원들을 이끌고 다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능선을 향해 얼마나 더 걸어갔을까, 저 멀리 높은 나무 뒤로 숨겨져 있던 작은 망루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곰이 난초꽃을 향해 물었다.
“연락이 끊겼었다고 했지?”
“응, 오늘 아침 전서구가 안 왔어.”
“불길한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업무 때문에 바쁜 걸 수도 있으니까.”
이런 전초기지 특성상 연락이 끊기면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번거롭기는 해도 이렇게 사람을 보내 상황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
불길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작은 곰과 그런 작은 곰을 타박하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 하는 난초꽃.
우리는 그렇게 마을과 반나절 거리인 전초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높은 울타리와 목조 건물, 그리고 주변을 살필 수가 있게 지어진 망루 한 채.
작지만 위장이 잘 되어있는 전초기지는 침묵과 고요 그 자체였다.
“난초! 여기!”
원래라면 주변을 감시 중인 초병이 우리를 먼저 발견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들어오라는 신호는커녕 안에서 열어줘야 하는 문이 부서진 상태였다.
기겁하며 문을 가리키는 작은 곰.
우리는 서둘러 창을 꺼낸 뒤 부서진 전초기지 문을 향해 달려갔다.
킁킁
“피 냄새······.”
침입과 전투의 흔적이다.
전초 기지를 지키는 초병 3명은 적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문 앞에서 피 터지는 혈투를 벌였다.
하지만 끝내 막지 못했는지 문은 부서져 있었고 핏자국은 뒤로 이어진 상태였다.
대원들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변을 둘러본 나는 말라붙은 사이에서 익숙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늑대가 맞습니다.”
털, 발자국, 습성.
어이없게도 늑대 짓이 맞다.
늑대 발견을 보고한 하루 사이 전초 기지가 습격을 당하고 만 것이다.
난초꽃은 당황했다.
“이,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그래,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놈들은 불과 철 냄새가 나는 장소를 꺼리는 편이라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무장한 사람을 습격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먹잇감이 풍부한 봄철 아닌가, 난초꽃이 충분히 당황할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빨리 들어가 보자고! 쉽게 당할 놈들이 아니라니까!”
전초 기지에 아는 지인이 있는 작은 곰은 불같이 분노하며 창을 들었다.
그리고 대원들을 향해 다급히 외치며 혹시 살아있을지 모르는 초병을 찾기 시작했다.
“젠장!”
기지 내부는 쑥대밭이었다.
입구에서 막지 못한 늑대 무리가 기지는 물론이고 거주 건물까지 침입한 것이다.
하지만 단 한 곳,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빼낸 망루만큼은 핏자국 없이 멀쩡했다.
“이봐!”
만약 도망쳤다면 저곳이 유일하다.
얼굴에 화색이 돈 작은 곰은 망루 위를 향해 외치며 올라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사다리 말고는 올라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역시 이 방법뿐인가.
나는 창을 내려놓은 뒤 어쩔 줄 몰라 하는 대원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어, 어? 형씨!”
내가 오른 절벽만 수백 개다.
망루가 꽤 높다고 한들 이 정도 높이는 눈감고도 오를 수 있었다.
나는 능숙하게 손을 뻗어 좁은 틈을 잡고 순식간에 망루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끙······.”
나이를 먹었나, 관절이 아프다.
모양 빠지는 소리를 숨긴 나는 대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옆으로 한쪽 옆에 치워져 있던 사다리를 밑으로 내려주었다.
그리고 지체할 것 없이 하나뿐인 창문을 넘어 망루 내부로 들어갔다.
“으으···.”
“괜찮습니까?”
한 명, 두 명, 세 명.
다행히 셋 다 살아있다.
다만 부상과 탈진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치료가 시급하다.
나는 방금 막 사다리를 고정한 대원들을 향해 붕대와 지혈제를 가져오라고 외쳤다.
“누, 누구······.”
그러자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한 사내가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늑대들에게 어깨를 물어뜯긴 듯한데 이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순찰대입니다. 마을에서 보냈어요.”
겨우 3명이 수많은 늑대 무리를 막기 위해 정말 외롭게 싸웠을 것이다.
착잡함을 느낀 나는 가방에서 가죽 수통을 꺼내 사내에게 물을 먹였다.
꿀꺽꿀꺽.
출혈 탓에 목이 말랐을 것이다.
마치 감로수를 마시듯 물을 삼킨 사내는 이제야 살겠다는 얼굴로 숨을 내뱉었다.
남은 물은 다른 이들 몫이다.
나는 나머지 2명이 위급하지는 않은지 확인한 뒤 출혈을 지혈해주었다.
그러자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사내가 혀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늑대들이, 늑대가······.”
“예, 저희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왜 지원 요청을 안 한 겁니까?”
“마, 마을에서 전서구가 안 왔어요······.”
마을에선 분명 전서구를 보냈다.
하지만 전초 기지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간에 유실이 되었다는 뜻이다.
재수도 없지, 하필 저런 이상 현상이 생겨난 날 전서구가 유실된 것일까.
나는 긴장이 풀려 울먹이는 사내를 토닥여준 뒤 밑에서 물건을 챙겨 올라오는 대원들을 재촉하려고 했다.
아우우우우우우 - - -!!
하지만 그 순간 귀를 찌르는 늑대 하울링이 우리가 걸어온 방향에서 울려 퍼졌다.
전초 기지를 이 꼴로 만든 늑대 무리가 우리 냄새를 쫓아 다시 한번 찾아온 것이다.
지독하게 집요하고 영리한 놈들이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짐을 내려놓은 뒤 망루 난간을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컹! 컹컹!
사박, 사박, 사박, 사박!
동료를 부르는 하울링이 끝나자 사방에서 늑대 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예상보다 많아 순찰대원들은 얼굴에 절망감이 드리웠다.
저 많은 숫자를 막아낼 수 있을까?
사방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이빨이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뜯을 듯 조여오기 시작했다.
“작은 곰! 기름!”
“- - - - - - -!!”
목숨이 위협받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망루에서 뛰어내려 대원들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여, 여기!”
작은 곰은 기름이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가죽 주머니를 내게 던졌다.
동시에 나는 날아오는 주머니를 창으로 찔러 내용물인 기름을 사방에 뿌렸다.
화르르!
기름 위로 타다 남은 모닥불을 발로 찼다.
그러자 재 속에 숨어 살아있던 불씨가 기름과 만나 화르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불!”
야생 동물은 본능적으로 불을 무서워한다.
그런 가장 기초적인 것조차 잊고 있었던 대원들은 서둘러 주변 탈것들을 기름 위로 던져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컹컹! 컹!
크르르릉 - - -!!
서서히 덩치를 키워가는 화마.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늑대 무리.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작은 곰은 그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게 뭐야······.”
그래, 정말 이게 뭔가 싶다.
전초 기지를 다시 습격한 늑대 무리 숫자가 무려 40마리를 넘어갔다.
하지만 그 숫자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놈들은 내가 아는 일반적인 늑대와는 달리 그 모습이 기괴하다는 것이었다.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듯 기형적인 이빨과 발톱, 마치 이성을 잃은 악마들처럼 붉게 물들어버린 눈동자.
놈들은 늑대라는 야생 동물이 아닌 전투를 위해 길러진 ‘마물’ 같았다.
컹컹!
“온다!”
망루 주변을 포위한 놈들은 불의 경계를 빙빙 돌며 침을 질질 흘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불조차 무섭지 않은지 거침없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푸슝!
깨갱!
울지 않는 새가 활을 쐈다.
솜씨 좋은 대원답게 화살은 명중했고 뛰어오른 늑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 공격이 시작이었다.
놈들은 화살을 맞은 늑대가 쓰러지자마자 우리를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우어어어어!”
작은 곰이 참 이름과 어울리는 고함을 내지르며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리고 난초꽃 또한 두려움을 이겨냈는지 친우인 작은 곰과 합을 맞췄다.
깨갱!
컹컹! 컹컹!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다.
하지만 그 셋만으로는 이 많은 늑대 놈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지금은 대원들이 볼 수 없는 사각지대를 봐주며 망루 위로 올라갈 시간을 벌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꾹.
나는 창이라는 생소한 무기를 잡으며 한때 독학했던 규범 창술을 떠올린다.
자세를 잡고 두 번 힘을 주며,
앞으로 나아가듯 전진!
푹!
촤악!
한 합으로 늑대 머리가 꿰뚫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합으로 창 궤적이 변해 두 번째 늑대를 찔러 죽였다.
푸슉!
창날에서부터 전해져오는 통쾌함.
창대를 거둘 때 딸려오는 강한 기운.
나는 대원들이 힘껏 싸우는 사이 사각이라는 가지를 열심히 쳐내 주었다.
그러자 난생처음 창을 잡았던 과거 기억이 돌아오며 늑대 놈들을 저지하는 움직임이 점점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하지만 호흡 한 번 변하지 않은 나와는 다르게 전장 상황은 좋지 않았다.
놈들을 잘 막아내던 다른 대원들이 압도적인 머릿수 앞에 결국 밀려난 것이다.
콰직!
“으아아악!”
“작은 곰! 안돼!”
작은 곰이 들고 있던 창대가 부러졌다.
그러자 그걸 놓칠 리가 없는 늑대 놈들이 그대로 몸을 날려 작은 곰을 덮쳤다.
비명을 지르는 난초꽃과 화살이 떨어져 허둥지둥 단검을 꺼내 드는 울지 않는 새.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그들만의 균형은 가파른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 - - - - -.”
두 눈이 번뜩인다.
한참 달궈진 신경이 고개를 쳐든다.
나는 느려진 시간 사이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몸과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치지지직.
그리고 허공에 놓은 창을 한 손으로 낚아챈 뒤 표적을 향해 그대로 내던졌다.
동시에 한 줄기 사선이 허공을 가른다.
후웅! 푹!
“어, 어?”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이 작은 곰의 목을 물어뜯기 직전 움직임이 멈췄다.
내가 던진 창이 번개처럼 날아가 놈의 몸통 한가운데를 꿰뚫은 것이다.
바보처럼 이쪽을 바라보는 작은 곰.
시끄럽게 짖어대던 늑대 놈들은 한순간 털을 곤 듯 세우며 움직임을 멈췄다.
좋아, 움직일 수 있는 틈이 생겼다.
나는 난초꽃을 향해 말했다.
“빨리 데리고 망루 위로 올라가세요.”
철컥, 스르릉!
지키기 위한 싸움은 힘들다.
하지만 이들이 망루로 올라가 준다면 내 선택 범위는 훨씬 넓어진다.
나는 창 대신 검을 뽑으며 난초꽃을 향해 대원들을 피신시키라 말했다.
후웅, 치지지직!
화르륵!
바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이 만들어낸 바람이 바닥에 고인 불과 기름을 날에 옮겨붙게 했다.
마치 오러처럼 잘 타오르는구나.
한껏 기분을 낸 나는 수십 마리 늑대 무리를 향해 겁 없이 걸어 들어갔다.
뚜벅, 뚜벅, 뚜벅.
조금 전 공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놈들은 자연스레 나를 경계한다.
그리고 공격을 포기한 것은 아닌지 천천히 대열을 벌리며 중앙을 포위한다.
자, 이제 늑대 우두머리가 보일 것이다.
나는 검을 놈들한테 겨누며 느긋하게 놈들 사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
그래, 거기 있었구나.
시야를 조금 위로 올리자 무리 사이, 이를 드러낸 우두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음?”
하지만 우두머리와 눈을 마주친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덩치가 큰 우두머리 녀석은 다른 종과 다르게 이마 한가운데 익숙한 문양 하나가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오크?”
컹 컹!
화르륵, 서걱!
빈틈을 노린 늑대가 달려든다.
하지만 나는 순식간에 늑대를 두 동강 내며 피가 묻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 늑대들 탈주한 녀석들이다.
그것도 오크 소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