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검은머리 기사왕 27화
‘오러가 무엇입니까?’
‘어머니의 숨이다.’
‘오러는 어디 있습니까?’
‘공기, 물, 불, 그리고 네 옆에.’
회색 늑대의 가르침은 추상적이었다.
덕분에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형태를 이루기도 못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움을 의도한 것이 아닌 오러의 본질이 원래 그러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스스로 움직이고 자각하는 광활한 자연처럼 말이다.
킁킁.
눈투성이는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자 깊은 산맥에서 불어오는 물안개 냄새와 풀 내음이 머리를 맑게 한다.
이번에는 앉은 자세로 손을 뻗어본다.
그러자 봄과 함께 촉촉하게 젖은 흙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간지럽힌다.
마음이 편안하다.
북방에서 태어난 눈투성이는 이 모든 자연이 자신의 집처럼 느껴졌다.
“또 쓸데없는 짓이냐?”
하지만 그 순간 바로 머리 위에서 재수 없는 보리 이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회색 늑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시비를 걸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너 이게 뭔지 알지? 터민 뿌리라고 마을 행정관이 캐다 준 거다. 오러를 깨닫는데 이만한 게 없다고 하더라.”
회색 늑대와 같이 있을 때는 온갖 착한 척은 다 하는 녀석이 이렇게 둘만 남을 때면 저리 본모습을 드러내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을 고자질할 처지가 아니었던 눈투성이는 오늘도 이렇게 보리 이삭의 괴롭힘을 꿋꿋이 참아내고 있었다.
아삭, 아삭.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지 귀한 터민 뿌리를 맛있게 먹어 치우는 보리 이삭.
녀석은 오늘도 어김없이 말로써 사람을 귀찮게 하다, 검술 훈련 뒤 명상 중인 눈투성이를 한껏 비웃었다.
“그딴 게 정말 도움이 되는 줄 알아? 그럴 시간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좋을 텐데 말이야.”
무시하자, 또 무시하자.
스승은 명상이 기운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고 이야기를 들은 회색 늑대 또한 나쁘지 않다고 말했었다.
비록 자신이 저 파렴치보다 오러 수련 경력이 떨어질지언정, 열등감과 분노로 이 평온한 마음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파동이 일어났던 마음이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흥”
한참 간을 보던 보리 이삭은 이번에도 조롱이 통하지 않자 작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아 하는 얼굴과는 달리 속은 펄펄 끓는 상태였다.
원래 저 또래 아이쯤 되면 쉽게 도발에 걸려 화를 자초하고는 한다.
그런 점을 잘 이용할 줄 알았던 보리 이삭은 당연히 눈투성이 또한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눈투성이는 마치 성숙한 어른처럼 자신을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마치 여기서 다툼을 벌이게 되면 누가 더 유리한지 아는 사람처럼 말이다.
눈투성이를 도발해 불화를 일으킬 생각이었던 보리 이삭은 남몰래 똥줄을 태웠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 잠시 자리를 비웠던 회색 늑대가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제자들이 먹을 저녁 거리를 사냥하기 위해 잠시 밖으로 다녀온 모양이었다.
“아, 스승님 오셨습니까!”
표독한 얼굴로 박박 이를 갈던 보리 이삭이 한순간 표정을 싹 바꿨다.
그리고 웃는 낯으로 스승을 맞이하며 마치 친한 사이처럼 눈투성이 옆에 선다.
회색 늑대가 물었다.
“명상 중이었구나.”
“예! 눈투성이에게 많이 배우는 중입니다.”
“음, 잘했다.”
손찌검까지 하며 보리 이삭을 혼냈을 때는 크게 실망하고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보리 이삭 본인도 깨달은 바가 있는지 눈투성이와 큰 불화 없이 잘 지내는 중이었다.
만족한 얼굴로 오랜만에 웃어 보인 회색 늑대는 양손 가득 먹을 것을 들며 말했다.
“오늘도 고생했다. 먼저 숙소로 돌아갈 테니 연무장만 정리하고 돌아와라. 오늘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마.”
“네!”
“예.”
깊은 산맥에서 수련을 시작한 지도 벌써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 연무장을 정리하고 돌아가는 길도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짐을 잔뜩 챙겨 들고 먼저 숙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는 회색 늑대.
보리 이삭과 눈투성이는 그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하루 수업을 마무리했다.
달그락.
슥슥.
이제 간단히 청소만 하면 끝이다.
부지런한 눈투성이는 창고에서 빗자루를 꺼내 엉망이 된 연무장을 쓸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리 이삭은 그러거나 말거나 팔자 좋게 그 모습을 구경했다.
더러운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에게 청소라니, 어불성설이었다.
푹신한 풀숲을 벼고 누운 보리 이삭은 이제는 아무런 생각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스승님도 참 옛날 사람이라니까. 수련할 장소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른데.”
“·········.”
“아~ 빨리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 스승님이 해주는 맛없는 음식도 이제 사절이야.”
어차피 찍소리도 못하는 녀석이다.
보리 이삭은 아예 눈투성이를 말 못 하는 벙어리 취급하며 자기 속마음을 되는대로 지껄일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했다.
항상 좋은 사람을 연기해야 했던 보리 이삭은 마치 혼잣말을 하듯 만만한 대상을 향해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역겹고 이중적인 녀석.
조잘조잘 떠드는 입은 난신 같았고 스승을 욕하는 모습을 적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똥간에도 선이 있듯,
내뱉는 배설물에는 정도가 있어야 했다.
“너도 참 불쌍하다. 기껏 만난다는 스승이 하필 부러지는 검이라니. 지금이라도 솔직히 인정하고 우리 스승님한테······.”
철컥, 스릉!
순식간이었다.
무례해도 허튼 말은 자제했던 보리 이삭이 부러지는 검을 모욕한 것도 그것을 들은 눈투성이가 움직인 것도 말이다.
자신을 아무리 욕해도 참고 또 참았던 눈투성이는 스승이 모욕을 당하자 정말 한 치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어, 어어?”
얼마나 빠른지 보이지도 않았다.
보리 이삭은 뒤늦게 검을 뽑으려 했지만, 이미 눈투성이의 날카로운 검은 목 바로 앞까지 겨눠진 지 오래였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차분하고 침착했던 눈투성이는 사라지고 분노한 화신이 눈앞에 있었다.
우우우웅 - - - -!
검 끝이 공명한다.
조금만 움직이면 녀석은 목이 잘려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 것이다.
보리 이삭은 목소리를 덜덜 떨며 말했다.
“무, 무슨 짓이야. 미쳤어?”
혀와 검은 다르다.
검은 휘두르면 티가 나지만, 혀는 아무리 휘둘러도 티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그 차이를 너무나 잘 알았던 보리 이삭은 그 잘난 혀로 수많은 이들을 욕하고 상처 주고는 했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그 상식에서 벗어났다.
백 마디 말보다 날카로운 검 한 자루로 녀석의 입을 틀어 막아버렸다.
눈투성이는 입을 열었다.
“사과해.”
“검을 겨눠······? 나, 나를 죽인다고?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잊었어?”
뒷배를 믿고 목숨을 구걸한다, 본인도 얼굴이 뜨거워질 만큼 유치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보리 이삭은 그만큼 당황했기에 스승을 파는데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 자신을 베면 스승에게 죽는다.
미친 사람이 아닌 이상 눈투성이가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그래, 미친 사람이 아닌 이상······.
“할 말은 끝이야?”
보리 이삭은 모르고 있었다.
눈투성이가 어떤 삶을 살며 여기까지 왔는지, 아이에게 있어 스승이란 두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눈동자에 맺힌 불은 꺼지지 않는다.
아니, 꺼지기는커녕 더 활활 불타오르며 목을 겨눈 검을 움직이게 했다.
눈투성이는 겨누고 있던 검을 그대로 휘둘러 보리 이삭의 목을 자르려 했다.
“잠깐! 내가 잘못했다! 내가 모르고 말실수를 했어!”
뚝.
검이 멈췄다.
눈투성이가 자신을 죽이려 했단 걸 직감한 보리 이삭이 결국 항복했다.
얼음이 쏟아질 것 같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투성이.
분명 자신은 오러를 수련했음에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털썩.
빠른 사과로 겨우 목숨을 건진 보리 이삭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분한 주먹을 말아쥔 채 꼬리를 만 개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젠장, 반항 한 번 못했다.
벌써 두 번 연속 입을 잘못 놀리다 화를 당한 보리 이삭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모른 채 분한 속내를 겨우 삼켜냈다.
철컥.
눈투성이는 뽑았던 검을 납도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빗자루를 집어 바닥을 쓸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외로우면서도 독했다.
하지만 그 고독마저 굳세게 견뎌낸 눈투성이는 주머니 속 넣어두었던 달콤한 간식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오물.
스승이 전서구를 통해 보내준 간식이다.
놈이 아무리 온갖 귀한 보약으로 자랑을 해도 이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 * *
“흐흐! 어때, 형씨! 힘들지?”
수염 난 순찰대원 한 명이 거친 산길을 오르는 내 옆에서 히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닌 내심 걱정이 되어 묻는 장난이었다.
“이정도야 뭐.”
“젊을 적 좀 노셨나 봐.”
“하하.”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젊거나 화전민 출신인 탓에 변해버린 내 모습을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회색 늑대가 이런 걸 일일이 알리는 자가 아닐뿐더러 나 또한 명성으로 인해 생기는 귀찮은 일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주민이 되고자 순찰대로 지원한 사람1이 되었고 오랜만에 처음 보는 사람들과 격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인마! 아까부터 너무 귀찮게 구는 거 아니야? 아저씨가 싫어하시잖아!”
“어허, 남자들끼리 이정도는 장난이지. 너는 좀 빠져! 눈치 없이 끼지 말고.”
내가 배정된 순찰대는 총 4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소규모 분대였다.
저번 순찰 중 한 명이 은퇴해 내가 급히 빈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텃세는 없었고 순찰대 모두 나를 살갑게 대해주었다.
나는 덩달아 하하 웃으며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 순찰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방금 내게 말을 건 수염 남자 ‘작은 곰.’
그런 작은 곰과 어릴 때부터 친구이자, 순찰대를 이끄는 여성 대원 ‘난초꽃.’
어릴 때 병을 앓아 벙어리가 되었지만, 심성은 착한 ‘울지 않는 새.’
다들 하나 같이 개성적이고 주관도 뚜렷해서 그런지 일하는 내 심심할 틈이 없었다.
내가 하하 같이 웃자 더욱더 신난 작은 곰이 옆으로 바짝 다가와 물었다.
“그나저나, 형씨. 그 검은 진짜 휘두르는 거요? 다루기 정말 어렵던데.”
챙겨온 짐이 딱히 없었던 나는 순찰대에서 기본 제공하는 저급 가죽옷과 어깨 위보다 살짝 큰 창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개인 장비가 허락된다고 하여 허리춤에 검을 차고 왔는데, 그들로선 그게 무척이나 신기했던 모양이다.
북방 검술의 맥이 끊기기는 했구나.
나는 어느새 힐끗힐끗 시선을 던지는 순찰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만져봐도 됩니다.”
“정, 정말이오?”
북방은 철이 귀하고 모자란지라 높은 직책이나 기사 수련생이 아니면 ‘괜찮은’ 검을 만져볼 기회가 없다.
그 때문인지 내가 검집을 풀어 내밀자 순찰대원들이 걷다 말고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오오······. 장난 아니구먼.”
“겉은 수수한데, 날이 너무 멋있어요.”
이게 바로 마을에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수준 높은 대장장이가 있냐 없냐에 차이다.
나는 다시 한번 붉은 수염과 친우라는 것에 감사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에휴, 우리 무기는 언제 바꿔주려나. 여기 받으쇼. 구경 잘했수다.”
좋은 검은 비싼 재물이다.
욕심이 생길 법도 하지만, 순박하기 작은 곰은 고민 없이 검을 돌려주었다.
나중에 눈투성이의 수련이 전부 끝나면 마을 간 교류 품목으로 질 좋은 무기를 포함해줘야 하나 싶었다.
나는 돌려받은 검집을 다시 옆구리에 차고 대원들과 함께 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 - - - - - - -!”
하지만 그 순간 한참 내 검을 구경하던 울지 않는 새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마치 엉덩이가 물린 망아지처럼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을 못 하는 대신 귀가 좋아 순찰대에서 파수꾼 역할을 맡은 대원이다.
분명 무슨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난초꽃이 다급히 물었다.
“뭔가를 들은 거야? 어딘데?”
“- - - - - - -!”
이 척박한 산맥에선 같은 마을 주민 빼고는 모든 게 적이고 위협이다.
그러니 이런 소리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빠르게 대비해야 했다.
온몸을 허우적거리던 울지 않는 새가 한 동물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아우우우.
하늘을 향해 우는 맹수.
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