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검은머리 기사왕 26화
마을에 무사히 도착한 다음 날 새벽에도 어김없이 눈투성이와 검술을 익혔다.
보름이 넘는 강행군으로 힘들 법도 했지만, 아이가 강하게 원해서였다.
내심 눈투성이도 알고 있던 거다.
수련 장소인 저 깊은 산맥으로 들어간다면 한동안 나를 보지 못할 거라는 걸 말이다.
“음.”
어찌 보면 사제관계를 맺고 처음으로 멀리 떨어지게 되는 순간이다.
나는 도대체 어떤 충고를 해줘야 할지 고민하며 조용히 팔짱을 끼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해줄 말이 없었다.
눈투성이는 그 어떤 후보보다 잘 해왔고 앞으로 잘 해낼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잘할 거다.”
그래, 괜한 말로 혼동을 주지 말자.
나는 언제나 그렇듯 스스로를 믿으라는 말을 끝으로 짧은 충고를 끝냈다.
괜히 삐져나온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자 저 멀리 출발 준비를 끝낸 회색 늑대가 외쳤다.
“갈 시간이다.”
회색 늑대와 그의 제자 보리 이삭은 이미 큰 가방을 멘 채 서 있었다.
눈투성이가 준비되면 당장이라도 깊은 산맥으로 진입할 기세였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구나.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큰 가방을 짊어진 눈투성이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잘 다녀와라.”
손에 품기만 해선 날 수 없다.
나는 눈투성이가 그 어떤 새보다 높이 날기를 기원하며 조용히 미련을 놓았다.
꾹.
“?”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따뜻한 것이 걷다 말고 되돌아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뒤돌아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눈투성이가 자기 나름대로 인사를 해온 것이다.
“다녀올게요, 스승님.”
포옹은 미련만큼이나 짧았다.
하지만 묘한 온기만은 여전히 남아 속에 품었던 걱정을 잠시 내려놓게 했다.
눈투성이가 손을 흔든다.
그러자 나를 향해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 회색 늑대가 그 둘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산맥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찌르르 - - -.
봄이 오는지 새가 돌아왔다.
나는 만개한 북방의 봄날, 다시 돌아올 눈투성이를 기다리며 걸어왔던 방향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왕에게 검을 배우는 순간이 하루하루 설레고 들떴던 나날을 말이다.
물론 지금은 몸도 마음도 늙어 그런 감정조차 무뎌졌지만, 나는 추억과 회상이라는 상흔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내 자랑이 되겠구나.’
나는 거처로 돌아가는 길, 한꼬집 남아있던 미련을 깔끔하게 털어냈다.
오러는 더 이상 내 수치가 아니었다.
* * *
작년이었다면 후보생이 오러를 수련하는 동안 산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축내거나 강에서 낚시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해는 마을이라는 어엿한 거점이 생겼고 내가 회색 늑대가 대신해 도와줄 수 있는 일도 많아 보였다.
물론 영주가 내린 권한을 가져와 호가호위하려는 생각은 없었기에 지원자를 가장 자주 뽑는 순찰대에 자진해서 들어갔다.
원래 헌신이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듣기로는 병사들 사이에서 사상자가 제일 많이 나오는 보직이라고 하는데, 가서 사상자 비율도 줄여줄 겸 노하우도 몇 가지 전수해주고 오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당장 내일부터 준비 기간이란 말을 기억하며 주머니에서 곡식 낱알을 꺼냈다.
구르르륵, 구륵.
눈 비둘기가 파닥파닥 날아와 곡식 낱알이 가득한 내 손바닥 위에 앉았다.
하지만 얼마나 훈련을 잘 시켰는지 먹음직스러운 먹이 앞에서도 부리를 쪼지 않았다.
기특한 녀석이다.
섣부른 욕심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녀석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뽀송뽀송한 비둘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곡식 낱알을 먹여주었다.
“훈련이 잘됐죠?”
그러자 비둘기 조련을 맡은 어린 사육사가 웃는 낯으로 다가와 물었다.
새끼 때부터 키워온 눈 비둘기들을 내게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훌륭합니다.”
새장을 가득 채운 눈 비둘기들은 지금 당장 현장에 투입되어도 손색이 없었다.
나는 비록 어리지만, 능력 있는 사육사를 아낌없이 추켜세워주었다.
“숫자가 상당히 많군요. 이 전서구들 모두 전초기지로 향하는 겁니까?”
“네, 오전 오후 한 번씩 되돌아와서 저희 마을에 상황 보고를 해줍니다.”
“체계적이군요.”
노련한 회색 늑대는 마을과 떨어진 주요 거점이나 분쟁 구역에 주변을 관찰할 수 있는 작은 전초기지들을 세워두었다.
그리고 전서구를 활용해 이 드넓은 산악지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위협을 사전에 보고 받고 효율적인 대처를 했다.
유기적이고 체계적이다.
이런 식으로 방어 시설을 운용한다면 많은 인원 없이도 넓은 구역을 통제할 수 있다.
나는 또 한 번 배워간다는 생각으로 우리 영지에 적용할 방법을 골똘히 고민했다.
하지만 상념이 채 끝나기도 전, 새장에서 조그마한 눈 비둘기 한 마리를 꺼내온 사육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 녀석이 바로 산맥으로 갈 줄 아는 전서구입니다. 영주님이 사전에 허락하셨으니 일주일에 한 번씩 쓰실 수 있으세요.”
이곳을 방문할 원래 목적을 잊을뻔했다.
나는 훈련 기간, 유일하게 깊은 산맥과 소식을 주고받게 해줄 눈 비둘기를 양손으로 소중히 받아 들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달콤한 간식을 통에 넣은 뒤 창밖으로 비둘기를 날렸다.
푸드득!
이 전서구는 눈투성이의 안부라도 간간이 확인하라는 회색 늑대의 배려다.
하지만 나는 편지를 보내기보다는 눈투성이가 좋아하는 달콤한 간식을 넣어 보냈다.
아무도 주지 말고 혼자 먹어라.
서서히 산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비둘기를 보고 있자니 희미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참 업무를 보던 사육사가 내게 물었다.
“끝나셨습니까?”
“네,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볼 일은 다 끝났다.
이제 지원한 순찰대 분위기도 알아볼 겸 부지런히 마을을 돌아다녀 봐야겠다.
나는 먼지가 쌓인 후드를 팡팡 털어 뒤집어쓴 뒤 무기와 함께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나가기 위해 발소리를 죽여 문밖으로 나서려 했다.
“?”
하지만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은 그 순간 한 문서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문서는 사육사가 방금 날아온 전서구를 받아 한참 작성 중인 답장이었다.
‘정체불명 늑대 무리와 접촉하지 말 것, 반나절 뒤 막사에서 순찰대를 보내겠음.’
‘파견 인력은 작은 곰, 난초꽃, 울지 않는 새 포함해 4명으로 예정.’
‘보리 이삭과 영주님은 부재중.’
내용은 전초 기지에서 받은 상황 보고와 그에 대응하는 적절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문장과 단어들이 전부 암호화되지 않은 원어라는 것이다.
최대한 나서지 않으려 했던 나는 이번만큼은 무례를 범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대로 보내는 겁니까?”
“네, 왜요? 문제 있나요?”
당연히 문제 있다.
개인 간 주고받은 편지도 아니고 누가 군사 정보를 암호화 없이 보내는가.
누군가 작정하고 전서구를 노린다면 문서가 유출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것도 마을 위치와 병사 수 심지어 영주라는 그 명칭까지 말이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곧 봄입니다. 작년은 어땠을지 몰라도 올해는 당장 바꾸세요. 단어만 대체하면 되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북방에서 봄이란 단순히 눈과 얼음이 녹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 모든 전쟁을 되돌아보면 대부분 침공은 봄과 함께 시작되었다.
조심해야 한다.
특히나 내려갔던 오크 숙영지들이 다시 북방으로 파견되기 시작하는 지금 같을 때는 더더욱 몸을 사리고 있어야 했다.
오죽하면 내가 우리 마을에도 더 이상 정찰 범위를 늘리지 말라고 충고했겠는가.
이건 허투루 보고 넘길 사항이 아니었다.
“아······. 예.”
“꼭! 꼭 하셔야 합니다.”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어린 사육사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내가 두 번 세 번 강조하며 말하자,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심성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으니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몰려오는 불안감을 애써 떨쳐내며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음에 다시 찾아와봐야겠다.
그래, 다음에 꼭.
* * *
“참나, 아는 척하긴.”
부러지는 검이 문을 닫고 나가자 어린 사육사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충고를 듣는 척은커녕 여전히 원어로 문서를 작성하며 구시렁거린다.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말했다고 한들 참견할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다.
엊그제 겨우 마을로 들어온 이방인이 실무를 안다면 얼마나 알겠는가?
자신은 전서구 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여기까지 왔고 여태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정말 지나친 간섭이었다.
어린 사육사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거짓으로 자존심을 채우려 했다.
“음.”
하지만 한껏 짜증을 부리고 나니 몰려오는 불안감을 내심 어쩔 수 없었다.
듣기로는 그 남자와 같이 온 소녀가 영주님과 함께 떠났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중요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어린 사육사는 상관에게 말이라도 해봐야 하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조금 전 남자가 닫고 나간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야! 밥 먹자!”
“깜, 깜짝이야.”
“뭐야? 왜 그렇게 놀라?”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어릴 때부터 이웃으로 친하게 지내던 동갑내기 친구였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었기에 자신과 밥을 먹고자 위층까지 찾아온 것이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구나.
어린 사육사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사육사는 답장을 전부 작성한 전보를 비둘기들 다를 메어주고 밖으로 날려냈다.
그리고 자신을 재촉하는 친구를 따라 문을 닫고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어린 사육사는 문득 조금 전 고민이 생각났는지 천진난만 웃고 있는 친구를 향해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 있잖아, 이번에 온 남자랑 여자애 관련해서 혹시 들은 거 없어?”
“응? 그 사람들? 왜?”
“그냥 궁금해서.”
“어······. 여자애는 누군지 잘 모르겠고 남자는 순찰대에 들어갔다는데?”
마을에서 가장 위험한 보직이라고 소문난 순찰대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어린 사육사는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남자가 정말 중요한 손님이었다면 그리 힘든 순찰대로 들어갈 리가 없었다.
오직 여자애만 영주님을 따라간 것도 그렇고, 역시 아무것도 아닌 남자였다.
어린 사육사는 이른 시일 내로 바꿔야 한다는 그 충고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진심 같은 빈말로 위로를 내뱉었다.
“참 안됐네.”
“그러게······. 봄이라 더 힘들다는데.”
회색 늑대는 쓸데없이 무심했다.
부러지는 검은 지나치게 겸손했다.
그 둘 중 하나라도 명성이라는 것을 티 냈다면 이 어리석은 사육사는 그 충고를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세상 만물, 인간이 모두 의식할 수 없고 사람 마음은 제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이미 불길한 우연은 또 다른 불운함과 얽혀 실처럼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날아가 버린 비둘기를 따라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하지만 두 가지 갈림길 끝에는 모든 것을 파국으로 몰고 갈 미래가 아닌,
마을 한복판을 뚜벅뚜벅 걷는 ‘부러지는 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시작된 위험과 영웅의 등장.
북방은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