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검은머리 기사왕 25화
회색 늑대는 전사다.
구태여 기사 직위를 받지 않더라도 명예를 알았으며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부동의 강직함 또한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왕 사후 그는 변했다.
삶을 살아가던 충성의 가치가 사라지자, 마치 무리를 떨어져 나온 우두머리 늑대처럼 세상을 달관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내가 그날 또 다른 후계를 약속하지 않았더라면 회색늑대는 아무도 모르는 오지로 홀로 떠나가 버리지 않았을까.
그만큼 그는 바람 같은 사람이었고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전우였다.
그리고 1년 만에 만난 늑대는 여전하면서도 무언가 조금 바뀌어있었다.
“부러지는 검.”
거대한 몸집, 곰을 반으로 갈랐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북방 대검, 그리고 이제는 그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어버린 늑대 갑옷.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는 회색 늑대가 내게 인사하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이름을 불렀다.
“······회색늑대.”
오랜만에 만났다고 해서 반갑게 포옹할 정도로 돈독한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안부는 확인해 왔기에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그 상판이 멀쩡한가를 조용히 확인해 보았다.
한동안 이어지는 무거운 침묵.
회색 늑대는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다고 들었다. 꼭 줄을 설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네 마을에선 네 원칙을 따른다.”
“······음, 그렇지.”
자기 영역을 중요시하는 회색 늑대는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회관 앞에서 큰 소란 없이 만남을 청한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회색 늑대는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환영한다.”
작년보다 분위기가 좋다.
나는 지금이 제자를 소개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 생각해, 눈투성이를 앞에 세워 회색 늑대를 향해 엄숙히 말했다.
“이번 후계로 뽑힌 후보다. 이름은 눈투성이, 이 아이에게 오러를 가르쳐다오.”
매번 이 말을 할 때마다 스스로 느끼는 자괴감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당당하게 내 제자를 가르쳐달라 말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맹약을 지킨다.”
내가 아무리 무릎을 꿇어 자존심을 팔았다고 해도 명예를 걸고 지켜낸 맹약의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옛 전우 회색 늑대는 이번에도 맹약을 충실하게 이행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사족이 붙었다.
올해는 한 가지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전에 소개부터 하지.”
“음!”
원래라면 후보생과 나 그리고 회색 늑대만이 이 맹약의 참가자였다.
그러나 올해에는 또 다른 이가 이 엄숙한 의식을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경! 참으로 반갑습니다!”
소개부터 하자는 목소리에 금발을 찰랑거리며 일어나는 익숙한 아이.
그는 회관 앞에서 주민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던 바로 그 금발 소년이었다.
회색늑대가 짧게 소개했다.
“보리 이삭, 내 첫 번째 제자다.”
나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회관에 들어오기 전부터 설마 설마 했지만, 그 회색 늑대가 정말 제자를 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런 오지에서 세력을 이룬 이유도 다 저 소년 때문이란 말인가.
나는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안감에 늑대를 똑바로 주시했다.
제자, 마을, 성장.
지금 회색 늑대의 행보는 마치 우리가 걸어온 길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었다.
마치 이 보리 이삭이라 불리는 소년을 후계 후보로 올린 것처럼 말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회색 늑대를 노려보며 조용히 물었다.
“후계 후보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니어야 할 거다.”
내 자존심이 짓밟히건 상관없다.
다른 스승에게 제자를 맡기는 치욕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야 할 한 가지가 있었다.
‘후계를 찾아다오.’
기사왕은 자신이 죽고 난 후 후계 문제로 인간이 분열할 것을 걱정했다.
그렇기에 오직 한 사람만이 후계를 정해야 한다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그건 한낱 자존심과 미련 따위가 아니다.
왕의 말은 천명이다.
그 천명을 지킬 의무가 있는 내게 있어 남이 그것을 절대로 어기게 둘 수 없었다.
스륵.
만약 여기서 그걸 부정한다면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생사결이다.
나는 가죽으로 감싸놓았던 검을 풀며 옛 전우에게 무언으로 경고했다.
“- - - - - - - - -.”
공기가 짓눌린다.
화롯불은 마치 비명을 지르듯 화르르 타올랐고 양쪽 기세를 이겨내지 못한 눈투성이와 보리 이삭이 바짝 얼어붙는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기세.
숨조차 쉬기 힘든 살기의 밀도.
하지만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기 전 회색 늑대가 먼저 한발 뒤로 물러났다.
“······잠시 잊고 있었다. 명심하지.”
하아, 하아.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쨍하고 깨졌다.
그러자 억지로 힘을 주고 있던 보리 이삭이 거친 숨을 뱉었고 뒤이어 식은땀을 흘리던 눈투성이가 눈을 질끈 감는다.
하마터면 모든 게 파탄 날뻔했다.
나는 실수를 인정하는 회색 늑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뽑은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답지 않게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아 언뜻 나를 살짝 떠본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내 의중이 무뎌지지 않음을 확인한 회색 늑대는 엄중히 공표했다.
“차별은 없을 거다. 내 제자에게도, 네 제자에게도 똑같은 것을 가르친다.”
순간 불쾌했지만, 확답을 받았다.
일단 상황을 일단락한 나는 회색 늑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눈투성이를 일으켜 세운 뒤 회관 밖을 나가 이미 마련되어있다고 들은 거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옆을 보자 눈투성이가 걱정 가득한 눈동자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말을 아끼며 서서히 사라지는 황혼 뒤로 감정을 숨겼다.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났다.
* * *
“하, 하하······. 그분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입니다, 스승님.”
“원래 그런 녀석이다.”
부러지는 검이 회관을 나가자, 침을 꿀꺽 삼킨 보리 이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금방이라도 베일 듯 서늘해진 목덜미를 매만진다.
아무리 늙었다고 한들 역시 검성은 역시 검성인가?
적수가 없다고 생각한 스승을 향해 그리 살기를 뿜어내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보리 이삭은 어영부영 들떠버린 불만과 함께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
불편한 침묵 속에 살며시 눈치를 본다.
스승인 회색 늑대는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골똘하게 고민 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만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스승이지만, 참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잠시 뒤 회색늑대가 물었다.
“그 아이를 봤나?”
“······네, 봤습니다.”
“좋든 싫든 같이 수련하게 될 거다. 그러니 최대한 열심히 하도록.”
보리 이삭의 얼굴이 환해졌다.
당연히 스승이 말한 ‘최대한 열심히’라는 뜻은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여실히 증명하라는 의미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8년이나 지난 구닥다리 유훈이다.
가장 강한 자가 왕이 되어야 하는 게 세상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아무리 적임자의 선택이 아니라 할지라도 회색 늑대 제자인 자신은 충분히 왕위에 도전할 자격이 있었다.
보리 이삭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반드시 이겨 보이겠습니다.”
그 대단한 회색 늑대가 세상 제일가는 재능이라 인정한 게 바로 나다.
그깟 조그마한 꼬마 따위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포부를 들은 회색 늑대는 단호한 목소리로 찬물을 끼얹었다.
“이기라는 소리가 아니다.”
“······예?”
“그 남자 눈에 들 수 있도록 해.”
순간 보리 이삭이 얼굴을 붉힌다.
그동안 가득 차올랐던 자신감이 마치 거품처럼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오러 없는 반쪽짜리 기사가 무엇이 무서워 저러는 것일까.
그가 아무리 과거 검성이라 불린다고 한들 회색 늑대 앞에서는 한낱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검사일뿐이었다.
보리 이삭은 결국 참지 못했다.
“스승님, 8년이라 했습니다. 그 8년 동안 데려온 후보들이 하나 같이 다 실패했는데, 이번이라고 성공하겠습니까?”
보리 이삭이 보기에는 왕은 바보고 부러지는 검은 고집만 센 멍청이다.
하지만 그 오만함을 감히 스승 앞에서 내뱉을 수 없었기에 여태 실패만 해온 과업을 들먹이며 그를 헐뜯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스승님! 이 귀중한 시간을 언제까지 낭비해야 합니까? 그나마 가능성 있는 저희가 해야 합니다.”
“············.”
됐다, 매번 이 주제가 나오면 자리를 피하는 스승이 입을 다물었다.
한발 뒤로 물러나긴 했어도 조금 전 상황이 불쾌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스승을 이해했다고 착각한 보리 이삭은 신이 나 계속 떠들었다.
“아무리 검을 잘 휘두른다고 한들 결국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기사입니다. 역시 그런 자격 없는 자가 할 게 아니라 저와 스승님이······! 컥, 끅!”
쾅!
보리 이삭은 그대로 멱살을 잡혔다.
신나서 열변을 토하느라 스승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크윽, 컥!”
보리 이삭은 온몸을 버둥거렸다.
그리고 겁먹은 눈동자로 목을 붙잡아 들어 올린 스승을 바라보았다.
회색 늑대는 죽일 듯이 이삭을 노려보며 차가운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왕이 살아 있었으면 감히 쳐다도 보지 못했을 녀석이 뭐? 자격? 오냐오냐 가르쳤더니 주제를 모르는구나.”
“컥, 끅······. 잘, 잘못···!”
“아무리 왕국이 망했다고 해도 네놈 따위가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 멍청하고 우둔한 녀석아!”
쿵!
쿨럭! 쿨럭!
회색 늑대는 손을 놓았다.
그러자 보리 이삭은 바닥에 형편없이 떨어지며 기침과 함께 숨을 몰아쉰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보리 이삭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회색 늑대는 그러거나 말거나 마지막 경고와 함께 그 오만함을 짓밟았다.
“내 앞이라 다행인 줄 알아라. 어디 가서 그리 말했으면 목이 잘렸을 테니까.”
단순한 허풍이 아니다.
정말 퇴역한 병사들이나 기사들 앞에서 저런 말을 했다가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목이 잘려 늑대 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부러지는 검은 대단한 사내였고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제자라고 할지라도 이런 핏덩이에게 그가 무시당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회색 늑대는 한참 동안 보리 이삭을 노려보다 처음으로 벌을 내렸다.
“오늘 일은 실망이다. 한동안 근신하면서 네 죄가 무엇인지 반성해라.”
“·········알겠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다.
회색 늑대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제자를 뒤로한 채 그렇게 밖을 나섰다.
쿵!
문이 거칠게 닫혔다.
모두가 떠난 회관에는 오직 보리 이삭만이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삭은 과연 반성하고 있을까?
아니, 정말 죄를 알고 반성하고 있다면 회색 늑대가 떠난 문을 이리 표독하게 노려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금발이 아름다운 소년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다른 속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겨운 선민의식.
스승과 주변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감추고 있었지만, 녀석은 웃는 가면 뒤로 비틀린 질투와 오만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속내는 자존심이 철저히 짓밟힌 이 순간 장작을 먹은 불처럼 서서히 몸집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후.”
하지만 보리 이삭은 안다.
선량하게 보이는 이 모습이 지금 더 도움이 될 거라는 걸 말이다.
놈은 언제 문을 노려봤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웃는 얼굴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