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검은머리 기사왕 24화
“다 왔다.”
“정, 정말요? 후우...”
가파른 절벽을 올라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땀으로 이마를 촉촉하게 적신 눈투성이가 손을 잡고 위로 올라온다.
요즘 체력이 부쩍 늘었다고 하지만, 거의 90도나 마찬가지인 험준한 산세 앞에 결국 항복을 외치고 만 눈투성이.
아마 이동 거리가 조금만 더 멀었어도 중간에 퍼져 끙끙 앓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산맥까지 잘 도착했으니, 이제 회색 늑대가 은거 중인 장소만 찾아가면 여정도 이제 끝이 난다.
꿀꺽, 꿀꺽.
땀을 닦은 눈투성이는 가죽으로 만든 수통에서 잘도 물을 쯉쯉 빨아 먹는다.
그사이 나는 매번 같은 위치였던 은신처 위치를 확인하고자 고개를 들었다.
“?”
하지만 집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오직 녹색 나무와 눈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분명 저기가 맞을 텐데, 그 사이 은신처 위치를 바꾸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고 연락이 닿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디 가서 회색 늑대를 찾는단 말인가.
나는 머리가 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미간을 찡그리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가만히 물을 마시고 있던 눈투성이가 깜짝 놀란다.
“앗, 저기!”
무언가를 발견했나?
덩달아 놀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눈투성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아······.”
그러자 그곳에는 주변 자연경관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마을 하나가 산맥 아래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듯 하늘로 떠오르는 장작 연기와 부지런히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
나무로 지어진 마을은 1년 새 급히 만들어진 티가 나기는 했지만, 유동인구를 보아 저 규모만큼은 진짜였다.
눈투성이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희 잘못 온 거 아니죠······?”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찾아갔는데 기억 속 작은 마을은 사라지고 처음 보는 도시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기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연기가 솔솔 올라오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 * *
처음은 잠시 왕래가 없었던 사이 산적이 자리라도 잡았나 의심했었다.
하지만 산길을 통해 오고 가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니 대부분이 평범한 농부거나 주변에서 작은 동물을 잡는 사냥꾼들이었다.
피를 본 놈은 얼굴에서 보이는 법이다.
이들은 고된 삶을 살고 있을지언정 남을 죽여가며 연명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안심이다.
예리한 눈으로 마을을 관찰한 나는 이제 직접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보이지 않도록 잘 감싸.”
“네.”
일단 들고 온 검 두 자루는 미리 챙겨온 가죽과 끈으로 칭칭 둘러 등에 멨다.
그리고 날카로운 단검만을 품속에 잘 숨겨둔 뒤 쓰고 있던 가죽 후드를 벗었다.
다각, 다각, 다각.
마침 저 멀리서 망아지가 이끄는 낡은 수레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겨우내 잘 썩혀둔 비료를 잘 뿌리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인 농부로 보였다.
사박.
우리는 마치 한참 길을 걷고 있던 행인처럼 수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치 주변을 구경하듯 천천히 걸음을 늦추며 자연스럽게 수레와 나란히 했다.
힐끔 우리를 쳐다보는 농부.
눈투성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얼굴로 농부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풀렸죠?”
치안이 불안정한 오지에서 이런 길거리 인사는 칼 맞기 딱 좋은 행위다.
하지만 근방이 그렇게 치안이 좋지 않았다면 이 농부가 길거리에서 행인을 발견하고도 태연스럽게 다가올 리가 없었다.
마치 겉모습을 살피듯 나와 눈투성이를 천천히 훑어보는 순박한 눈빛.
농부는 아이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덕분에 수레를 몰기 편하구나. 이분은 아버지시니?”
“네!”
얼떨결에 딸과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경계를 풀기 좋은 역할은 없었기에 나 또한 최대한 선량하게 굴었다.
참으로 다행이다.
마을 주인이 아직 누군지는 몰라도 오고 가는 길거리 치안을 잘 관리한 모양이다.
한동안 눈투성이와 함께 담소를 나누던 농부는 우리에게 탈것을 권유했다.
“타시겠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안될 건 또 뭐요.”
안되는 게 뭐긴.
그렇게 경계심 없이 굴다가 뒤통수에 칼 맞기 딱 좋아서 그렇지.
하지만 나는 굳이 속내를 내놓지 않고 눈투성이와 함께 수레 위에 걸터앉았다.
꾸리꾸리한 비료 냄새가 코끝을 찔렀지만,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농부는 다시 수레를 몰았다.
망아지가 늘어난 무게 때문인지 투정을 부렸지만, 다행히 수레는 움직였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멀리서 오셨나 보오.”
“그렇게 보입니까?”
“뭐, 다들 멀리서 오지. 댁들도 소문 듣고 온 사람들 아니오?”
몸보다 큰 배낭, 더러운 몰골, 피곤한 얼굴.
인제 보니 우리, 마을로 유입되던 화전민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침 잘됐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맞습니다. 아내가 먼저 떠나고 나니 딸 아이가 계속 눈에 밟히더군요. 조금이라도 안전한 정착지를 찾으려고 왔습니다.”
“에잉, 쯔쯔······. 세상 참 무심하지.”
있지도 않은 아내를 팔았다.
하지만 그 거짓말에 너무나 쉽게 넘어간 농부는 자기가 다 슬프다는 얼굴로 나와 눈투성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마 꾀죄죄한 우리 모습에서 어미를 잃고 방황하는 불쌍한 가족을 본 모양이다.
“그럼 잘 찾아온 거요. 다른 영지와는 다르게 여기는 기사님이 계시니까. 이 근방 도적놈들도 다 그분한테 목이 베였지.”
“기사요? 정말 기사가 있습니까?”
“그럼! 아마 들으면 깜짝 놀랄 거요! 회색 늑대 경은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드디어 찾았다.
은거지를 벗어나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번듯한 마을을 꾸리고 있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장소를 싫어하는 양반으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 번듯한 마을에서 촌장 일을 하는 걸까.
나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가 이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봐야겠다.
첫 단추가 잘 끼워진 느낌을 강하게 받은 우리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농부가 멈추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안사람이 미인이셨나 보오. 따님이 이렇게 예쁜 걸 보니.”
“아, 예. 그렇죠, 뭐.”
“허허허, 다행이야. 아버지를 안 닮아서!”
“············.”
눈투성이와 농부가 좋다고 웃었다.
나는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를 슥 쓰다듬으며 멋쩍게 따라 웃었다.
* * *
한 정 많은 농부 덕분에 정문은 물론 마을 안까지 아무런 탈 없이 들어왔다.
이미 이 마을 주민인 농부가 우리 사정을 열심히 설명한 덕도 있고 경비들도 처음부터 유입되는 주민들을 꺼리지 않았다.
무력에 자신 있는 회색 늑대답다.
그렇게 농부와 눈물겨운 작별을 끝낸 우리는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와, 살아있는 생선이에요!”
“근처에 강이 있는 모양이야.”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반긴 것은 상당한 규모의 목조 건물들과 그 중앙에 형성되어있는 작은 시장이었다.
물론 화폐가 아닌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지는 기초적인 시장이었지만, 분명한 건 이들이 생산과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이 근방 화전민들을 전부 모아 하나의 세력을 만든 것이 아닐까.
회색 늑대는 또 다른 지역에서 마을을 꾸리는 우리처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꼬마 손님, 하나 드셔보세요.”
“감, 감사합니다!”
시장 인심이 좋다.
눈투성이와 함께 돌아다니며 주민들 얼굴을 확인한 나는 회색 늑대가 좋은 지도자로서 이들을 이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승님도 드세요.”
냠냠.
한참 과일을 까먹던 눈투성이가 내 입으로 작은 조각을 넣어준다.
하지만 나는 그 맛을 느낄 겨를도 없이 바삐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곳을 다스리는 자가 회색 늑대인 것을 안 이상 하루라도 빨리 만나야 한다.
“- - - - - - -.”
보통 이렇게 큰 마을이 생기면 공동체 회의를 하거나 자잘한 일들을 처리할 때 이용되는 촌장 집이나 회관이 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시장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 끝에는 회색 늑대가 살던 집 양식과 비슷한 건물이 있었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한테서 정신이 팔린 눈투성이를 툭툭 쳐 끌어당기고 그 회관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은 그렇게 처리되었소, 나머지 사항은 나중에 따로 보고하시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마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치안을 유지 시켜 줄 무력 수단이 필수다.
대표적으로 촌장의 자경대가 그랬고 잘 훈련된 우리 병사들이 그랬다.
그리고 회색 늑대 또한 그 기본적인 요소를 잘 알고 있는지, 마을 회관으로 향하는 길목 앞에는 한눈에 보아도 노련해 보이는 전사들이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육중한 근육, 당장이라도 머리통을 쪼개 놓을 것 같은 강철 도끼.
그들의 모습은 마치 회색 늑대가 이끌었던 허스칼을 연상케 했다.
물론 그 역전의 용사들을 완벽히 따라잡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다음!”
그들은 마을 치안과 안전을 책임지는 동시에 촌장과 마을 주민 사이를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도 겸임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길목 앞에는 촌장을 찾아온 마을 주민들이 길게 줄을 이루고 있었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꼴등이었다.
“줄이기네요.”
“조금만 기다리자, 괜한 소란은 금물이야.”
회색 늑대는 규율과 원칙을 신봉한다.
아무리 아는 사이라고 해도 이 정해진 규칙을 깨는 것은 싫어할 것이다.
나는 몸이 조금 고되기는 하지만, 눈투성이와 함께 묵묵히 줄을 기다렸다.
다른 후보들과 다르게 참을성이 있는 아이가 그 어느 때보다 고마웠다.
철컥, 철컥, 철컥.
“?”
하지만 짐을 잠시 내려놓으려는 그 순간 딱딱한 병장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을 중앙을 가로지른 10명 남짓한 전사들이 회관을 향해 걸어온 것이다.
회색늑대인가?
나는 마침 잘되었다는 생각에 황급히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나 그 기대는 카랑카랑 들려오는 한 소년의 목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하하, 다들 수고 많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백 금발, 마치 동화 속에서 가져온 듯한 검과 화려한 장식.
10명 남짓한 허스칼 앞에는 빛나는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소년이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내가 없는 사이 별일 없었나? 다들 표정이 밝은 게 내가 다 기분이 좋군.”
이 척박한 오지와 어울리지 않는 소년은 마치 저 서부 귀쟁이 놈들의 귀족들을 보듯 기품과 과장이 철철 흘러넘쳤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 모습이 익숙하기라도 한지 환하게 웃는 얼굴로 허리를 숙여 자발적인 예를 표하기 시작한다.
옷자락이라도 한번 잡기 위해 손을 뻗어보는 노파와 마치 동화 속 왕자님을 만나기라도 한 듯 볼을 붉히는 마을 여자들.
나는 유명한 희극 배우처럼 사람들 향해 손을 흔들다 이내 회관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조용히 주시했다.
감이 좋지 않다.
무언가 본능적인 거부감이 내 목덜미를 핥다 못해 피부를 건드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