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검은머리 기사왕 23화
하루도 쉬지 않고 검술을 수련한 눈투성이는 어느덧 가장 기초라 불리는 북방 검술 1형을 완벽히 깨우쳤다.
물론 말이 좋아 기초고 1형이지 눈투성이가 검을 잡은 시간을 생각해본다면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성장 속도다.
오죽하면 온갖 천재들을 보며 살았던 나조차 거센 동요를 감추지 못했을까.
아이는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그 빛을 더해가는 보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급해졌다.
이 세상 누구보다 검을 잘 가르쳐줄 수 있는 내게는 단 한 가지 남들보다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러.’
그것은 바로 오러, 어머니 북방에게 사랑을 받는 저들과 달리 한낱 이방인인 나는 오러를 몸에 지닐 수가 없었다.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기사가 도대체 무슨 수로 오러를 가르쳐준단 말인가?
눈투성이를 왕으로 만들기엔 이 스승이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러를 수련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그 부족한 점을 채워줄 또 다른 조력자가 여태 있었으니까.
‘회색늑대.’
왕에게는 수많은 영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영웅 중 유난히 특출난 자가 다섯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수많은 허스칼을 이끌던 회색늑대였다.
타고난 용력으로 휘두르는 대검, 거대한 바위도 단칼에 잘라버리는 맹렬한 오러.
검의 끝을 본 것이 나였다면 오러의 끝을 본 자는 바로 회색 늑대였다.
그래 내가 가르칠 수 없다면 또 다른 스승이 가르쳐 주면 된다.
나는 8년 전 그에게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나올 후보생들에게 오러 수련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러자 그 또한 거절하지 않았고,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 험난한 여정은 벌써 8년째 지속이 되고 있었다.
이미 수많은 후보생이 회색 늑대 밑에서 오러를 배우고 깨우쳤다.
그러니 눈투성이 또 한 그 과정을 거쳐 오러를 다루는 수련을 받게 될 것이다.
“이대로만 하면 될 겁니다.”
“······최선을 다하겠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글을 읽을 줄 아는 자를 몇 명 뽑았다.
그리고 촌장에게 내가 향후 마을을 꾸려나갈 계획표를 넘겨주었다.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우리가 돌아왔을 때쯤 마을은 충분한 거점이 되어있을 것이다.
나는 부디 촌장과 붉은 강철이 잘 해내기를 기도하며 그렇게 집을 나섰다.
하지만 배웅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을 입구에는 주민들과 병사들이 몰려와 떠나가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 무사히 돌아오세요!’
우리가 마을을 완전히 떠나는 것도 아닌데 다들 왜들 그리 난리인지.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던 주민들이 눈물로 배웅을 해주자 눈투성이는 결국 작게 울음을 터트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그렇게 마을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 산 하나를 넘자 고향 같던 마을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서로 입을 꾹 다문 우리.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알 수 없는 서먹함의 원인인 바로 나였다.
“섭섭해 보이더구나.”
“·········.”
분명 티 내지 않으려는 게 보인다.
하지만 말을 우물쭈물 아끼고 눈동자를 피하는 모습에서 나는 아이가 어딘가 섭섭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 섭섭함의 원인은 바로 자신이 내가 아닌 모르는 사람한테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다른 후보들은 당장이라도 오러를 배우고 싶어 하다못해 집착까지 하는데, 왜 눈투성이만 이리 욕심이 없는 것일까.
나는 훗날 이런 순수함이 경지를 방해할까 싶어 잘 달래려고 했다.
“그래. 멀리 가는 게 조금은 무섭기는 하겠지만, 회색 늑대도 그렇게······.”
“그런 게 아니에요.”
하지만 걸음을 멈춘 눈투성이는 단호한 얼굴로 말을 잘랐다.
그리고 여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엄숙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저는 스승님이 자랑스러워요. 그딴 오러 같은 거 배울 수 없다고 해도요.”
그딴 오러라니, 도대체 오러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오러가 없으면 기사가 될 수 없고 오러가 없으면 검이 부러진다.
그래, 부러지는 검이 이름이 되어버린 나처럼 평생을 치욕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노력해서 될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 얼마나 아픈지 눈투성이는 알고나 있을까.
“- - - - - - -.”
하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그 울분을 내뱉지 못했다.
왜냐하면, 눈투성이는 어느덧 심장이 뛰고 있을 왼쪽 가슴 위로 조용히 손을 올려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말해주던 기사왕처럼.
“저는 오러보다 더 중요한 걸 배웠어요. 그리고 그건 오직 스승님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소중한 거예요.”
더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때론 자존심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오러를 가르치기 위해 무릎을 꿇었던 날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후보들이 나를 무시하기 시작한 매 순간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끝내 홀로 삭혔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언젠간 좋은 결과로 찾아오리라 믿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과실을 8년이 지난 오늘 봄날 드디어 보게 되었다.
나는 떨림을 감추며 말했다.
“······내 자랑이 되겠구나.”
“네, 스승님.”
왕의 스승이라니.
죽기 전 듣기 딱 좋은 말이다.
나는 눈투성이를 따라 웃으며 그렇게 산맥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 * *
“세계수는?”
“여전히 대답이 없습니다. 장로님들 말로는 꼭 불쾌해하는 것 같다고······.”
기사왕을 죽이고 인간 왕국마저 멸망시킨 엘프들은 유례없는 황금기를 맞았다.
잠재적 적국인 오크 놈들마저 내전으로 바쁘니 관심을 문명의 발전으로 돌린 것이다.
부족 통합으로 서서히 늘어나는 인구, 고도화된 문명을 통해 싹을 피우기 시작한 과학 기술과 주옥같은 문화들.
여왕이 사는 궁전은 아름다운 황금으로 지어졌고 분수에선 꿀처럼 달콤한 물이 마치 강물처럼 쪼르륵 흘러나왔다.
그리고 도시는 굶주리는 이 하나 없으니 오직 웃는 소리만이 들린다 전해졌다.
이상향, 낙원, 영원한 엘프 제국.
세계수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번영이라는 가지는 그렇게 불멸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번영하되 박애(愛)하지 않고 신성하되 순수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유일한 지성체라 생각한 그 오만함이 스스로를 좀먹기 시작한 것이다.
타 종족을 향한 온갖 핍박과 노예화.
패자는 용납하지 않은 차가운 경쟁 사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국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병들어 있었다.
그것도 역겨움이라는 불치병에.
“불쾌? 그럴 이유가 있어? 겨우 나무 하나가 속을 이리 썩이는군.”
세계수는 신성하다.
세계수는 모든 엘프의 어머니다.
엘프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그런 말들은 이제 옛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엘프들은 그 전통이 허울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열매 하나당 100년.
항상 신전에 모셔지던 세계수의 열매는 왕족들이 수명 연장을 위해 사용하는 한낱 도구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인상을 찡그린 엘프 여왕이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나?”
하지만 매달 열리는 그 세계수 열매가 3개월 전부터 꽃조차 피우지 않고 있었다.
마치 천적을 만난 짐승이 웅크리듯, 뿌려야 하는 씨앗조차 아끼며 말이다.
그리고 여왕의 짜증 앞에 한동안 고민하던 엘프 사제가 조용히 직언을 올렸다.
“점을 쳐보는 건 어떠합니까? 사제들 말로는 새로운 성(星)이 나왔다 합니다.”
점으로 미래를 점치는 일은 문명 이래 아주 흔히 있던 의식이자 행사였다.
그리고 엘프들 또한 하늘 위에 뜬 별을 통해 농사 주기를 읽고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행운을 점치고는 했었다.
“점? 하! 자네도 나이를 먹나 보군. 그 장로 놈들하고 똑같은 소리를 하니 말이야. 미신 따위 믿지 말고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이나 찾아, 알겠어?”
“·········예, 여왕님.”
잔뜩 화를 낸 여왕은 황금 복도를 지나 온갖 보물이 박힌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직언을 올린 엘프 사제는 면박과 치욕을 애써 참으며 여왕이 들어간 문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끝까지 말을 해줬어야 했을까?
사제들이 새로 떠올랐다고 말하는 신성은 분명 북쪽에 있었다.
* * *
챙!
“큭!”
한참 눈투성이와 검을 나눴다.
하지만 충분히 움직임을 보여준 내가 다른 형을 펼치자, 맹렬하게 공격하던 눈투성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겨루기는 끝났다.
나는 조금 전 움직임을 곰 씹고 있는 눈투성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방금 건 반격 자세였나요?”
“그래, 묵직함이 더하지.”
“그만큼 심오하네요.”
마을을 떠나 여정을 시작한 지 벌써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 발걸음에 토끼 발이 따라줬는지 길은 순탄했고 목숨을 위협받을만한 특별한 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보존 식량을 먹었다.
기운이 조금 모자라다 싶으면 사냥하고 채집한 음식으로 건강을 챙겼다.
그리 걷고, 또 걷고.
그러다 문득 영감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땀이 나도록 신나게 겨루기를 했다.
말이 좋아 산맥으로 향하는 과정이지 수련 여행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아침 골짜기를 넘어 두 개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1년 전 내가 남긴 이정표이자 흔적을 발견해냈기 때문이다.
[왼쪽 갈림길, 3일.]
“와, 글자가 엄청 많아요.”
“······후보생들과 올 때마다 새긴 글자다.”
왼쪽 갈림길로 3일.
그리고 그 아래 칼자국으로 새겨져 있는 수많은 이름과 흔적들.
그것은 당시 꼭 왕이 될 거라 생각한 후보생들과 내가 남긴 추억이었다.
물론 지금은 처량하게 눈과 추위를 맞은 과거의 풍화일 뿐이었다.
뽁!
“저도 새길래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 제자인 눈투성이를 빼먹고 가면 섭섭하다.
저들이 미우나 고우나 내 후보생들이었고 이것 또한 흔적이 만든 축적이었다.
환하게 웃은 눈투성이는 작은 단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이름을 새겼다.
사각, 사각, 썩은 나무가 내는 소리가 주변을 기분 좋게 울렸다.
“됐다!”
오랜만에 거뭇한 흔적들 위로 새로 생긴 글자가 자리를 차지한다.
나는 조용히 그 문장을 읽었다.
[눈투성이 다녀감!]
“하하.”
참 소소하다.
다른 후보생들은 거침없이 포부를 적거나 나에게 아부를 하기 바빴는데,
눈투성이는 그저 자신이 다녀왔다는 것을 이정표 위에 남기고 간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나 어울려 기분 좋게 웃은 나는 이정표 위 먼지를 훅 불었다.
“빨리 가요! 이제 3일 남은 거죠?”
“그래, 3일이면 도착할 거다.”
내 기억으론 이 분기점에서 부지런히 걸으면 회색 늑대가 은거하고 있는 산맥까지 3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꽤 길었던 여정의 막바지.
눈투성이는 곧 도착한다는 말에 한껏 들떠 무거운 짐을 가볍게 챙겼다.
그리고 얼마나 급한지 왼쪽 갈림길을 향해 먼저 걸어가기 시작한다.
햇살이 눈에 부시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고드름은 어느새 봄이라는 꼬리를 만들었고,
듬성듬성한 바닥 눈 사이로는 푸른색 새싹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또 1년이 지났다.
나는 눈투성이처럼 단검을 꺼내 이정표 위에 처음으로 이름을 새겼다.
[부러지는 검, 다녀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