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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22화 (22/181)

22화

검은머리 기사왕 22화

[순백 밀 위로 내 형제, 자매를 보냅니다. 물에서, 땅에서, 하늘에서, 어머니 그들을 평생 보살펴 주소서.]

오크는 죽는 것을 명예롭게 여긴다.

엘프는 죽음을 영원한 순환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서 있어 죽음은 미사여구 없는 단순한 슬픔이다.

먼저 간 이가 덜어간 무게, 이제는 남는 이가 감당해야 하는 영원한 비통.

익숙하되 익숙하지 않으며, 보내야 함을 알면서 쉽사리 손을 놓지 못하는 그 슬픔이 바로 우리의 죽음이다.

[너희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센 바람, 뭉친 눈덩이, 떨어진 고드름. 자식이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부모가 그리울 때 언제든지 오늘 겨울날처럼 찾아오라.]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땅에 묻힐 이들이 북방 그 자체가 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순백 밀이 가득한 관에 누워, 가족들이 밤새 판 땅에 묻히는 주검들.

마을 전체가 모인 추모식에는 감히 눈 한점 찾아올 생각을 못 했다.

물론 나 또한 그랬다.

“여기 정리해서 가져왔다.”

추모식을 끝내고 온 붉은 강철이 내게 가죽과 함께 병을 내밀었다.

그 가죽에는 사상자를 구체적으로 나눈 숫자와 이름이 쓰여 있었고 병에는 증류해서 만든 독주가 담겨 있었다.

나는 숫자와 이름을 확인하기 전 병을 입으로 가져가 독주를 마셨다.

기침이 나올 것 같은 독한 향이 목을 틀어막고 있던 무언가를 꾹 눌러 담는다.

그래, 놈들과의 전투에서 이겼다.

족장은 내게 목이 베였고 야만인들은 단 한 마리 포로 없이 전부 처형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승리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병사를 이끈 지휘관이라면 그 이후 남게 된 무게 또한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가죽 위에 쓰인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리며 마지막 숫자를 읊조렸다.

“12명.”

12명, 죽은 병사의 숫자다.

무려 두 배가 넘는 군세와 싸워 겨우 이정도밖에 죽지 않았다.

이번 전투로 충분히 대승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바둑판이 아니다.

경기가 끝났다고 해서 죽은 돌을 다시 올려 사용할 수는 없었다.

과연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나는 왜 더 빨리 움직이지 않았을까.

이미 지나간 전쟁을 곱씹으며 한없이 내려가는 기분을 누르고 또 눌렀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하고 무뎌진다고 한들 이 기분은 결코 나아지는 일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독주가 든 병을 치우며 이름이 적힌 가죽을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붉은 강철을 향해 양심을 덜 마지막 부탁을 했다.

“가족들에게는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줘. 충분한 보상이 되도록.”

“·········걱정하지 마라. 아주 튼튼한 녀석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겨울을 견뎌 다가올 봄을 기다릴 차례다.

나는 한참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더욱 차가워진 공기를 한 움큼 삼킨다.

밤하늘 별은 여전히 흘러넘쳤고,

그 별 무리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광활한 장관은 태동과 달라진 바가 없었다.

이 위대한 북방은 우리가 왜 싸우는지, 어째서 그토록 발버둥 치는지 알고 있을까?

아니, 따뜻하면서 동시에 무심한 어머니는 그저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투쟁이라는 삶에서 벗어난 그들이 따뜻한 어머니 품에 안기기를.

* * *

“꼬마 기사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와아······. 겨울 사과에요?”

“네, 그이가 어제 산에서 따왔더라고요.”

여느 때처럼 스승의 심부름을 끝낸 눈투성이는 바삐 회관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시장을 지나가려는 순간 얼굴이 낯익은 한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겨울 사과를 내밀었다.

남편이 힘들게 산을 올라 따온 사과 하나를 기꺼이 눈투성이에게 건네준 것이다.

사양해야 할까?

아니, 한참 먹성이 좋아진 눈투성이는 푸릇푸릇한 겨울 사과를 거절할 수 없었다.

아삭!

눈투성이는 결국 양손으로 푸른색으로 빛나는 사과를 받아 한입 베어 물었다.

“너, 너무 맛있다···.”

“호호호, 그렇게 맛있으세요?”

차가운 겨울을 머금은 북방 사과는 마치 혓바닥이 녹을 것만 같은 단맛이었다.

그리고 그 맛에 감동한 눈투성이는 볼을 붉힌 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겨우 사과 한입으로 사람이 이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있는 거구나.

큰 보람을 느낀 마을 아주머니는 마치 친딸을 보듯 흐뭇하게 웃는다.

“앗! 늦었다! 아주머니, 다음에 봬요!”

하지만 눈투성이는 이렇게 느긋이 간식을 즐기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녀는 아주머니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뒤 다시 회관을 향해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사박.

회관은 확장 공사와 함께 자리를 옮겨 마을 뒤쪽 절벽과 가까운 언덕에 터를 잡았다.

덕분에 촌장 할아버지가 오고 가네 힘들다고 툴툴거렸지만, 눈투성이는 회관이 위치한 언덕이 너무나도 좋았다.

왜냐하면, 언덕을 천천히 걷다 보면 흰옷을 입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호.

눈투성이는 입김으로 빨개진 손을 호호 녹이며 언덕 아래 펼쳐진 광경을 내려다봤다.

“·········예쁘다.”

전쟁이 끝나고 석 달이 지났다.

한참 몰아치던 추위는 서서히 평년 기온을 되찾았고 웅크려 있던 마을 주민들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활발하게 이뤄지는 사냥과 채집 활동,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목제 건물.

외부의 적이 사라진 마을 근방은 거의 평생을 살아가도 다 쓰지 못할 풍부한 자원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물론 인구도 빠르게 늘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소문을 듣고 오는지 모를 수많은 화전민이 저번 피난처럼 계속되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스승님이 말하기를 이정도 성장 속도면 곧 작은 영지와 마찬가지라고 했던가?

물론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눈투성이는 그냥 좋다고만 기억할 뿐이다.

냠냠.

크게 기지개를 켠 눈투성이는 아주머니가 주었던 겨울 사과를 마저 먹었다.

그리고 경쾌한 발걸음과 함께 언덕 위에 있는 회관을 향해 걸어갔다.

끼이이익, 쿵!

굳게 닫힌 문을 열자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훈풍이 얼굴이 때렸다.

동시에 시야 사이로는 바삐 의견을 나누고 있는 촌장 할아버지와 스승님이 있었다.

“휴경지가 더 필요하지 않겠나?”

“그러면 생산량이 모자랍니다. 차라리 겨우내 만든 비료를 쓰는 게 낫습니다.”

“일단 한해는 넘겨보자는 거군.”

스승님은 뛰어난 기사임과 동시에 유능하고 경험 많은 행정관이다.

현상 유지조차 어려워 보이던 마을이 이 많은 발전을 이룬 것만 봐도,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 스승님이 흙으로 밀 빵을 만든다고 해도 다 믿어주지 않을까?

간혹 주민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칭송을 떠올린 눈투성이는 마치 자기가 칭찬을 듣기라도 한 듯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순간 부러지는 검이 입을 열었다.

“왔구나.”

“아, 네!”

정신이 팔려 잊을뻔했다.

눈투성이는 대장간에서부터 가져온 천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여기요, 받아온 물건이에요.”

스승님이 분명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곧바로 자신에게 가져오라 했다.

그리고 그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한 눈투성이는 스승을 향해 가죽 책을 내밀었다.

조심히 가져오라고 하기에는 생각보다 가치가 없어 보이는 낡은 가죽 책.

하지만 옆에서 책 제목을 확인한 촌장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대륙지도······? 진짜 지도인가?”

평범한 일반인은 평생 보지도 못하고 죽을 정도로 지도는 귀한 물품이다.

그것은 축적이 작아질수록 더 귀했는데 아마 대륙 전체를 그린 지도는 문명화가 된 귀쟁이 놈들도 몇 장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러지는 검은 겸손이 아닌 분명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가죽 책을 내려놓았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 책을 정확히 대륙지도라고 부르기에는 많은 부분이 부족하다.

공신력 있는 측정이 아닌 개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저 이곳에 이런 마을과 도시가 있고 전략적 지형이 있구나, 만 알 수 있는 정도?

물론 써놓은 사족은 단순한 지도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필체를 알아본 촌장이 물었다.

“자네가 그린 거군”

“일기 비슷한 거죠.”

이 지도는 지난 겪었던 대전쟁과 대륙 여행을 집대성한 기록이다.

물론 초판이 아닌 여러 수정과 복사를 걸쳤지만, 현재 남은 것은 붉은 강철이 소지한 이 분할 책이 유일하다.

찌익!

“앗······!”

그리고 부러지는 검은 오늘 그 책을 뜯었다.

페이지를 모두 분리해 커다란 지도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한 장 한 장 뜯어 책상 위에 올려두자, 마치 퍼즐처럼 맞춰지는 대륙지도.

이렇게 보니 우리 북방은 참으로 커다란 세상 속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가 우리.”

숯 조각을 가져와 우리 마을을 표기한다.

그 위치는 침략자인 오크 놈들마저 포기한 완전한 오지였고 근방에는 그 어떠한 적대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은 식민 구역.”

하지만 그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놈들이 북방을 지배하기 위해 세운 숙영지가 마치 암세포처럼 퍼져있다.

그 숫자만 무려 42개.

놈들은 그 드넓은 중앙 대륙을 전부 차지한 것도 모자라 우리의 터전인 북방을 아예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선 이 숙영지들은 전부 불태울 필요가 있었다.

부리지는 검은 아무런 말 없이 선을 그어 숙영지로 향하는 선을 그었다.

슥, 스윽.

그 외에도 서부 세계수에 나라를 세운 엘프와 동부 해안가에서 오크 놈들에게 물자와 노예를 상납하는 동부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 설명하기에는 지도를 가져온 취지와 맞지 않는다.

작게 한숨을 쉰 부러지는 검은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언급했다.

“수확기까지 최대한 규모를 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오면 준비한 군대로 숙영지를 습격할 겁니다.”

“······그래서 휴경지를 없애자고 했군. 어차피 놈들 숙영지에 물자가 있을 테니까.”

말이 북방으로 파견된 오크 숙영지지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앙 대륙과 비교하면 잘 쳐줘 봐야 3선급 군대다.

충분한 물자와 군사만 있다면 차근차근 숙영지를 파괴하고 고통받고 있는 북방인 마을을 해방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다만 이것은 좀 뒷이야기다.

아무리 청사진을 잘 그리고 내정이 가파르게 발전 중이라 한들 아직 1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러지는 검은 그 1년을 발전 중인 마을에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북방 통일보다 앞서 후보생이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투성이, 나와 함께 이곳으로 갈 거다.”

“네······?”

부러지는 검이 가리킨 지도 위에는 마을과 정 반대편인 산맥이었다.

그 어떠한 마을 이름도, 도시도 없이 오직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 이름만이 떡 하니 쓰여있는 가파른 산맥.

촌장이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읽는다.

“회색 늑대······. 회색 늑대? 정말 그가 아직 살아있다고?”

역시 퇴역병인 촌장은 그를 알아봤다.

단순히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북방에선 유명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아마 의문보다 앞서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영 불안한 모양이었다.

분명 잘 배우고 있는데, 이제 1형도 완벽히 펼칠 수 있는데 왜 떠나야 하는 걸까.

눈투성이는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물음을 애써 삼키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하지만 그 의문은 이내 부러지는 검이 내뱉은 한마디 말로 해결이 되었다.

“오러를 배우러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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