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검은머리 기사왕 20화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나를 태운 흰 뿔 사슴이 가파른 오르막길을 달리며 거칠게 투레질한다.
하지만 힘이 빠지기는커녕 속도를 줄이지 않고 눈길을 주파한다.
내가 오크 숙영지에서 훔쳐온 녀석이자, 마을 유일 탈것인 흰 뿔 사슴.
한동안 목책 건설 일을 돕던 녀석은 오늘 하루 무거운 중책을 맡았다.
저 멀리 언덕 아래로 허둥지둥 뛰어오는 병사 둘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사님! 옵니다!”
“우회로로! 내 신호를 기다려라!”
병사 둘이 봉화를 올렸다.
그것은 놈들이 드디어 근처까지 왔다는 뜻이며 때가 왔음을 알리는 경종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도망치는 병사들을 지나쳐 드디어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러자 눈이 짙게 깔린 하얀색 평원 지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륵!
“진정해.”
대열이 허술하다, 제식도 없다.
야만인 놈들은 그저 한 무리로 뭉쳐 하얀 평원을 천천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는 두 배는 가뿐히 넘었고 선두에는 오러를 품은 족장과 함께 강한 기운을 가진 녀석 몇몇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런 돌연변이들이 야만인 사이에서 나온 걸까.
만약 놈들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진짜 야만인 왕국을 세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릉!
물론 어디까지나 만일이다.
왜냐하면, 놈들은 오늘 이 북방에 묻혀 봄을 위한 비료가 될 테니까.
나는 검을 뽑은 뒤 숨을 고르고 있는 흰 뿔 사슴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푸르륵!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빠른 속도다.
충성스러운 흰 뿔 사슴은 엄청난 숫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리막길을 달렸다.
사슴이 달리는 새하얀 평원은 마치 한 줄기 화살처럼 놈들을 향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 - - - - - -!!”
점점 가까워진다.
야만인 놈들은 당연히 나를 발견했고 마치 발등이 찍힌 원숭이처럼 미쳐 날뛴다.
하지만 나는 고삐를 당기지 않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놈들에게 들리도록 고함을 내지른다.
“죽고 싶은 자만 앞으로 나서라!”
명백한 도발이다.
의도를 이해한 놈들은 당장에라도 나를 죽일 듯 고함을 지르며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오직 족장만은 액화된 분노가 흐르는 눈동자로 나를 직시했다.
“Pou! Poua - - -!!”
아쉽다.
만약 족장이 화를 참지 못해 나섰다면 목을 벨 기회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우연으로 부족을 통합시킨 게 아니라는 듯 냉철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강한 기운을 품고 있던 전사 둘이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왔다.
두 놈 다 오러 사용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 직전 경지를 목도하기 전인지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흰 뿔 사슴.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달려와 나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두 놈.
육중한 둔기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그 순간 세상이 반전했다.
후웅!
“?!”
오른발과 몸을 빼 옆으로 젖혔다.
둔기는 빈 허공을 갈랐고 놈들은 달려오는 힘을 이기지 못해 자세 그대로 넘어진다.
설마 기수 위에서 맞받아치지 않고 공격을 피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실패한 수읽기는 처참했다.
서걱!
“Puo?!”
자세가 무너진 두 놈은 똑같이 쓰러졌다.
하지만 같이 쓰러진 것과는 다르게 오른쪽 한 놈은 목에 붉은 실선이 생겼다.
목이 베인 것이다.
“끄르륵······.”
벌어지는 실선, 분수처럼 흘러내리는 피.
가속력이 더해 준 참격은 순식간에 목숨을 뺏고 바닥에 피를 흘리게 했다.
그러자 나머지 한 놈은 현 상황을 믿지 못하겠는지,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푹!
기수를 상대로 달려들면 이렇게 된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검을 던져 달려들지 못해 주춤거리는 나머지 놈을 죽였다.
그런 다음 흥분한 사슴의 고삐를 당긴 뒤 유유자적 뒤로 돌아가 던진 검을 뽑는다.
푸르륵!
“옳지.”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낸다.
그리고 흥분한 사슴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자,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핏물을 본 평원을 그대로 삼켰다.
순식간이었다.
나를 향해 달려든 전사 둘이 죽는 것과 기세를 뽐내던 놈들이 조용해진 것도 말이다.
다각, 다각, 다각.
나는 마치 귀족들이 승마하듯 시체 부근을 조용히 돌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의 얼굴이 터지기 직전인 족장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근본 없는 이들이구나, 혹시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들인가?”
“Krrrrrrrraa!!”
역시 만국 공통, 시대 불문, 패륜적 도발은 적들을 상대로 효과적이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게 분명한 놈은 결국 분노를 터트리며 무기를 뽑았다.
그러자 주춤거리던 야만인 무리 또한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좋다, 성공이다.
위협적인 전사 둘을 죽이고 놈들을 도발한 나는 힘차게 고삐를 당겼다.
그리고 나를 향해 날아오는 둔기를 피해 왔던 방향으로 기수를 돌렸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잡히지 않게,
그렇다고 빠르지 않게.
마치 놈들에게 보란 듯이 속도를 조절한 놈은 저 멀리 보이는 숲을 향해 달려갔다.
오라, 북방의 아가리로.
하얀색 이빨은 섬뜩하게 빛난다.
* * *
“후우, 후우···.”
병사 중 가장 어린 ‘짧은 다리’는 긴장에서 오는 거친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하지만 몸을 펴고 숨을 편히 쉬기에는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짧은 다리는 1시간처럼 느껴지는 1분을 참으며 정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꿀꺽,
양쪽으로 숲이 울창한 협곡은 좁았다.
거기다 유일한 통로를 방진이 틀어막고 있으니, 이곳을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아예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는 건 자신들이 도망갈 퇴로가 뒤밖에 없다는 것을 뜻했다.
과연 여기서 적과 싸우는 게 맞는 것인가.
도대체 기사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기에 이토록 늦는 것일까.
얼굴이 땀과 눈으로 젖은 짧은 다리는 몰려오는 고뇌와 긴장을 참지 못했다.
그저 지겹도록 반복했던 훈련만이 떨려오는 팔다리를 오기로 붙잡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아······!”
귀가 기울인다.
숨 막히는 순간을 참고 있던 전우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저 멀리 통로 끝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하는 묵직하고 다급한 발굽 소리.
하얀색 평면 위로 보이는 점 하나는 분명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 - - - - - - !!”
길게 메아리친다.
점이 우리를 향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동시에 그 점은 점점 가까워졌고,
사슴이 내뱉는 콧김이 허공을 수놓는다.
거대한 존재감, 위풍당당한 검.
마치 한줄기 눈사태처럼 몰려온 전의가 긴장감을 휩쓸어 온몸을 엄습해왔다.
짧은 다리는 분명 기억했다.
저 멀리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무엇을 지시하고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말이다.
Shield Up! (방패 들어!)
척!
Shield Up! (방패 들어!)
쿵!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그와 동시에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그에게 불을 질렀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터지기 직전 완전한 팽창이다.
누가 하나라도 더해준다면,
이 열기를 조금이라도 밀어준다면 목이 터지라 고함을 외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한 남자가 해주었다.
‘저 무도한 자들을 왜 야만이라 부르는지 아는가! 그것은 자각하지 않고, 고뇌하지 않으며 내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같이 아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추운 북방에는 그 어떤 때보다 따뜻한 심장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너희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해가 지기 전! 저들을 우리 고향에서 몰아내자!’
‘일어나라 북방의 아들딸들아! 방패를 들어 소중한 것을 지켜내자!’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방지이이이인!!”
기사는 기수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방패를 들고 방진 제일 앞에서 날카로운 검을 뽑았다.
“물러나지 마라!”
저 멀리 적들이 개떼처럼 몰려온다.
마치 검은색 파도와 같은 놈들이 하얀 영역을 침범하며 아가리를 벌렸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서 시작된 끈끈한 접착제가 나와 전우를 옭매고,
물러날 수 없는 투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맹렬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Horoooooo!!”
“Pyo! pyo da!!!!”
오만한 적이 바로 앞까지 왔다.
“밀어!”
쾅- - - - -!!
명령을 따라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가만히 있던 방진은 적이 부딪히는 순간과 맞춰 정면 공간을 밀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생긴 반발력은 양쪽 진영에 공평하게 가해졌고 병사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 여파를 제대로 맞은 건 다름 아닌 돌진하던 야만인 놈들이었다.
쾅!
끄아아아아!
콰직, 쿵!
선두로 달려오던 놈들은 피죽이 된다.
동시에 속도를 이기지 못한 다음 열은 스스로 밀고 밟아 짓이겨진다.
좁은 협곡, 튼튼한 방진.
앞은 나아가지 못하고 뒤는 밀고 들어온다.
놈들은 마치 다져지는 분쇄육처럼 하나하나 고기가 되기 시작했다.
“버텨!”
물론 방진은 죽을 맛이었다.
아무리 방패가 튼튼하고 통로가 좁다고 한들 적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죽을힘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을 위해 한 훈련이 마치 농축된 영약처럼 천천히 스며들었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삐이이이익 - - -!
찢어지는 손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조용하던 협곡 위 숲속이 흔들리며 나머지 잔류 병사들이 쏟아져나왔다.
합류 기간이 턱없이 짧았기에 방진 훈련을 받지 못한 나머지 인원들.
하지만 이들은 방패 대신 투창을 들고 협곡 아래를 향해 촉을 조준했다.
“으랴아아아! 던져어어어!”
“죽어, 이 개새끼들아!”
대부분은 놈들에게 고향과 가족을 잃은 피난민 출신들로 구성된 부대다.
증오와 분노는 그 누구보다 농후했고 생존을 향한 처절함은 힘이 되었다.
푹! 콰직!
후우우우웅, 푹!
힘이 실린 투창이 쏟아져 내린다.
갑주와 방패는커녕 조잡한 무기가 다인 놈들은 그대로 노출되어 몸이 꿰뚫렸다.
앞에서 밀리고, 뒤에서 밀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묵직한 투창.
놈들은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이리저리 살기 위한 발악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닥에는 어느새 패잔병들이 줄줄 흘린 내장과 핏물만이 흥건할 뿐이었다.
“Ouooo...”
“K, Koya ca! ca!”
선두가 순식간에 전멸했다.
가운데 열은 이미 전의를 잃고 도망치려 했지만, 후열은 상황 파악이 늦는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야 하나?
아니, 굳건했던 자세를 풀고 천천히 전진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놈들을 충분히 씹고 찢었으니, 이제 아가리를 닫을 때가 온 것이다.
“끊어!”
딱!
끼이이이이익!
무언가를 끊는 날카로운 소리가 혼란스러운 전장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협곡 위 나무들이 미친 듯이 흔들리며 나뭇잎을 뿜어냈다.
미리 베어둔 나무였다.
파스스스스!
쿵!
거대한 나무가 수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 쓰러진 나무는 협곡 퇴로를 정확히 틀어막았고 도망치려던 놈들은 날카롭게 깎아둔 가지에 찍혔다.
순식간에 퇴로가 막혔다.
하지만 나무를 쓰러트린 병사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횃불을 던졌다.
화르르!
북방의 추위를 먹고 무럭무럭 자란 침엽수.
마치 그 한기를 한탄하듯 송진을 먹은 불은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한다.
빠져나갈 퇴로는 없다.
빠져나갈 수 있는 적도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끈 부러지는 검은 검을 들어 올렸다.
“방지이이이이인!!”
으아아아아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를 본 병사들이 커다란 고함을 내지른다.
그러자 검과 방패를 든 부러지는 검은 방진과 함께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척!
오랜 핍박의 시간이었다.
이들 모두는 놈들에게 가족과 이웃이 잡혀가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저항할 수 없는 현실을 여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약하니까.
우리는 약자니까.
그렇게 당해왔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우리는 이 손으로 창과 방패를 쥐었고 전우와 함께 튼튼한 방진을 만들었다.
오랜 패배의 역전, 투쟁을 향한 찬미.
이제 결정할 날이다!
저들이 죽거나, 아니면 우리가 죽거나.
병사들은 안전한 방패를 내리고 이제는 땀으로 범벅이 된 창을 앞으로 내세운다.
나지막한 그 한 마디는 오랜 기간 쌓이기만 했던 끈을 놓게 하기 충분했다.
“돌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