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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9화 (19/181)

19화

검은머리 기사왕 19화

[쓸모없는 놈들!]

뼈 무더기 위에 앉은 우두머리가 분노한다.

그러자 주변 공기가 무겁게 짓눌리며 모여든 야만인 무리가 황급히 고개를 처박았다.

누구 하나 고개를 들어 대답할법하건만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하는 놈들.

이 부족에선 족장이 곧 법이었고 하늘이었으며 위대한 신이었다.

하지만 정작 족장은 그런 야만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같은 종족이라지만, 너무나 멍청했고 우둔했기 때문이다.

족장이 입을 다물자, 화가 풀렸다고 착각한 놈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적, 강하다! 마을, 너무 높다!]

[배고프다, 왕! 가축 없다, 이제 우리 굶주린다, 더 많은 고기!]

언어를 완성할 수 없어 문자를 나열한다.

하지만 그 단순한 문자 나열조차 사슴과 인간 사냥에 실패했다는 절망적인 소식밖에 전해지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방법도 모른다, 음식을 저장하는 기술도 없다, 그렇다고 야생 동물을 교배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냥과 약탈로 살아가던 야만인 놈들에게 있어 패배는 곧 죽음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항상 승리의 대상이었던 나약한 인간들이 어느 순간 변해버리고 말았다.

크기만 크던 목책은 견고해졌고 겁부터 먹은 전사들은 강인해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놈들을 변하게 만든 걸까?

족장은 그날 인간 가축의 목숨을 끊었던 화살을 매만졌다.

촉은 날카로웠고,

나아가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은 무디고 멍청한 야만인들과 달리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화가 난다.

자신이 누구인가?

짐승처럼 살던 야만인 무리를 통일하고 이 근방을 지배하던 왕이 아닌가.

겨우 한 줌 남짓한 가축 놈들에게 이리 휘둘리고 당하다니 어불성설이다.

콰직!

족장은 힘을 주어 화살을 부쉈다.

그리고 야만인들을 향해 말했다.

[모아둔 뿔을 가져와라!]

[사슴! 흰 사슴!]

[무기! 더 많은 무기!]

문명이 뗀석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야만인들에게 있어 흰 뿔 사슴을 사냥하고 얻은 뿔은 질 좋은 재료다.

이참에 그동안 모아둔 뿔을 전부 사용해 최대한 많은 야만인을 무장 시켜야 한다.

더 많은 뿔!

더 많은 무기!

어차피 저 인간들과 자신들을 공존하지 못하는 이 땅 위 앙숙이다.

이참에 전부 죽이고 잡아들여 자신들을 위한 가축으로 만들 것이다.

그간 전면전을 망설였던 족장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전쟁이다! 빼앗고 죽이고 불태우자!]

와아아아아아아 - - -- !!

족장은 무기를 들며 외쳤다.

그러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놈들은 번쩍 일어나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빼앗고 죽이고 불태우자.

태생이 미개하고 잔인한 그들에게 이보다 좋고 확실한 명령은 없지 않은가.

야만인은 마치 굴로 들어온 애벌레를 물어뜯듯 마지막으로 아껴둔 인간 가축들을 재단과 식탁으로 가져갔다.

야만이 광기로 물든 그 날밤. 오직 인간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고통만이 찾아온 겨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밤 또한 그것을 지켜보는 또 다른 이들이 있었다.

절벽 위 사냥꾼 둘이 대화를 나눴다.

“빌어먹을 새끼들.”

한 번 당하면 실수다.

하지만 두 번 당하면 그건 병신이다.

그리고 그 병신들은 지켜보는 이들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전쟁을 준비했다.

“······됐다, 이제 기사님한테 알리자.”

모든 것을 지켜본 사냥꾼 둘은 분노를 조용히 삭인 채 마을로 돌아갔다.

* * *

마을은 바쁜 일상을 되찾았다.

물론 그 일상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과와 함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새벽같이 일어나 눈투성이와 함께 검술을 수련한다.

그리고 해가 따뜻해질 때쯤 연병장으로 가 식사를 하고 방진 훈련을 시작한다.

그리하다 보면 오후가 된다.

이제는 어엿한 병사가 된 그들에게 반복 훈련을 시키고 이번에 새로 뽑은 또 다른 서른 명에게는 투창 훈련을 시킨다.

물론 검 한번, 창 한번 휘두르지 않는 훈련에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불만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나 또한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에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땀, 노력, 고함.

투기는 고조되고 병사들은 녹초가 된다.

총 60명이나 되는 이들이 지쳐 쓰러지기 직전쯤 오후 훈련은 끝이 난다.

훈련이 끝난 이들은 이제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 내일 있을 또 다른 훈련을 위해 밤을 보내고 그렇게 하루가 끝나야지 완벽하고도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그러지 않았다.

어제 새벽, 사냥꾼 둘이 가져온 소식이 우리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상기했으니까.

붉은 강철이 어울리지 않는 무게를 잔뜩 잡은 채 넌지시 화두를 던졌다.

“······드디어 전쟁이군.”

놈들이 쳐들어온다.

충분히 예상하고 준비했지만, 피부 너머로 느껴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도 보아라.

이미 주민들은 집에 들어가 불을 껐고 병사들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연병장 옆 병영에서 24시간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마을 사람들과 회관에 수뇌부는 웅크린 거북이처럼 묵직한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굳이 불편한 몸으로 무장까지 한 촌장이 우리를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역시 수성 아니오?”

상대와 아군 전력 차가 크다.

하지만 우리는 튼튼한 목책이 있었고 원거리 무기를 능히 사용할 줄 안다.

고민해봐야 무얼 하겠는가.

전쟁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아는 열 명 중 아홉은 당연히 수성을 택할 것이다.

“그렇지! 튼튼한 목책을 잘 만들었으면 잘 써먹어야지, 안 그런가?”

“그 말이 옳소, 붉은 강철.”

웅성웅성.

자신이 땀 흘려 지은 목책에 자부심을 가졌던 붉은 강철은 호탕하게 웃는다.

그러자 회관에 모인 이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기본적인 전략과 구체적인 전술은 그렇게 정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선 나는 의견을 모은 그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요격합시다.”

웃음과 웅성거림이 멈췄다.

붉은 강철은 진짜냐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고 촌장은 입을 꾹 다문다.

왜 잘 만들어진 목책을 뒤로하고 굳이 병사를 밖으로 내보내 요격을 하는가.

의견을 내던 이들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먼 미래를 그려본 나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도대체 왜······.”

“수성은 장기전이 될 겁니다. 아니, 무조건 장기전이 됩니다. 우리는 당장 싸워야 할 오늘이 아닌 그다음을 봐야 합니다.”

“······남은 물자가 얼마 없긴 해.”

“예, 많이 부족합니다.”

낙관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아무리 성벽 뒤 병사는 그 누구보다 용감해진다지만, 수성은 지독한 소모전이다.

당장 배급하는 식량부터 줄여야 하는 마당에 모든 인원을 전면전에 가담해야 하는 현실이 감당키나 하겠는가.

분명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지속한다면 더 큰 피해를 자초할 것이다.

이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그날 평원에서 사슴 사체 더미를 본 이후로 그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나는 지도가 그려진 동물 가죽을 바닥에 펼치며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곳은 양 계곡이 좁아지는 길목이었다.

“이 지점에서 적을 요격합니다. 만약 요격이 성공하면 공세를, 공세가 성공하면 그대로 적을 섬멸합시다.”

야만인 놈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높게 세운 목책이지 우리가 아니다.

가뜩이나 멍청하고 호전적인 놈들이니 원하는 전장에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겁을 먹은 누군가 내게 물었다.

“그,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승리를 확신합니다. 하지만 전쟁은 오늘 밤 병사들이 선택하도록 합시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다.

한때 인간이 존엄하던 시절이 있었고 위대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실패하고 쓰러져 있던 동안 우리는 승리하는 방법을 잊었다.

나는 지도 위에 칼을 꽂았다.

쾅!

그러니 다시 보여주어야 한다.

도태되고 핍박받던 인간이 어떻게 북방을 지배하고 호령했는지를 말이다.

나는 힘이 들어간 주먹을 꽉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들을 마주 봤다.

“무장합시다, 내일을 위해.”

무지하고 야만 했던 시대를 보내고 다시 한번 철과 방패로 무장할 때가 왔다.

소집령!

여전히 가슴 떨리는 단어였다.

* * *

병사 투표는 예상을 넘어 만장일치.

전면전이 결정되었다.

물론 유입된 인원들 사이에서 반대 여론이 생기기는 했지만, 촌장과 기존 주민들의 노력으로 의견은 통합되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무엇보다 무거운 어깨와 함께 차근차근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야만인 놈들의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첫 출정 날이 다가왔다.

겁에 질려 누구 하나 도망칠 법한데도 이탈 한 명 없이 전부 출정을 위해 모였다.

“- - - - - - -.”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연병장에서 무장을 끝낸 우리는 대열을 이루고 마을을 가로질렀다.

하나 된 발걸음, 하나 된 호흡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흐트러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 누가 이들을 민병이라 부르겠는가.

피와 땀이 흐르는 훈련을 통해 북방군으로 거듭난 병사들은 처음으로 느꼈다.

매번 지겨웠던 제식 훈련이 오늘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이다.

가슴이 뜨겁다.

나와 같이 움직이는 체온은 이 차가운 칼바람마저 사르륵 녹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정문을 지나가기도 전, 우르르 몰려든 인파로 인해 멈추고 말았다.

“엄, 엄마.”

새벽부터 일어나 행렬을 기다린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왔기 때문이다.

“쉿, 쉿! 이거 빨리 챙겨 넣어. 배고플 때마다 하나씩 꺼내서 꼭꼭 씹어 먹고. 꼭 혼자만 먹으렴, 알겠니?”

“이, 이런 건 언제 만드셨어요, 진짜······. 걱정하지 마시고 동생들 챙겨주세요.”

늙은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정성으로 간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들은 따뜻한 모정 앞에 애써 눈물을 삼킨다.

오빠를 끌어안고 엉엉 우는 어린 여동생.

자신이 평생을 지니고 있던 부적 넘겨주며 고개를 숙이는 늙은 노부.

병사들 모두 가족이 있었고,

날 때부터 함께한 이웃이 있었다.

“- - - - - -.”

그리고 나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며 그들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죽음이 아닌, 승리를 가져오겠노라 다짐하는 약속을 위해 말이다.

스윽.

“부대, 정렬!”

시간이 되었다.

내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목소리가 가장 커서 뽑은 병사가 짧은 고함을 질렀다.

척, 척, 척!

소란스러운 난리 통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을 배웅하러 온 주민들 또한 더 이상 붙잡지 않고 천천히 옆으로 물러난다.

마을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다.

그 누구 하나 경거망동하지 않았고, 그 누구 하나 함부로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지독하리만큼 무거운 침묵.

내가 다시 정면을 향해 걸어가자, 대열이 그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긱 - - -!

쿵!

굳게 닫혀 있는 마을 정문이 열렸다.

대열은 지체할 것 없이 정문을 지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

누군가 작은 탄성을 내뱉는다.

그토록 넘기 무섭던 마을 정문이 이리 허무하게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니.

정작 깨부순 알은 너무나 가벼웠고,

해가 뜨기 시작한 그림 같은 풍경은 한순간 두려움을 잊을 만큼 아름다웠다.

때마침 눈구름이 개기 시작한다.

피부를 따스하게 비추는 여명은 밤새 내린 눈들과 어울려 보석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길을 따라 그렇게 걸어갔다.

나는 남들처럼 무장한 채, 대열과 함께 걷고 있는 눈투성이를 향해 물었다.

“떨리는구나.”

“······예, 스승님.”

“그래, 원래 떨리는 게 맞다.”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누군가 내게 목숨을 맡긴다는 것은 여전히 무섭고 꺼림칙한 일이다.

하지만 왕이 되려면 알아야 한다.

저들이 아낌없이 던지는 목숨이 누굴 위한 것이며 어떤 대의를 위함인지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눈투성이를 지나 선두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내일은 떨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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