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검은머리 기사왕 18화
“요즘 사람들과 잘 지내더구나.”
“다들 좋은 분이세요.”
마을 전체가 휴식을 취하게 된 고요한 휴일, 나와 눈투성이는 숲으로 들어왔다.
마침 눈보라가 그쳐 딱 좋은 날이기도 했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기도 했다.
눈이 그친 숲은 아름다웠다.
떼묻지 않고 바람이 불때마다 흘러내리는 눈방울들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리고 그 위로 첫 발자국을 놓을때쯤이면 마음속 근심도 천천히 녹아내린다.
북방 인간에게 있어 겨울은 혹독하면서도 마음을 치유해주는 고향이었다.
“와!”
고개를 돌리자 눈을 반짝이는 눈투성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묵묵히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한참 감성적인것에 영향을 받는 사춘기 아닌가.
아이가 좋은 왕이 되는 것도 좋지만,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는것도 중요했다.
나는 스승으로서 가지는 책임감과 동시에 아이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싶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숲을 거닐자, 눈투성이가 부지런히 내 뒤를 따라왔다.
“자, 이쯤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더 좋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 목적은 휴식이 아닌 무언가를 찾는 데 있었다.
한참 바닥을 살피던 눈투성이가 아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발자국이 다 사라졌어요.”
“밤새 눈이 왔으니 어쩔 수 없지.”
그 날 사냥꾼을 쫓아 마을을 찾아온 흰 뿔 사슴은 이미 단골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들떠있는 주민들 반응과는 반대로 나는 사슴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쫓기 위해 일찍이 마을을 빠져나왔다.
이참에 녀석들을 포획할 기회를 노려 기수로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푸르륵!’
이 혹독한 야생에서 나고 자라, 천적인 맹수와 사냥꾼을 쫓아낼 정도면 얼마나 억센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것일까.
특히 우두머리로 보이던 그 거대 사슴은 신수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평범한 기수 10명만 있어도 전략이 달라지고 전쟁 판도가 바뀐다.
양심이 조금 찔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때가 아니었다.
나는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에 보이는 나뭇가지를 잘 봐.”
일반적으로 사슴은 독립생활을 하거나 소규모 무리를 지어 다닌다.
하지만 흰 뿔 사슴만큼은 마치 말처럼 대규모 무리 생활을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확인한 숫자만 100마리가 넘는 무리.
그런 많은 녀석이 숲을 가로지르는데 흔적이 남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눈투성이는 작게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아······!”
아니나 다를까 놈들이 지나간 자리는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범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듯 대부분 하얀 털들이 엉겨 붙어있었다.
한동안 마을 주변을 돌다가 자신들이 머무는 서식지로 돌아갔구나.
나는 마치 솜 같은 털들을 손끝으로 만지며 저 멀리 보이는 숲의 끝을 바라보았다.
작은 평원이다.
어쩌면 저곳에 모여있을지 몰랐다.
* * *
한때 왕의 사슴을 관리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본적인 종자의 미덕이란 칼과 갑옷을 빛내고 기사의 단짝이나 마찬가지인 사슴을 잘 보살피는 데 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나는 그 어떤 조련사들보다 흰 뿔 사슴의 습성을 잘 이해했고 서로가 교감할수있도록 길들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이 있었다.
왜 흰 뿔 사슴이 사냥꾼들을 쫓아내 마을까지 쫓아왔는지를 말이다.
‘화살을 쐈습니까?’
‘미, 미쳤습니까. 영물인 것 같아서 조용히 비켜 가려고 했는데······.’
흰 뿔 사슴은 태생이 순하다.
다른 맹수들을 쉬이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허투루 사용하거나 욕구를 위해 남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녀석들은 달랐다.
분명 사냥꾼을 해치기 위해 뿔을 내밀었고 인간이 몰려 사는 마을 앞까지 스스럼없이 달려와 투레질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인간에게 이토록 적대적이고 완강한 걸까.
종의 온순함을 아는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 어제까지만 해도.
“이, 이게 무슨 일이죠?”
나와 눈투성이는 녀석들이 서식할 거라 예상되는 평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흔적을 쫓아 달려간 평원에는 흰 뿔 사슴들이 아닌 썩은 악취가 풀풀 나는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것도 모두가 뿔이 잘린 채로 말이다.
“놈들 짓이군.”
“도대체 왜······!”
“뿔이 필요했던 거지.”
야만인 놈들의 문명 수준은 겨우 무언가를 갈거나 쪼개 사용하는 석기 수준이다.
물론 간혹가다 마을에서 노획한 철기나 청동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놈들 주변에는 철보다 좋은 재료가 평원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바로 뿔.
일반 사슴과 뿔과는 구조 자체가 다른 흰 뿔 사슴의 튼튼한 뿔 말이다.
눈투성이는 성체들과 함께 뿔이 잘린 새끼 사슴을 보며 탄식했다.
“너무해······.”
악함과 선함은 자연 앞에 무의미하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해쳐야 했고 약육강식이라는 피라미드 안에서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을 타고 받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이러한 동정이 모순이라 하여도 자연에는 치열함이 있어야 했고 정해진 섭리를 향한 마땅한 존중이 있어야 했다.
이것이 사냥인가?
아니, 욕망을 위한 학살이다.
나는 마치 향과 같은 입김을 내뱉으며 야만이 만들어낸 폐해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이러니 인간에게 그토록 분노했던가.
나는 슬픈 눈으로 마을을 바라보던 그 우두머리 녀석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죽음이 다녀간 평원 위에선 잠시뿐이었다.
두두두두두두!
“스승님!”
바닥에 엎드려 있던 눈투성이가 바닥에서 느껴지는 격한 진동을 감지한다.
그리고 일찍이 변화를 눈치챈 나 또한 진동 근원지를 찾고자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다각, 다각, 다각!
Uooooooo!
“쉿, 엎드려!”
아니나 다를까, 소리의 근원지는 무리 지어 이동하는 흰 뿔 사슴들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보았던 큰 규모와는 다르게 녀석들은 그 수가 현저히 적었다.
마치 무리에서 빠져나온 정어리처럼 이리저리, 중구난방 도망치는 사슴들.
그 뒤에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따라가는 야만인 집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욕심을 버리지 못한 놈들이 일찍이 평원을 나와 사냥 중이었던 거다.
“이···, 이······!”
“그래, 알겠으니 검을 챙겨라.”
역시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눈투성이가 간절한 눈망울을 보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말리지 않고 메고 있던 검을 옆으로 찼다.
마침 딱 죽이기 좋은 숫자다.
제자가 실전 경험도 하고 야만인 놈들 숫자도 줄이는 일거양득 상황에서 굳이 몸을 사리고 내뺄 필요는 없었다.
물론 이 난장판에 다친 사슴 몇 마리를 데려가려는 음흉한 생각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아이에게는 비밀이었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 몰이 사냥이 벌어지고 있는 평원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Aha? Poyo?”
“Grrrrr!!”
놈들은 당연히 우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숫자가 둘뿐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짐승처럼 이를 드러낸다.
일부는 벌써 사냥에 성공했는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암사슴 몇 마리.
우리를 향해 겨누는 날카로운 뼈 둔기에는 피와 살점이 묻어있었다.
물론 위협이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서걱!
“- - - - - - -!!”
달려가는 자세 그대로 목을 쳤다.
잘린 목은 그대로 높게 날아올라 흰 눈 위에 피를 뿌렸고 몸은 스르륵 무너졌다.
놈들이 당황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이전보다 더 완숙해진 눈투성이가 날렵하게 뛰어든다.
“흐랴아아압!”
평소 소곤소곤 말하는 아이가 검만 잡으면 목소리가 크고 걸걸해진다.
물론 그 힘찬 기합만큼이나 놈들을 향해 날아드는 검은 날카로웠다.
“컥, 커억!”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한번.
부지런히 공격을 피하며 놈들을 베는 눈투성이는 이제 애송이 티를 벗은 어엿한 수련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아낌없이 칭찬했다.
“잘했다!”
함께 검을 맞춘다.
물론 살을 가르고 뼈를 치는 살벌한 행위지만, 북방 검술이 보여주는 단아한 미는 마치 눈의 왈츠를 추는 듯했다.
역시 실전을 통해 성장하는 걸까.
나는 검을 휘두르는 틈틈이 눈투성이의 자세와 경로를 보며 교정해줘야 할 부분을 머릿속에 기록했다.
“Pow! Pow a!”
“Uaaa!”
서넛을 베고 서넛을 또 베었다.
그러자 바닥에는 목 없는 시체가 널브러졌고 처음부터 몇 없었던 놈들은 전의를 잃은 채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안돼! 거기서!”
하지만 욕심을 끝까지 버리지 못한 야만인 한 놈이 다리를 다친 새끼 사슴을 밧줄로 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보 같으니, 거리가 가까운데 한낱 욕심 때문에 죽음을 자초하나.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이미 화가 날 때로 난 눈투성이가 숨을 씩씩거리며 놈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시야가 닿지 않은 사각에서 흰색 섬광 같은 무언가가 공간을 뚫고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다급히 외쳤다.
“젠장, 피해!”
“꺅!”
콰직!
우두머리 녀석이다!
눈투성이는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을 날렸고 도망치던 야만인은 고목 같은 뿔에 몸에 꿰뚫려 그대로 날아가 버린다.
살아있는 사륜 전차 그 자체.
겨우 돌격 한 번으로 생명체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린 흰 뿔 사슴 우두머리는 기차 화통 같은 콧김을 푸르르 내뱉었다.
무리를 구하러 온 것인가.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여 넘어진 눈투성이 앞을 다급히 가로막았다.
푸르륵!
녀석이 투레질한다.
현명하던 눈은 이미 인간을 향한 분노로 가득했고 기운은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아무리 놈에게 설명해보려 한들 통하지 않을거란 예상이 강하게 몰려왔다.
툭툭, 툭!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추진력을 위해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나와 눈투성이를 향해 다시 돌진해왔다.
피해야 할까?
아니, 막아야 한다.
나는 눈투성이를 밀어내고 정면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삑, 삐익!
“- - - - - - -?”
그 순간 뿔을 들이미는 놈도,
검을 휘두르려는 나도,
격돌하기 직전 바로 아래서 들려오는 작은 울음소리에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둘 사이 작은 공간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눈투성이와 사슴이 있었다.
“다행이다······.”
눈투성이는 방금 자신이 죽을뻔한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끼사슴을 옭매고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그 새끼사슴 또한 감사 인사를 하듯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눈이 묻은 주둥이로 조심스럽게 볼을 맞댄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이 광경이 어이가 없어서가 아닌 북방이 선사하는 자연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 자신을 향한 작은 한탄이었다.
그래, 새끼부터 챙겼어야지.
방금까지만 해도 서로를 죽이려던 우두머리와 나는 눈을 마주치며 그리 생각했다.
스릉.
검을 집어넣었다.
녀석도 한걸음 물러난다.
그러자 천천히 눈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눈투성이가 이제 걸을 수 있게 된 새끼 사슴을 무리 앞으로 놓아주었다.
“자, 이제 가야지.”
삐익!
푸르륵!
힘차게 대답한 새끼사슴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우두머리 녀석 또한 한걸음 물러나며 새끼사슴의 상태를 살폈다.
이제야 안심했구나.
놈은 주둥이로 새끼사슴을 툭툭 밀며 다시 한번 우리를 조용히 쳐다본다.
녀석이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 알게 되자, 한번 길들여보겠다는 검은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말을 못 할 뿐이지, 이 사슴 무리 또한 북방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체였다.
오해가 풀린 녀석은 천천히 육중한 몸을 돌려 무리를 향해 걸어간다.
“잘 가!”
눈투성이는 환히 웃는다.
그리고 서서히 평원 너머로 사라지는 녀석들을 보며 양팔을 신나게 흔든다.
스승 마음도 모르고 이리 좋아하다니.
나는 눈투성이가 된 눈투성이를 쓰다듬어 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은 내가 배웠다.”
“네?”
“자, 우리도 돌아가자.”
흰 눈처럼 하얀 아이 곁에 있자니,
나 또한 하얗게 변하는 기분이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던 평원을 걸어 해가 지는 마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