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검은머리 기사왕 17화
발전은 순조롭다.
굳이 구체적으로 풀어서 말하자면 어떤 일이 아무런 문제 없이 미리 생각한 대로 잘되어 가는 상태에 있었다.
물론 풍족하지 않고, 안전하지 않고, 여전히 적은 건재했지만,
우리는 분명 떨림과 두려움을 직시한 채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목책이 다시 지어졌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사용 가능한 토지의 비율은 줄여 활동 범위를 줄인 것이 맞다.
하지만 정면 목책을 두 겹으로 둘러 외성과 내성을 철저히 구분했기에 물자와 주민들을 보호하기 더 용이해졌다.
초병 간 거리를 좁혀 더 촘촘해진 경계, 함부로 타고 올라올 수 없게 만든 감시탑.
붉은 강철이 ‘이제야 썩 괜찮다.’라고 평한 마을은 이 근방에선 절대로 볼 수 없는 화전민 최초의 목책 영지였다.
자연스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놈들을 피해 피난을 갔던 일부 화전민들과 그나마 남아 있던 소규모 마을들이 전부 합류 의사를 밝힌 것이다.
‘제발 우리도 도와주시오.’
처음 하강 곡선을 그리던 마을 인구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물자 부족과 텃세라는 고질적인 문제가 발생했지만, 유입이 주는 결정적 이점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험난한 북방 극지에서 맨몸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만 있다면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노동력을 제공해 주었고 마을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이제 조급한 쪽은 오히려 야만인.
야습을 통한 흔들기도, 주기적인 인간 사냥도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정체한 놈들에게 남은 것은 퇴보뿐이었다.
추운 겨울이 전면전을 예고하는 듯하다.
나는 북방 재건을 위해 그린 청사진을 한 장 한 장 채워나가며 고뇌했다.
“- - - - - - -!!”
하지만 그 상념은 이내 날카롭게 날아오는 검으로 인해 깨져버리고 말았다.
챙!
과감하게 속임수를 섞은 눈투성이가 상단 자세를 취한 하부를 노린다.
하지만 이미 의도를 파악하고 있던 나는 검날을 쳐내 그 공격을 상쇄했다.
“아직 얇다, 더 깊게!”
큰 목소리로 진로를 잡아준다.
하지만 엄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내 얼굴은 웃음이 만연한 상태였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다.
훈련 방법을 바꾼 눈투성이는 미친듯한 속도로 북방 검술을 습득해 나갔다.
제자의 성취를 싫어하는 스승은 없었다.
그것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라면 더더욱.
“흐랴아아압!”
잠깐 상념에 빠진 사이 양손으로 검을 잡은 눈투성이가 힘찬 기합을 내지른다.
그리고 내가 잡아준 진로와 맞춰 과감하게 어깨와 검을 들이밀었다.
후웅!
깊고 날카롭다.
검을 잡은 필부였다면 그대로 사선으로 그어져 즉사했을 것이다.
그 짧은 사이 내가 알려준 진로를 이해하고 실전에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칭찬을 해주는 대신, 검 손잡이를 돌려 날을 세웠다.
팅!
“아······!”
날과 날이 강하게 부딪힌다.
동시에 눈투성이는 검을 놓쳤고 날아간 검은 바로 옆 눈더미에 꽂혔다.
손아귀가 까져 피가 흐르는 것이 보인다.
이렇게 강제로 대련을 끝내지 않으면 온종일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나는 그만 진정하라는 제스처와 함께 떨어진 검을 주워 건네주었다.
“잘했다, 체력이 많이 늘었어.”
다른 기술과 달리 체력이란 놈은 오로지 끈기와 노력을 먹고 산다.
요행을 부려 잘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보다 티가 잘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병들 틈바구니에 섞여 방진을 같이 훈련한 눈투성이는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늘어난 상태였다.
물론 본인도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지 눈투성이는 뿌듯한 감정을 애써 숨기며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제 새벽 수련을 끝낼 시간이다.
나는 검을 집어놓고 가방에서 깨끗한 천과 미리 녹여둔 물을 꺼냈다.
“손.”
“제, 제가 해도 되는데······.”
“군소리 말고.”
손을 내밀라는 말에 눈투성이는 망설였다.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손을 낚아챈 나는 깨끗한 물과 천으로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을 조용히 닦아주었다.
그동안 찢어지고 아물기를 반복했는지 딱 보기에도 아파 보이는 손바닥.
아프다고 말할 법한데 용케 아무 말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다.
마을로 돌아가면 상처에 잘 듣는 약초라도 구해 발라줘야겠다.
나는 한동안 상처를 소독하며 하루 얼마 없는 수련 시간을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눈투성이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
눈투성이는 훈련을 시작하면 말수가 평소보다 많이 적어지는 편이었다.
그만큼 먼저 입을 여는 경우도 드물었고 나 또한 익숙했기에 적응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새벽 수련이 끝나기도 전에 눈투성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살짝 긴장하며 물음을 기다렸다.
“감사합니다.”
순간 맥이 빠진다.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기에 큰일인가 싶었더니, 그저 매번 하는 감사 인사였다.
낯부끄러운 상황.
나는 어찌 대답해야 할까를 한참 동안 고민하다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눈투성이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 * *
“이 정도 길이면 되겠나?”
“더 짧게 쳐, 우리가 필요한 건 많이 던질 수 있는 소모품이야.”
방패를 상대할 게 아니기에 굳이 날이 길고 좁은 필룸(Pilum)을 만들 필요가 없다.
차라리 길이가 짧고 촉이 저급할지라도 많이 던질 수 있는 투창이 필요했다.
붉은 강철이라면 내 뜻을 이해할 것이다.
나는 수작업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투창 무더기를 보며 조용히 편제를 고민했다.
일단 마을 인구는 대략적인 통계로 총 350명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이 정도면 전성기였던 북방 왕국 기준으로도 충분히 큰 마을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어엿한 거점이었다.
물론 그중 서른 명 남짓한 인원이 이미 방진 보병으로 분류되어 훈련 중이고,
또 서른 명 남짓한 인원이 보조 병력으로 대기 중인 준전시 상황이기는 했다.
아마 남녀 혼재가 흔한 문화와 전시상황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숫자다.
하지만 전투 인원을 확보했다고 해서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었다.
내년을 위해서라면 이 노동력을 서둘러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고 그러려면 이 지겨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편재 대기 중인 보조 병력과 투창 무더기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시 연병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바삐 움직이는 마을 중앙에서 누군가가 나를 다급히 불렀다.
“기, 기사님! 큰일입니다!”
“또 습격입니까?”
“그게 습격이 맞기는 하는데···.”
야습을 실패한 이후로 야만인들은 꾸준히 병력을 보내 우리를 도발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또한 외부로 나간 인원을 습격을 받았는지 주민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병사들을 부를 필요도 없다.
나는 마침 챙겨온 검을 들고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어 하는 주민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리고 마침 도착한 목책과 정문에선 한참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망쳐! 빨리, 빨리!”
“으악, 제발 문 닫지 마!”
상황이 이상하다.
분명 놈들이 습격해올 때는 초병이 이를 알리고 정문을 닫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는 다르게 정문도 열려있었고 한참 일하던 주민들도 정문 근처로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뭐 하는 짓들이지.
나는 주민들을 향해 다가가 당장 흩어지라는 고함을 내지를 생각이었다.
정문 앞에서 그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푸르륵 - -!
“?”
고개를 들자 허둥지둥 도망치는 사냥꾼 두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야만인도 맹수도 아닌 하얀색 형체 한 마리가 콧김을 내뱉었다.
흰 눈처럼 새하얀 털과 육중한 몸체.
마치 천년을 산 나무처럼 하늘 높이 뻗어있는 아름다운 가지 뿔.
사냥꾼들을 쫓아와 마을 정문을 헤집어 놓은 녀석은 바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야생 흰 뿔 사슴이었다.
스릉!
“······뒤로 물러나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기사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정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자, 한참 투레질을 하던 흰 뿔 사슴이 사냥꾼을 향한 공격을 멈췄다.
내 기운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일반적인 흰 뿔 사슴보다 두 세배는 커 보이는 녀석은 마치 흑요석 같은 눈동자로 조용히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냥꾼들을 향해 물었다.
“화살을 쐈습니까?”
“미, 미쳤습니까. 영물인 것 같아서 조용히 비켜 가려고 했는데······.”
이 광활한 북방에선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대표적으로 활보다 작은 동물 새끼, 영역을 확고하게 지키는 맹수.
그리고 영물이라 일컫는 산수들이다.
유능한 사냥꾼은 오래된 사냥꾼이다.
자연을 업으로 살아가던 이들이 그런 기본적인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다친 사냥꾼들을 마을 안쪽으로 보내고 검 끝을 놈에게 겨눴다.
“왜 먼저 공격했나.”
누군가 본다면 동물을 상대로 말을 건다고 미친놈 취급을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서서 사슴과 마주하고 있다면 그런 소리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놈은 지금······.
푸르륵!
내 말을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어머! 저, 저 고개 흔드는 거 봐!”
“진짜 영물 맞네······.”
참 좋은 구경 나셨다.
나는 도망은커녕 주변에서 구경 중인 주민들을 향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놈이 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어서 다행이지 마음만 먹으면 주민들 반절은 뿔로 치어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다만 그 모습이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다워 주민들은 쉬이 떠날 생각을 못 했다.
“자자, 모두 물러나세요!”
“애들도 아니고 뭔 짓입니까! 다들 각자 자리로 돌아가세요!”
뒤늦게 도착한 자경대가 주변을 정리한다.
그리고 내 신호에 맞춰 야외에서 활동하던 주민들을 전부 목책 안으로 들여보내고 열어두었던 정문을 닫기 시작했다.
문 앞에는 이제 나와 녀석뿐이었다.
나는 겨누고 있던 검을 조용히 내렸다.
“······영역을 침범했다면 미안하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영물의 피를 볼 수는 없다.
나는 점점 안정을 되찾는 녀석을 향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뒤로 물러났다.
푸륵!
그러자 녀석도 무언가를 수긍했는지 약한 투레질과 함께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을 통달한 것 같은 눈으로 인간이 세운 마을을 둘러보는 흰 뿔 사슴.
인제 보니 아름다운 털 뒤로 보이는 수많은 흉터는 투쟁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파스스스스 - - -!
뒤로 물러난 놈이 고고한 몸짓과 함께 다시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용하던 숲은 시끄럽게 흔들리며 녀석을 따라가는 수많은 흰 뿔 사슴 무리가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아······!”
누군가 내뱉은 격한 감탄.
겨울 숲 사이로 보이는 흰색 파도는 쉬이 범접할 수 없는 태동이었다.
아마 이 광경은 오늘 목격한 이들로 전해져 신비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다르게 나만큼은 속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철컥.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저 멀리 대열을 이룬 채 뛰어가고 있는 흰 뿔 사슴 무리를 주시했다.
적어도 50마리? 아니, 100마리는 가뿐하게 넘어 보이는 엄청난 규모다.
저렇게 큰 무리는 평원이 있는 북방 남쪽 부근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길들일 수는 없을까.
나는 왕국이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절, 기사왕이 태풍처럼 끌고 다녔던 한 군대를 불현듯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북방기병대.’
흰 뿔 사슴을 타고 전장을 호령했던 그들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갈망을 노려보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