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검은 머리 기사왕 16화
“Ouo? Vy!”
휙!
“컥, 커억!”
빛 한점 들지 않는 구덩이 감옥 사이로 야만인이 던진 올가미가 떨어진다.
그리고 그 올가미는 가만히 자고 있던 한 남성의 목을 낚아채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먹을 돼지를 잡듯 구덩이 감옥에서 사람을 끌고 올라는 야만인.
목이 붙잡힌 남성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온몸을 버둥거렸다.
“안, 안돼!”
“여기야! 여기 도와줘!”
하지만 남성이 끌려가기 전 주변에서 잠을 청하던 다른 사람이 마치 개미처럼 모여들어 남성을 끌어당겼다.
이대로 끌려가면 무슨 꼴을 당할지 뻔하다.
팔이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붙잡아 지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도와주어야 했다.
“Pow! Pow a!”
한참 실랑이가 벌어진다.
사람들은 하나둘 몰려들어 올가미와 연결된 밧줄을 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올가미를 던져본 놈들은 이런 일이 매번 있는 노역이라는 듯 짜증 어린 고함을 지른다.
그다음 구덩이 안으로 묵직한 돌과 오물을 집어 던져 사람들을 떼어낸다.
이 높이에서 맞았다가는 그대로 머리가 터져 죽을 위협적인 돌멩이.
끝까지 버티던 사람들은 결국 울음과 함께 남성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컥, 컥······!”
철컹!
남성은 그대로 끌려가고 문이 닫힌다.
그러자 그나마 내려오던 빛 한 줌은 다시 찾아온 적막과 함께 사라진다.
칠흑과 같은 어둠.
더러운 오물 냄새와 사람들이 참아내려 애쓰는 처절한 울음소리.
벌써 102번째 ‘가축’을 내보낸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는 무도한 야만인 놈들만은 아니었다.
삐익!
부시럭, 부시럭.
야만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서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수풀이 흔들리며 숯으로 얼굴을 까맣게 위장한 세 사람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부러지는 검이 말했다.
“······용케 찾으셨습니다, 어르신.”
“젊을 적 실력 좀 나왔지, 허허.”
비록 몸이 늙어 창과 방패를 들 수는 없었지만, 사냥꾼 출신 노인들이 갈고 닦은 노하우와 직감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서로 친하게 지내던 화살 깃털과 낮은 풀숲은 야만인 놈들이 남긴 흔적을 추적했다.
결과는 당연히 성공적.
마을을 떠난 우리는 하루가 채 지나기 전, 놈들이 전부 모여 있는 거대한 마을을 지도 위에 기록할 수 있었다.
횃불과 움막 숫자가 상당하다.
나는 야만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조용히 앉아 읊조렸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군.”
야만인 놈들 사이에 부족을 통합할 걸출한 지도자가 나온 게 입증되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런 엄청난 규모를 가진 대 부족이 탄생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압도적인 전력비 앞에 절망하기보다는 하나라도 더 놈들의 숫자와 생활 양식을 확인하기 바빴다.
놈들의 위치를 확인했으니, 그 길과 거리가 충분히 가늠된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절벽 아래를 훑으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전략적 영감과 경험을 붙잡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순간 집중을 깨는 괴성이 진지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Uo! Uo! Uo!
Cahw! Cahw!
놈들이 원숭이처럼 날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름을 연호하며 말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런 늦은 밤,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 앞에 우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마을 점령도 처참히 실패한 마당에 축제라도 벌이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 소란도 잠시일 뿐 이내 그 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꿀꺽.
유난히 거대한 움막에서 뼈 장식으로 치장한 야만인 한 마리가 걸어 나온다.
그리고 그 야만인이 손을 들어 올리자, 놈들은 언제 시끄럽게 굴었냐는 듯 입을 꾹 다물고 행동을 멈췄다.
엄청난 장악력이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감각을 날카롭게 긁는 놈의 기세였다.
정제되지 않은 기운, 그런데도 무언가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는 이 무형.
나는 놈이 상당한 실력을 갖춘 오러 사용자임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 - - - - - -.”
끄아아아아악 - - - -!
놈이 손을 들어 올린다.
그러자 야만인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 감옥에서 끌고 온 인간 남성을 맨손으로 갈기갈기 뜯어내기 시작했다.
하늘은 어느덧 만월.
선택된 재물이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릴수록 놈들은 광기를 품었다.
전쟁을 앞둔 전사가 가축을 잡듯, 놈들 또한 인간을 잡은 것이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갑시다.”
야만인 전체가 흥분한 상태다.
더 이상 있다가는 피를 본 놈들로 인해 위치와 흔적이 발각될 수도 있었다.
야만인 마을 위치와 우두머리 정체까지 발견한 나는 깔끔하게 마음을 접고 한참 경계 중인 마을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한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돌아가려는 발걸음을 잠시 붙잡고 화살 깃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르신, 화살 한 번만 쏩시다.”
“놈한테 통하겠습니까?”
앞은 가파른 절벽이고 뒤는 숲이다.
아래가 뻔히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저격을 가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그쪽이 아닙니다, 주시고 먼저 가세요.”
하지만 오러 사용자인 놈에게 이런 조합한 화살이 통할 리가 없었다.
나는 그쪽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활을 건네받고 능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Uo! Uo! Uo!
참으로 신나있다.
나는 축제를 즐기고 있는 놈들을 향해 인상을 찡그리며 활시위를 당겼다.
끼이이이이익.
호흡을 멈춘다.
하늘 또한 내 뜻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차갑던 겨울 칼바람이 한순간 멈췄다.
화살을 날리기 딱 좋은 때.
나는 망설임 없이 시위를 놓았다.
퉁!
화살이 허공을 가른다.
표적은 놈들의 족장도, 날뛰고 있는 야만인 무리도 아닌 바로 인간 재물이었다.
푸슉!
고통으로 울부짖던 남성은 목에 화살이 꿰뚫려 편안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잦아든 비명처럼 축제를 즐기던 놈들 또한 쥐죽은 듯이 가라앉았다.
편히 쉬어라.
나는 인간 남성을 위해 짧게 기도한 뒤 그 현장을 빠르게 벗어났다.
이 날카로운 화살이 다음은 다른 곳을 노리기를 기약하며.
* * *
“식사하세요!”
“으아아아! 드디어 끝났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푸근한 인상을 한 아주머니 두 명이 수프가 가득 담긴 냄비와 빵을 들고 왔다.
그러자 연병장 바닥에 누워 땀을 식히던 신병들은 언제 힘들어했냐는 듯 우르르 몰려와 냄비와 바구니를 받았다.
정말 이가 갈릴 정도로 혹독한 훈련.
유일한 낙은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보는 것과 배식 되는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와······! 냄새 좋다.”
“잘 먹겠습니다!”
배식은 무려 하루 두 번 배급된다.
거기에 식단은 평소 먹던 허여멀건 뿌리 수프가 아닌 두툼한 고기가 들어간 수프였고 빵 또한 방금 갓구운 밀 빵을 주었다.
마을 사정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데, 이렇게 좋은 음식을 주어도 되는 걸까?
남기지 말라는 명령 빼고는 별다른 말이 없었기에 신병들은 도리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수프를 보자 깔끔하게 사라졌다.
누군가 수저를 뜨는 것을 시작으로 오직 먹는 소리만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쩝쩝.
우걱우걱.
배가 차기 시작하자 기운이 난다.
잠시 사라졌던 이성도 따뜻한 기운과 함께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잠시 미뤄두고 있던 걱정 또한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적막이 찾아오기 무섭게 찾아오는 막연함.
한참 열심히 수프를 퍼먹던 어린 신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저희 정말 괜찮은 걸까요.”
“뭐가 또.”
“계속 이렇게 단순한 훈련만 하고 있잖아요. 저는 창 한 번 못 휘둘러봤어요.”
처음 기사님이 나와 시연과 연설을 할 때는 다들 설레고 사명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어지는 훈련은 방패를 들고 뛰는 것과 더불어 기초적인 근력 운동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물론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가 갈릴 정도로 힘들었다고 해도 맛있는 음식과 유쾌한 전우들 덕에 충분히 버틸 만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이렇게 호강하고 있는 사이 매일 공사 현장을 나가는 가족들에게 너무나 미안했고 또 걱정되었다.
곧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데, 창이라도 한 번 휘둘러봐야 그런 가족들 앞에서 체면이라도 살지 않겠는가.
이상은 저 멀리 있는데 현실은 연병장을 구르며 흙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동시에 시선은 한쪽으로 향했다.
우걱우걱.
쯉쯉.
참 잘 먹는다.
보자마자 그 생각이 든 한 사람은 자기들보다 한참이나 작은 눈투성이였다.
다만 자신들과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그녀도 자신들과 같이 연병장을 구르고 매일 같은 밥을 먹는다는 것.
기사님의 제자가 아니었던가?
그들 기준에서 엄청난 실력을 지닌 눈투성이가 이런 단순하고 힘든 훈련을 받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했다.
여태 군소리 한번 없이 훈련을 받는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 - - - - - - -.”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결국 가장 나이가 어린 신병이 총대를 메게 했다.
“저, 그······. 괜찮으세요?”
먹는 것에 집중하느라, 주변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잘 듣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만큼은 흘려듣지 않는지 눈투성이는 고개를 들었다.
“네?”
“검, 검을 배우셨잖아요. 이런 훈련을 받아도 괜찮으신가 해서······.”
그들이 어려서부터 들어온 기사는 저 높은 하늘을 나는 고고한 학이었다.
그만큼 재능이 있어야 했고 재능이 입증된 순간 다른 대우를 받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눈투성이는 눈과 흙먼지를 뒤집어쓴 자신들과 다르지 않았다.
마치 이 방진을 이루는 평범한 병사이자 흔한 구성원처럼 말이다.
눈투성이는 한참 남은 음식을 씹었다.
그리고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하찮은 훈련이라고 생각하세요?”
“네, 네? 아뇨! 절대 아닙니다!”
어린 신병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것은 본심이 들켜서가 아닌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냐는 억울한 반응이었다.
만약 자신들을 단순히 잡병이나 방패막이로 쓰려고 했다면 이런 질 좋은 무기와 영양가 가득한 음식을 줄 리가 없다.
이들이 아무리 떼가 지고 세속적인 사람일지라도 그날 자신들을 가르쳤던 기사님이 적어도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런 저희로 될까 싶어서요······.”
다만 불안했을 뿐이다.
밥만 축내며 뛰고 있는 자신들이 정작 필요할 때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런 불안한 평화가 계속될수록 몰려올 여파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다.
“- - - - - - -.”
그러자 넌지시 그 생각과 진심을 읽은 눈투성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듯 이 사람들도 진지한 태도로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처음 물음에 실망할뻔했던 마음이 한순간 사르르 녹아내린 기분이다.
눈투성이는 자세를 공손하게 바꾼 뒤 어느새 주변으로 모여든 이들에게 대답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이런 훈련을 하는 이유요?”
“아뇨, 스승님이 여러분에게 창과 방패를 맡긴 이유요.”
스승님은 농부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뛰어난 전사가 될 수 있다 믿었다.
모든 게 타고난 재능으로 판별 받는 이 암흑의 시대에서 오직 스승님만이 인간 필부의 가능성을 믿은 것이다.
그러니 부응해야 한다.
스스로 하찮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전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믿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낫다.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던 그들은 이 목소리를 영원히 잊지 못했다.
“같이 해봐요, 할 수 있어요.”
노력을 예고하는 눈투성이 앞에 더 이상 불만을 표하는 이는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