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검은머리 기사왕 15화
“조잡하군.”
“······평가가 너무 박한데.”
“사실 아닌가? 이러니까 야만인 놈들이 제집처럼 드나들지.”
한참 전후 처리를 하느라 바빴던 다음날 새벽, 계곡에 남아있던 붉은 강철과 화전민들이 마을로 거처를 옮겨왔다.
물론 마을 분위기가 초상집이라 노골적인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주민들도 은연중에 우리를 반기는 분위기였다.
왜냐하면, 붉은 강철이 친히 끌고 온 수레에는 모루와 함께 수많은 강철 촉 창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질 좋은 무기는 곧 전투력.
한참 시체를 치우고 불을 꺼야 했던 주민들은 막연한 희망을 지나쳐, 제대로 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와 반대로 실질적인 문제는 이제 중책을 맡게 된 우리가 해결해야만 했다.
붉은 강철이 내게 말했다.
“축소하자고.”
붉은 강철은 오늘 하루 마을 목책을 둘러보며 무려 4개가 넘는 개구멍을 찾아냈다.
단순히 목책만을 넘어온 줄 알았는데, 사전에 침입 루트를 만들어 둔 것이다.
주변 경계가 얼마나 허술했으면 이런 초보적인 방법을 허용했을까.
이것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목책 문제가 아닌 고질적인 인력 부족 탓이었다.
수염을 쓰다듬은 붉은 강철이 내게 말했다.
“배치가 너무 비효율적이야, 적어도 반은 줄일 수 있어. 산맥을 뒤쪽으로 두고 차라리 정면 목책을 두 겹씩 두르지.”
“목재는?”
“허물었던 걸 재활용하면 될 거야. 철로 보강을 못 해주는 게 아쉽구먼.”
경계 인원이 부족하다 해서 교체 횟수를 줄이고 시간을 늘렸다가는 장기적인 전투력 손실과 사기 저하를 불러온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활동 영역을 줄여 꼭 필요한 지역에만 인원을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어차피 내년 농사는 글렀다.
식량을 보관해 둔 창고와 거주 시설을 보강하고 이번 겨울을 버텨야 했다.
나는 머릿속에 남아있던 농경지를 빠르게 지우며 붉은 강철에게 말했다.
“목책은 맡기지.”
“흐흐, 걱정하지 마라. 옛날 생각 제대로 나게 해줄 테니까 말이야.”
북방 인간의 튼튼한 방진과 더불어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 하나 있다면 바로 지독하리만큼 상대를 붙잡는 방어전이다.
물론 군사적 열세와 열약했던 보급과 맞물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전략이었지만, 우리가 웅크리는 걸 더럽게 잘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DNA가 저들에게도 과연 남아있을까?
아니, 상관없다.
북방이라는 요람에서 심장을 받았다면 근성은 흙바닥을 구르며 만들면 될 테니까.
“연병장 자리는 남겨둬.”
나는 희미한 웃음을 뒤로한 채 찬 바람이 불어오는 공터를 조용히 지나갔다.
* * *
“·········!!”
눈투성이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온몸을 버둥거렸지만, 느껴지는 건 차가운 눈과 냄새나는 피가 아닌 따뜻한 이불 감촉이었다.
아, 꿈이었구나.
아니면 어제 있었던 일인가?
어디선가 맡아지는 포근한 빵 냄새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탄성을 오물거리게 했다.
눈투성이는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켜 몽롱한 두 눈을 열심히 비볐다.
“어? 일어나셨다.”
“얼굴 들이밀지 마! 놀라시잖아!”
역시 근처에 누군가 있었다.
눈투성이는 흐릿한 시야 사이로 서로 티격태격하는 두 명을 발견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지난밤 치열했던 전투에서 자신을 지켜주었던 이들을 말이다.
눈투성이는 그 기억이 남긴 상흔들을 쓸어내리며 신병들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출혈 때문에 쓰러지셨어요. 저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그래, 기억이 난다.
오러를 다루는 야만인 전사와 그런 놈에게 죽을뻔한 자신을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서늘한 감각은 여전히 피부 위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건 아직 가시지 않는 거부감이었다.
살인을 향한 원초적인 거부감.
눈투성이는 조용히 고개를 내려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 - - - - - -.”
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것은 다람쥐를 잡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촉이었고 또 불쾌한 느낌이었다.
날이 자르고 간 목의 단면, 순간 빛을 잃고 서서히 식어가는 동공.
이 모든 걸 다시 한번 되새긴 눈투성이는 결국 헛구역질이 섞인 침을 뱉었다.
“·········퉤.”
모든 것에는 처음이 있다.
눈투성이 또한 이를 각오하고 있었기에 기꺼이 검을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달갑지 않은 그 경험은 아직 미숙한 전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웠다.
그래, 오늘만 힘들고,
내일은 툴툴 털어내 버리자.
눈투성이는 덜덜 떨려오는 오른손을 꾹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익숙해질 테니까.
아무렇지 않아야 하니까.
그것은 마치 덮어놓고 외면하는 비겁한 각오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스윽.
하지만 그 순간 떨리는 오른손을 감싼 것은 반대쪽 왼손이 아닌 타인의 손길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기사님.”
“네?”
“살려주셨잖아요, 저희 모두.”
신병이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뒤이어 다가온 다른 신병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 위에 손을 포갰다.
마치 서늘함을 나눠 가지겠다는 듯,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온기.
손 떨림은 부화를 끝낸 애벌레처럼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 손은 무거우며 따뜻했다.
“아, 맞다! 배고프시죠? 안 그래도 마을 주민분들이 빵을 구워서 가져다주셨어요.”
“와! 밀 빵은 없어?”
“저리 가 이 바보야!”
일어나기 전부터 빵 냄새가 났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동료와 투덕거린 신병은 빵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와 눈투성이 앞에 내밀었다.
빵은 거칠고 투박했다.
하지만 빵을 감싸고 있는 천과 바구니에는 고맙다는 글씨가 가득했다.
눈투성이의 잠을 깨웠던 그 푸근한 빵 냄새는 삼삼오오 밀을 모아 빻은 주민들의 감사 인사였고 정성 어린 마음이었다.
거부감 뒤에 남은 또 다른 이면은 마치 사명감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킁.”
눈투성이는 콧물을 삼켰다.
그리고 또 한 번 눈가를 훔친다.
성장이라 말하기에는 어쭙잖은 시간일지라도, 그녀에게만큼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거센 풍랑은 붙잡아주는 인간성의 등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음은 마치 흔들리지 않던 검 끝처럼 견고해져 있었다.
냠.
눈투성이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밀 빵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목이 계속해서 매이는 이유는 빵이 너무 크고 물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성장을 시작한 소녀는 한참 빵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뿌옇게 변한 게 목이 먹먹하다.
눈에서 물이 흘러 볼을 적셨다.
신병 둘은 조용히 눈을 감아 소녀가 흘리는 눈물을 모른 척해주었다.
* * *
“하나, 둘, 셋, 당겨!!”
“으랴아아아압!”
장정들이 괴성과 함께 밧줄을 당긴다.
그러자 두꺼운 목책은 하늘을 향해 일어서기 시작했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미리 파두었던 구덩이에 뿌리를 고정했다.
기존에 있던 목책들을 허물고 효율적인 설계로 재구성하는 과정.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주민들은 점점 완성되어가는 목책을 보며 만족했고 작업 효율 또한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이래서 유능한 기술자가 있어야 한다.
나는 청사진을 잘 그려주는 붉은 강철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떴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가 처리해야 할 숙제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놈들이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지금, 바로 병사들을 육성하는 일이었다.
“- - - - - - - -.”
임시로 만든 연병장.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
연병장에는 나 포함 총 34명이 서 있다.
기존 자경대를 포함해 자질이 보이는 화전민과 주민들 몇 명을 포함한 숫자다.
물론 그중에는 눈투성이와 함께 익숙한 얼굴들인 신병들이 함께 있었지만, 굳이 아는 체를 하지는 않았다.
내가 특별히 신경을 쓰기에는 눈투성이의 표정이 상당히 다부졌기 때문이다.
헛기침이 나온다.
나는 잠겨있는 목을 풀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든 상관없다. 오늘부로 너희는 개인에서 벗어나 병사로 다시 태어난다.”
겨우 목책을 세운 조그마한 마을에, 겨우 서른 남짓밖에 되지 않는 신병들.
오크 놈들과 귀쟁이들이 대놓고 비웃을 정도로 하찮은 규모지만, 모든 것에는 초석이 있고 시작이 있는 법이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닥에 세워둔 떡갈나무 방패를 한 바퀴 돌려 쥐고 정면을 바라봤다.
“방패를 세워봐.”
내 말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신병들이 깜짝 놀라 방패를 집는다.
그리고 엉성한 몸짓으로 방패를 세워 제각기 편한 방법으로 대열을 이루기 시작했다.
누구는 위로, 누구는 아래로.
높낮이도 맞지 않고 쥐는 방법도 다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탓하고 호통을 치는 대신 일일이 대열을 이동하며 그들에게 방패 잡는 법을 알려주었다.
쿵!
“더 위로.”
“팔목 전체로 감싸라.”
나를 가리는 것이 아닌 전우를 가리고 목은 거북이처럼 잔뜩 웅크려라.
다리는 언제든지 뛰쳐나갈 수 있도록 굽히면 그것은 저절로 지지대가 되어준다.
“후우, 후우······.”
철저한 부동자세.
내가 알려주는 방법을 따라 방진을 만든 신병들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우습게 본 방패가 꽤 무겁다.
분명 뛰지 않음에도 이마에 땀이 맺힌다.
긴장과 초조함,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숨과 뜨거운 심장 박동.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달아올라 묘한 열기가 이들에게 풍겨 왔다.
엉성하다.
하지만 자세가 바로 맞다.
나는 분명 하나를 이루고 있는 방진 주변을 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모루가 없인 망치도 없다. 그건 전쟁도 똑같다! 너희가 만든 이 방진이 없다면 대열을 뿌리 없는 나무처럼 무너진다.”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가 딱 한 가지 부대만 데리고 올 수가 있다면 이 떡갈나무 방패로 무장한 모루 진을 데려올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북방군의 핵심이었으며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기둥이었다.
“······정말 이게 답니까, 기사님?”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어린 신병 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겨우 이런 엉성한 방진을 만드는 잡병이 핵심이 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래, 전쟁에선 정말 이게 전부다.”
나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신병들이 세운 방진을 검날로 치며 그 견고함을 보여주었다.
쿵! 쿵! 쿵!
“힉!”
“집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단 두 가지다! 방패 위에 얹혀 돌아오거나.”
때로는 직선이 되고 때로는 원형이 되어 전쟁의 뿌리 깊은 뼈대가 된다.
많은 영웅과 적들이 일반 보병으로 된 방진을 비웃었지만, 그들은 이보다 일찍 무너져 까마귀밥이 되거나 불구가 되어 은퇴했다.
가장 핵심은 기본.
나는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직접 방패를 들고 돌아오거나!”
방금 내게 질문한 신병이 한동안 어안이 벙벙하더니 이내 다시 방패를 쥐었다.
그리고 대열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가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쳐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부쩍 다가온 차가운 겨울을 느끼며 입김을 길게 내뱉었다.
그러자 마치 전운을 알리는 것 같은 눈바람이 방진을 만든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팔다리가 떨려오는 이 추위도 연병장을 가득 메운 열기는 막지 못했다.
나는 고함을 내질렀다.
“앞줄부터 뛰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