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검은머리 기사왕 14화
오러.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이 다룰 수 있는 강력하고도 날카로운 힘.
스치기만 해도 살과 피가 터지는 그 힘은 일반 병사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불가항력이라는 공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에 다시 한번 도래했다.
오러를 다루는 야만인이라니, 사람들 사이에서 끓어오르던 전의는 한순간 사라진다.
“- - - - - - -!!!”
쿵, 쿵, 쿵, 쿵!
허공을 향해 거대한 함성을 내지른 놈이 방진을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온다.
표적이 된 자경 대원은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직!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상하게 자경 대원은 정확히 반으로 찌그러져 죽었다.
엄청난 힘과 파괴적인 오러가 만나, 이런 끔찍한 광경을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으, 으아아아 - - -!”
“도망쳐! 도, 도망쳐!”
마치 도축한 고기를 내놓은 듯 갈라진 면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내장들.
조금 전만 해도 용맹하게 싸우던 전우가 한순간 고깃덩어리로 변한 모습에 나머지 자경 대원은 공황에 빠졌다.
“대, 대열을 지켜라! 물러나지 마라!”
방진이 무너진 순간 전투는 끝난다.
그걸 아는 촌장은 사방으로 흩어지려는 자경대를 독려하려 했다.
하지만 그 외침이 무색하게 놈은 또 다른 피해자의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아, 아아아······.”
콰직!
악력만으로 두개골을 부쉈다.
오러를 제외하고도 놈은 비이상적인 완력을 타고난 야만인 전사였다.
쉬이익 - -!
푹, 푹!
몇 없는 궁수가 화살을 쏘아본다.
하지만 그 또한 두꺼운 가죽과 근육을 뚫지 못했고 놈은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중얼거림과 함께 피식 웃는다.
사냥감을 향한 조롱이다.
그 비웃음을 기점으로 주민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방진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자경대 몇몇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엄, 엄마!”
“으아아아앙!”
방진이 사라지자, 그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주민들이 그대로 노출된다.
대항할 수도,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어 아이들과 함께 눈을 감는 그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던 놈은 주민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노오옴!!”
하지만 양손 도끼를 들고 나타난 촌장이 놈의 앞을 황급히 막아섰다.
자신이 무능해 이런 끔찍한 사달이 났을지언정, 눈앞에서 주민들이 죽는 건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성을 내뱉은 촌장은 들고 있던 양손 도끼를 힘차게 내려찍었다.
“으아아아아 - -!”
깡!
하지만 오러로 무장한 놈은 마치 파리를 쫓듯 가볍게 도끼를 튕겨낸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얼이 빠진 촌장을 그대로 차버렸다.
퍽!
“컥!”
겨우 발길질 한 번이다.
놈이 가한 발길질 한 번에 촌장은 주민들 앞으로 날아가 쓰러졌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각혈, 힘이 풀려 말을 듣지 않는 팔다리.
촌장은 수염을 피로 적시며 불지옥으로 변한 마을을 둘러봤다.
“쿨럭, 쿨럭!”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난 잘못은 후회가 되고 행동하지 않았던 미련은 원망으로 변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기에는 자신은 너무 늙고 지쳤다.
“······도망가시오.”
야만인 전사가 다가온다.
촌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놈한테 뻗으며 도망치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오늘따라 무거운 눈꺼풀은 마치 마지막 순간을 암시하듯 서서히 감겨 왔다.
터벅, 터벅, 터벅.
하지만 그 눈은 완전히 감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흐릿한 시야 사이로 조그마한 형체 하나가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형편없이 후들거리는 다리, 마치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검 끝.
그런데도 야만인 전사를 가로막은 눈투성이는 마치 골리앗을 상대로 나선 용감한 다윗을 보는 것 같았다.
“Uoea?”
야만인 전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이들이 도망치는 상황에서 겨우 애 한 마리가 자신을 막다니.
미개한 녀석은 눈투성이가 지닌 고귀한 용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놈은 오러가 맺힌 둔기를 들어 올렸다.
“안돼!”
“아가씨!”
신병 둘이 다급히 뛰어온다.
사람들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남들처럼 최후를 맞이할 광경에서 눈을 뗀다.
‘떠, 떠올려라.’
본능이 죽음의 향기를 맡았다.
이 모든 대의도, 세상을 바꿀 기회도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그런 위기의 순간에도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스승님.’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저 강대한 오러를 무슨 수로 막아내야 할까.
머릿속에서 한 폭의 달처럼 춤을 추는 검무는 한가지 답밖에 내놓지 않았다.
‘일 점.’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검을 움직여야 할 때다.
눈투성이는 자신을 향해 맹렬히 날아오는 오러와 검날을 노려보며 두 눈을 떴다.
흐릿한 무형이 보인다.
위기를 파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하지만 아무리 그 점을 노려보고 이를 악물어도 아직 작고 흐릿하기 그지없었다.
1년만 더, 아니 2년만 더 수련했다면 저 점을 잘라낼 수 있지 않았을까.
눈투성이는 후회했지만, 검을 내지르는 데는 한점 망설임이 없었다.
만약 오늘이 죽어야 하는 날이라면,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죽을 것이다.
스스스슥, 챙!
“아······.”
이상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놈의 가한 맹렬한 공격이 몸이 아닌 저 땅에 허무하게 처박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안도의 한숨 대신 속에서 우러나오는 육성을 내뱉었다.
허리춤이 가볍다.
스승의 검이 뽑혀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을 뽑은 이는 눈투성이가 멀다고 생각한 일 점을 정확하게 찔러 날카로운 오러를 가뿐하게 털어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하듯 정지한 세상과 저 멀리 뜨기 시작하는 희미한 여명.
드디어 제자를 찾은 부러지는 검은 눈투성이를 향해 이리 말했다.
“무모했다.”
“······스승님.”
부러지는 검은 눈투성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러를 막은 검을 가볍게 털어내자, 칼날이 먹먹한 공기와 함께 공명했다.
내리던 눈이 파르르 떨린다.
이상하게도 그 공명은 사람들에게 쌓인 두려움을 거둬가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눈투성이는 서서히 빛으로 번지는 스승의 뒷모습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일행과 길이 엇갈렸다.
아니, 엇갈렸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미련했고 너무나 안일했다.
놈들이 마을 정문을 열 건 주민들을 학살하건 무조건 일행들부터 구했어야 했는데,
뒤늦은 흔적만을 쫓아가느라 정작 중요한 보호자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저 멀리 눈투성이가 보였다.
아이는 처음 내 마음을 움직였던 그때처럼 사람을 뒤로하고 긍지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늦지 않게 해준 신에게 감사하며 제자가 챙겨와 준 검을 털었다.
“고생했다, 쉬어라.”
길었던 새벽이 지나 해가 뜬다.
마을을 불태우던 불은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비명 또한 잦아든다.
이제 남은 것은 더러운 오러를 뚝 뚝 흘리고 있는 야만인 전사뿐이었다.
나는 놈을 향해 말했다.
“네놈이 다 망칠뻔했다.”
나는 눈투성이를 후보로 인정했다.
그 아이가 보여준 가능성과 이타성은 성장할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은연중, 검술과 관련된 재능은 상당 부분 체념한 상태였다.
훈련 중 보여준 모습으로만은 평범한 범인, 그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
눈투성이가 오러를 앞에 두고 보여준 검은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날카로웠는데도 겨우 훈련 내용으로 아이를 판단했다.
과연 오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암흑으로 물들었던 어제가 지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순간이 왔다.
비록 몸은 지치고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북방 어머니는 기뻐하고 있었다.
물론 한 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네 놈 가죽을 벗겨 북으로 만들어주마.”
내가 북방에서 아는 가장 심한 욕이다.
단순히 원색적이고 불쾌한 욕이 아니라,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놈은 말뜻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몸을 흠칫 떨며 으르렁거렸다.
“Oiu······, Ora!”
후웅- - -!
놈은 본능적으로 내가 이중 가장 위협적인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뒤 구분 못 하는 야만인답게 오러를 뚝뚝 흘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챙!
무게만 실리고 날카로움은 없다.
이래서야 숙영지에서 벤 오크 서전트보다 실력과 투기에서 떨어진다.
나는 녹물처럼 흘러내리는 오러를 가볍게 빗겨내고 손아귀에서 검을 돌렸다.
스르르르릉.
서걱!
“끄아아아아악 - - -!”
놈의 입에서 처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잘라낸 손가락이 허공을 날았고 거대한 둔기가 바닥에 떨어진다.
놈은 손가락이 잘려 나간 오른손을 붙잡고 울부짖어 보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돌려 가죽 갑옷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겨드랑이를 찍었다.
푹!
까드득!
살을 찌르고 뼈를 뒤튼다.
마치 가축을 도축하듯 나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날을 뒤틀었다.
그러자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쿵!
선천적인 오러란 이렇게 덧없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무기를 쥐어봤자, 그 손이 미숙한 전사의 것이라면 의미 없다.
물론 그 이치를 알 길이 없는 야만인 전사는 피를 주르륵 흘리며 나를 노려봤다.
서걱!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목을 쳤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바닥을 굴렀고 빼꼼 고개를 내민 여명은 완전히 떠오른다.
불길과 비명이 잦아들고
주민들이 안도하는 지금은
눈치 없는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자 모든 인간이 희망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왜 진즉 말해주지 않은 것이오?”
놈에게 발차기를 얻어맞은 촌장은 빠른 조치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물론 후유증으로 다시는 도끼를 들지 못하겠지만, 도리어 얼굴은 편해 보였다.
주민들을 끝까지 지켰다는 숭고한 명예가 그를 평온하게 만든 것이다.
기사왕이 이끌었던 북방군 출신답다.
나는 그런 촌장에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오러가 없는 검으로 오러를 이기는 사람이 부러지는 검 말고 또 있소?”
퇴역병 출신인 건 짐작하고 있었는데, 설마 같은 전장을 겪은 사람인 줄은 몰랐다.
나는 내 얼굴은 잊었어도 검만큼은 기억해주는 촌장이 반갑고 놀라웠다.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눈투성이에게 해주었던 대답과 똑같았다.
“어제 당신은 촌장이었고 나는 도움을 구하려는 사람이었죠, 그게 답니다.”
“······겸손하시구려.”
“물론 이제는 옛 전우고.”
하하하하!
촌장은 소리 내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의 웃음에 감화되어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젯밤이 서로 이익을 위해 힘을 나눴던 상대라면 오늘은 같은 피를 흘리고 같은 아침을 맞이한 북방인이다.
쉽게 나눌 수 없는 유대감은 이제 서로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해주었다.
호탕하던 웃음이 멈췄다.
“그 아이는 제자겠군.”
“······좋은 왕이 될 겁니다.”
그래, 새로운 기사 왕.
조용히 읊조린 촌장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난 세월과 과오를 잠시 잊은 채 나에게 주름진 손을 건넸다.
“부러지는 검이라면 맡길 수 있지. 마을 사람들을 잘 부탁합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제자를 키우는 스승과 죽음을 준비하는 노인으로 다시 만났지만, 오늘만큼은 전장을 날뛰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촌장은 그동안 가슴을 꽉 막고 있던 절망을 훌훌 털어버렸다.
나는 미래를 향한 희망을 품었다.
우리는 약속한 듯 한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북방을 위해.”
“······어머니 북방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