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검은머리 기사왕 12화
“어이, 교대야.”
“흐으······. 왜 이리 늦게 왔어.”
“제시간에 왔는데, 뭘.”
목책 위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자경 대원이 교대를 위해 다가온 동료를 반긴다.
이 혹한 추위를 겨우 가죽옷 하나만 입고 버티기 얼마나 힘들었던가.
몸을 덜덜 떤 그는 짜증이 몰려왔지만, 애써 웃는 낯으로 근무를 교대했다.
“특이사항 없지?”
“매번 똑같지 뭐. 내가 장담하는데 지금 쳐들어오면 무조건 뚫려.”
“킥킥 그걸 말이라고.”
하루가 멀다고 쳐들어오는 야만인 놈들 때문에 사람이 남아나지를 않는다.
오죽하면 2시간이던 근무가 3시간으로 늘어나고 근무 거리까지 멀어졌겠는가.
가뜩이나 엉성하던 경계는 이제 스스로 체감이 될 만큼 허술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걸 하나하나 지적하기에는 마을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촌장님은 어때?”
“고민 중이시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촌장님과 설전을 벌인 건 이미 유명하다.
그리고 그 설전은 마을 젊은이들 마음을 들끓게 했는데, 이유는 대부분 현재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강한 심리 때문이었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결정이 날것이다.
자경 대원은 제발 촌장님이 큰 결정을 해주기를 조용히 마음속으로 빌어봤다.
훅!
“어?”
하지만 그 순간 감시탑에 달린 유일한 횃불이 무언가를 맞고 꺼져버렸다.
조금 전부터 바람이 강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횃불을 꺼버린 모양이다.
“기름 좀 있어? 내가 불씨 가져올게.”
“············.”
“야, 기름 있냐니까?”
“············.”
횃불을 꺼트리면 조장한테 혼이 난다.
하지만 급한 자신과 다르게 친구는 답답할 만큼 대답이 없었다.
들리지 않는 걸까?
가뜩이나 피곤한데 대답이 없는 친구.
얼굴을 찡그린 자경 대원은 그런 친구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야, 안 들려? 기름이·········?”
털썩.
자경 대원은 두 눈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잡아당긴 친구는 이미 목에 투창을 맞고 즉사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아니라, 투창이었구나.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자경 대원은 자신도 모르게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야만인이 마치 벌레처럼 꾸물꾸물 목책을 넘어오고 있었다.
푸슉 - -!
바람이라 생각했던 투창이 또 날아온다.
그게 그가 본 생전 마지막 광경이었다.
* * *
탁.
“- - - - - - - -.”
눈이 뜨였다.
매번 제시간에 일어나던 기상이 아닌 이질적인 분위기로 인해 깨어났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작은 창문 틈으로는 그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새벽이다.
드르렁!
짚단을 치우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다.
밖에서 부산거리던 자경대 기척은 전부 사라진 지 오래고 마을 또한 조용하다.
오직 꺼질 듯이 일렁이는 벽난로만이 이 어둠을 밝힐 뿐이었다.
왜 눈이 뜨였는가,
무엇이 나를 깨웠는가.
이런 현상을 수없이 겪어봤던 나는 당황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창문을 조용히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소리 한점 없는 마을을 노려보며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했다.
소리, 냄새, 분위기.
오직 어둠과 무음임에도 불구하고 내 불안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덜컹.
나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옆에 문을 살며시 열며 건물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박, 사박.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한참 눈이 그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전형적인 겨울 새벽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주변을 경계하는 횃불 숫자가 반절 넘게 줄어있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징조인지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툭, 치지직!
나는 서둘러 건물 앞에 매달린 횃불을 들고 바닥에 던져 소화했다.
그런 다음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진 눈투성이를 흔들었다.
“스, 스승님?”
“쉿, 일행들을 깨워.”
냉정하게 말해 현재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인물은 눈투성이다.
나는 신호가 오기 전까지 건물에서 나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주변을 둘러봤다.
“쯧.”
젠장, 무기는 저들이 가져갔지.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무기로 쓸만한 물건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눈투성이가 벽난로 앞으로 잽싸게 달려가 불쏘시개를 뽑았다.
“여기요!”
좋다, 무기가 없는 것보다 낫다.
나는 눈투성이가 내미는 불쏘시개를 쥐고 날카로운 촉 끝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 불안해하는 눈투성이의 어깨를 움켜잡아주며 당부했다.
“신중하되.”
“망설이지 마라.”
잘 기억하고 있구나.
어느새 떨림은 멎었고 눈투성이는 맑은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안심하고 내 할 일을 할 차례다.
나는 불쏘시개를 움켜쥐고 다시 한번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 - - - -.”
아까보다 어둠이 더 짙어졌다.
횃불이 아까보다 더 줄어든 것이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어둠을 가로질러 가장 가까운 감시탑을 향해 뛰어갔다.
탁, 탁, 탁, 탁!
사다리를 타고 목책 위로 올라섰다.
원래 이쯤 되면 근처에서 경계를 서는 자경대가 나를 제지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감시탑 위에선 횃불은커녕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끼익!
킁킁.
피 냄새가 난다.
손을 뻗어 감시탑 아래쪽을 훑자 피가 흥건하게 묻어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한쪽 구석에는 목이 잘린 자경대가 죽어있었다.
야습이다.
나는 발끝에서 시작된 뜨거움이 머리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우리가 도착한 날 야만인이 야습을 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눈투성이와 일행들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 실책이다.
하지만 그 상념은 이내 차가운 이성과 만나 빠르게 식어 내렸다.
그나저나 야만인이 야습이라니,
놈들의 이런 체계적인 움직임은 그간 겪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자경대가 이리 속수무책 당한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달칵!
놈들은 철저한 야습을 위해 감시탑 근처에 달린 경고 종도 가져가 버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체가 들고 있던 활과 단검을 노획해 들었다.
그리고 목책을 길게 이어진 목책을 뛰기 시작하며 정문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탁, 탁, 탁, 탁!
시체, 시체, 시체.
정문 근처 경계병 대부분이 당했다.
그렇다는 건 야습을 가한 야만인이 노리는 건 한가지라는 소리다.
바로 우리가 들어온 마을 정문.
놈들은 이번 야습을 통해 아예 마을의 전복을 노리고 있을 게 뻔했다.
나는 목책 난간 위로 한쪽 다리를 올린 뒤 빠르게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저 멀리 정문이 보인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무언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절로 찡그려지는 인상.
내 예상대로 목책을 넘은 야만인 일부는 정문을 열기 위해 밧줄을 당기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힘껏 당겼던 시위를 놓아 정면을 향해 화살을 발사했다.
끼기기긱 - - -!
퉁!
푸슉!
화살이 허공을 날아 야만인 목에 명중한다.
덕분에 한껏 팽팽해진 밧줄은 그대로 풀어져 버렸고 막 열리기 시작한 정문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닫혔다.
“Ha a?!”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라며 무기를 들어 올리는 야만인들.
나는 거추장스러운 활을 내려놓은 뒤 불쏘시개와 단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목책 위에서 뛰어내려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Uoa?”
놈들이 달려오는 적은 발견했다.
하지만 하나라는 숫자를 확인했는지 이내 코웃음과 함께 내게 달려들었다.
“Aaaaaa!!”
후웅- -!
기세등등 워크라이를 내뱉은 야만인 하나가 나를 향해 몽둥이를 던진다.
텅!
몽둥이를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달려오는 놈을 향해 몸을 날려 불쏘시개로 얼굴을 후려친다.
콰직!
돌아가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돌아가는 목과 허공을 물들이는 검은색 핏물.
기세등등했던 고함은 빠르게 침묵했고 주변 놈들은 또 한 번 놀란다.
“후우······.”
익숙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한다.
마치 녹처럼 끼어있던 잠기운과 추위가 서서히 사라져가는 이 느낌.
나는 마음속 깊이 전의라는 장작을 때우며 두 눈을 번쩍 떴다.
휙!
불쏘시개를 던졌다.
번개처럼 허공을 날아간 촉은 또 한 놈의 가슴팍을 그대로 관통한다.
조잡한 철이라 두 번은 못 쓸 것이다.
나는 손바닥 위에서 능숙하게 단검을 돌려 손잡이를 역수로 잡았다.
그리고 당황한 다른 놈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뒤 그대로 날을 휘두른다.
서걱!
컥!
몽둥이로 어설프게 공격을 막으려던 놈 하나가 피를 쏟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는 조잡한 나무창을 찌르는 놈을 발로 차 갈비뼈를 부쉈다.
콰직!
놈들은 완전히 전의를 잃었다.
나는 단검으로 숨통을 끊고 목젖을 뜯어내며 남은 야만인들을 순식간에 죽여버렸다.
그렇게 도망치는 놈마저 잡아내며 상황을 정리할 무렵 종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땡! 땡! 땡! 땡! 땡!
정반대 목책에서 울리는 경고 종이다.
내가 정문 출입을 막는 사이, 어떤 운 좋은 경계병이 습격을 알아챈 모양이다.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부러진 단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온몸을 적신 피를 털어냈다.
잔혹한 야습을 덮기라도 하듯 하늘에선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한다.
“습격이다!”
“꺄아아악 - -!”
곳곳에서 횃불이 다시 지펴졌다.
자경대는 급히 무기를 챙기고 나와 목책을 넘어오는 야만인을 향해 달려든다.
아비규환, 하얀 바닥을 적시는 핏물.
나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며 놈들이 바닥에 떨어트린 뼈 칼을 주웠다.
그리고 다시는 정문을 건들지 못하도록 연결된 밧줄을 아예 잘라버렸다.
서걱!
가장 큰 출입로인 정문을 방어한 이상 소란은 늦게나마 진압될 것이다.
하지만 넋 놓고 있을 틈이 없다.
나는 눈투성이와 일행들이 있는 목조 건물을 향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 *
“Khaaa!”
“끄으으으아아악!”
온몸을 문신으로 치장한 야만인 한 놈이 도망치는 주민 하나를 낚아채 칼로 찌른다.
그런 다음 머리를 칼로 자르고 잡아당겨 산채로 가죽을 뜯어내 버렸다.
“Haha!!”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주민과 허공을 향해 더러운 광기를 내지르는 야만인.
그 모습을 창문 틈으로 지켜보던 신병 두 명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어, 어쩌지···?”
“젠장, 나도 몰라.”
급히 무기를 챙겨 밖으로 나온 자경대들은 습격을 막기 위해 마을로 모였다.
하지만 가뜩이나 엉성한 명령체계는 위기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무고한 주민들의 피해는 갈수록 가중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들이 숨어있는 이 목조 건물도 습격당할 것이다.
무기 하나 없이 저런 악독한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신병은 절망에 빠졌다.
기사님은 도대체 어디 가신 거지.
그들의 시선은 두 번째로 일어났던 눈투성이를 향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자신들보다 어린 그녀였기에 저절로 걱정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이제 쓰시면 됩니다, 아가씨. 사용법은 알고 계시죠?”
“고마워요, 할아버지. 이걸로 다람쥐 많이 잡아봤어요.”
하지만 눈투성이는 겁을 먹기는커녕 무언가 몰두하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 노파에게 부탁해 천으로 엮어 만든 슬링을 챙긴 것이다.
당황한 신병 하나가 나갈 준비를 서두르는 눈투성이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 저기······.”
“상황은 어때요?”
“네, 네?”
부러지는 검이 신병들에게 내린 최우선 임무는 눈투성이의 경호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당연히 눈투성이와 함께 도망칠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눈투성이가 가져갔다.
앞으로 나선 그녀가 그 알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으며 신병들을 압도한 것이다.
슬링을 꽉 묶은 눈투성이가 말했다.
“저기 탁자를 부숴놨어요. 방패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아······!”
참 겁도 없다.
저런 작은 슬링과 엉성한 방패 대용 탁자를 가지고 밖으로 나갈 생각인가?
신병들은 그것이 무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마치 대영웅처럼 느껴지던 부러지는 검의 딸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신병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밖으로 나가는 겁니까?”
“네, 회관으로 갈 거예요. 거기에 저희 스승님 검이 있어요.”
원래라면 이 목조 건물에서 밖으로 나간 스승을 기다리는 게 옳았다.
하지만 야만인들이 보이는 건물 족족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죽이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위험했다.
신중하되 망설이지 마라.
눈투성이는 지금이 망설이지 말아야 할 때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다.
신병들은 허둥지둥 탁자 방패를 챙겨 그녀를 따라갈 준비를 끝냈다.
“후우······.”
끼이익!
눈투성이는 심호흡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잠금장치가 풀린 문을 열어 밖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맡겨놓은 무기가 있는 마을 회관.
거기서 검을 챙겨 어디선가 적을 죽이고 있을 스승님과 합류할 것이다.
그리고 건물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앞에서 괴함이 들려왔다.
“Graaaaa!!!”
“- - - - - - -!!”
방금 막 주민을 죽이고 내장을 휘젓던 야만인 한 놈이 일행들을 향해 달려든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 살점과 피가 덕지덕지 묻은 몽둥이를 든 채 말이다.
신병 둘은 놈을 막아야 함을 알면서도 다리가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후웅, 후웅, 후웅!
콰직!
하지만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야만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슬링에서 빠져나간 돌멩이가 마치 총알처럼 날아가 이마에 박힌 것이다.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노파에게 돌멩이를 받아 슬링을 장전하는 눈투성이가 있었다.
“겁먹지 마세요!”
딱딱하게 굳었던 오금이 풀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든든함과 용기가 마음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신병들은 엉성한 방패를 든 채 눈투성이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