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검은머리 기사왕 11화
목책은 견고했다.
단순히 나무와 밧줄을 짜 엮어 만든 게 아니라, 목재를 서로 맞물리게 끼워 넣어 마치 성채처럼 만들어두었다.
그리고 지금 열리고 있는 문 또한 통짜가 아닌 마치 철장처럼 엮어 만든 형태였다.
중간마다 철제로 보강한 것으로 보아 화공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렇다면 확실하다.
이 마을은 꽤 오랜 시간 외부의 적과 대립을 이루고 있었고,
그와 반대로 최악의 상황을 버텨낼 걸출한 지도자가 마을을 다스리고 있다.
“들어와라!”
문이 완전히 열렸다.
그러자 아직 경계를 풀지 않은 자경대들이 화살을 쏘기 좋은 위치에서 제각각 우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살핀 숫자는 10명 남짓.
항시 경계하는 인원치고는 많은 편이다.
나는 그들의 상태를 자세히 살피며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 - - - - - -.”
꿀꺽.
우리 신병 중 하나가 마른침을 삼킨다.
숙련된 자경대 앞에서 겁을 먹은 것이다.
물론 그만큼 마을 분위기가 시퍼런 날처럼 날카롭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이내 저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로 인해 한순간 풀려버렸다.
“화살 깃털!”
“오오, 낮은 풀숲!”
급히 불려온 듯 평상복을 입은 노인 한 명이 화살 깃털을 부른다.
그리고 화살 깃털 또한 그 노인을 아는지 낮은 풀숲이라는 이름으로 화답했다.
서로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마치 오랜 친구처럼 얼싸안는 그 둘.
낮은 풀숲이라 불리는 노인은 얼굴에 웃음을 만연한 채 물었다.
“이 친구 살아있었구먼! 다들 활 내려! 촌장님하고도 아는 사이다!”
촌장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내 신경을 자극하던 경계심이 눈 녹듯 사라진다.
우리 편을 무조건 신뢰하는 화전민 특성이 어김없이 발휘된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의심만큼은 거두지 않겠다는 듯 자경대는 우리가 내려놓은 무기를 회수한 뒤 천천히 물러났다.
낮은 풀숲이 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가? 은퇴하고 더 이상 못 볼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게 말일세······.”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서로 화살 한 발 쏘고 시작할지도 몰랐을 대면을 여기까지 잘 진행하지 않았나.
나는 말을 아끼는 노파를 향해 마지막으로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촌장님을 좀 뵙고 싶네.”
“촌장님을? 자네가?”
“아니, 이분들이.”
순간 눈빛이 변했다.
단순한 마을 젊은이들이나 일행인 줄 알았던 우리에게 화살 깃털이 이분이라는 호칭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랜 침묵이 오해를 부르기 전 입을 열어 용건을 직접 말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외부인과는 할 말 없네.”
“야만인과 관련된 일입니다.”
이번에는 표정이 변했다.
그들이 아무리 담담해 보려 한들 야만인을 향한 본능적인 적개심은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이 변환점이다, 나는 확실하게 못을 박기 위해 그들에게 말했다.
“마을 하나가 또 사라졌습니다, 화살 깃털의 마을 또한 당했고요.”
고립된 이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현상 유지를 하는 동안 또 다른 마을에는 무슨 일을 생겼는지 말이다.
한 개, 두 개.
과연 다음은 누구일까.
낮은 풀숲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이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마을 감시탑에 걸린 낡은 깃발이 앞으로 풍랑을 예견하듯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중천에 떴던 해가 졌다.
아침에 도착해서 저녁까지 기다린 것이니 그들이 얼마나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 시간을 틈타 눈투성이와 신병들에게 기본적인 전술을 가르쳐주며 지루한 여유를 적절히 이용할 뿐이었다.
그리고 1시간이 더 지나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익, 덜컹.
“······촌장님이 뵙고자 합니다.”
자경대가 찾아왔다.
하지만 처음과는 다르게 무기를 들이밀지도 거친 말투로 우리를 위협하지도 않았다.
하루가 지나도록 이어진 열띤 토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어진 모양이다.
“둘은 기다리고 있어.”
인원이 많아 봐야 좋은 것 없다.
나는 눈투성이와 노파만을 대동한 채 자경대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사박, 사박, 사박.
웅성웅성.
저녁이 찾아온 만큼 마을도 어두웠다.
횃불도 최소한으로 피운 것이 보였고 주민들 또한 모두 귀가한 상태다.
그것은 꼭 무언가 밤새 이뤄질 수 있는 위협을 대비하는 모습 같았다.
하지만 마치 해무처럼 넘실거리는 이 짙은 절망만큼은 감출 수가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던 지난 계절, 이들은 희망이라는 모종을 심지 못한 모양이다.
사박, 사박, 사박.
그리고 약 5분가량을 더 걸었을까, 이어지는 목조 건물 사이로 마을회관이 보였다.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석재로 쌓아 올린 것을 보니 대피소나 마지막 내성과 같은 용도를 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와 일행은 문을 열어주는 자경대를 따라 천천히 내부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덜컹.
“촌장님, 모셔왔습니다.”
“······수고했네.”
특별할 건 없었다.
그저 검소한 내부 장식은 회관의 본질적인 쓰임만 되새겨줄 뿐이다.
물론 그 한가운데 앉아있는 촌장과 옆에 있는 젊은 검사 한 명을 제외하면 말이다.
촌장은 가장 먼저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향해 웃음을 띠며 말했다.
“화살 깃털, 오랜만이오.”
“예, 예······.”
촌장은 나이가 꽤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체구와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노련함은 평범한 범인이 아니었다.
잘 살펴보자.
날카로움, 칙칙함, 은은한 피 냄새.
나는 금세 눈치챘다.
이 촌장이라는 자가 한때 군에 몸을 담았었던 퇴역병 출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를 보자고 했더군.”
한동안 노파와 안부를 나누던 촌장은 표정을 싹 바꾸며 내게 물었다.
처음 보였던 온화함과는 달리 나와 자신 사이에 벽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 벽 가까이 발을 들이며 물었다.
“피차 시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니, 본론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동감이네.”
준동한 야만인, 그런 야만인들에게 당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는 마을.
사람들을 이끄는 촌장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미사여구 없이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용건만을 빠르게 꺼냈다.
“이 목책 안에서 죽을 생각입니까?”
“······성급하군, 말하고자 하는 게 뭔가?”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촌장은 야만인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책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곧 고립을 의미했고 고립은 끝없는 정체를 불러올 것이다.
그로 인한 몰락을 수없이 봐왔던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고립입니다.”
“······나가는 것보단 낫소.”
“대신 비참하게 죽겠지요.”
겨울은 괜찮을 것이다.
추위와 목책을 이용하면 충분히 야만인들을 막을 수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오면 어쩔 텐가.
먹고 살기 위해선 파종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나가야 할 텐데,
겨우내 자신들을 지켜주던 목책은 이미 새장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얼굴이 불쾌함으로 물든 촌장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내게 반문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저 목책을 세웠는지 아시오? 외부인은 절대로,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심정이지!”
“············.”
“나가지 않으면 죽는다고? 현실을 말하면 주민들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까? 아니! 나를 원망하고 저주하겠지!”
불안한 상황, 떨어져 가는 식량, 그리고 오로지 대책만을 기다리는 주민.
그간 쌓아둔 리더의 스트레스는 그대로 폭발하여 내게 화살처럼 날아왔다.
하지만 나는 언성을 높이는 대신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예, 저주하고 탓할 겁니다.”
상대는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한계와 열세, 능력과 세력의 부족.
나는 촌장이 처한 상황과 그의 고뇌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상황은 인간이 끝없이 반복했던 딜레마이자 우리가 평생을 맞서 싸워야 했던 커다란 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촌장에게 물었다.
“그게 그들의 죽음보다 무섭습니까?”
“나는······!”
무언가 턱하고 막혔다.
화가 난 촌장도, 그와 함께 우리를 노려보던 이들도 입을 다문 것이다.
마치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지독한 현실을 그대로 집어삼킨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늦지 않았습니다.”
전쟁 앞에 절묘한 묘리는 없다.
무기가 없으면 무기를 만들고, 정병이 없다면 훈련을 시키면 된다.
모든 준비는 그렇게 철저하게 갈고 닦아야 격한 풍랑도 막아내는 법이다.
촌장의 눈빛이 흔들린다.
이제는 현실적인 방안을 알려줄 때다.
“저희가 가져온 무기를 보셨군요.”
“봤소.”
“어떠셨습니까.”
“튼튼하고 날카롭더군. 아마 우리한테도 있었다며 이리되지는 않았을 거요.”
붉은 강철이 만든 창은 이들이 가진 조잡한 무기와는 차원이 다른 무기다.
그 말인즉슨 뼈 무기를 쓰는 야만인들과는 완전한 천적 수준이라는 것이다.
준수한 수준을 가진 자경대와 붉은 강철이 만든 날카로운 강철 창.
만약 이 두 개가 완전히 합을 이룬다면 야만인 토벌도 꿈은 아닐 것이다.
나는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병력과 무기, 저희랑 공유합시다.”
“······밑으로 들어오라는 거요?”
“아뇨, 같이 싸웁시다.”
내가 짧은 시간 살펴본 촌장은 강직하고 의로운 자다.
그렇기에 그가 이익과 욕망 앞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 믿고 싶었다.
오로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가족과 친구와 이웃, 그리고 핍박받는 모든 인간을 위해 손을 잡자.
나는 흔들리는 촌장의 눈을 똑바로 주시한 채 대답을 기다렸다.
“당신······, 당신 도대체 누구요. 도대체 누구길래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겁니까.”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를 향한 말투도 경어가 되었다.
촌장은 이미 마음속으로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위를 점하는 대신 앞으로 미래를 위해 우리를 소개했다.
“당신들과 같은 북방인 입니다.”
* * *
‘마을 사람들과 상의할 시간을 주시오.’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촌장에게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고 우리는 결국 이 마을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촌장이 우리에게 배정해준 방은 손님용으로 적당한 목조 건물 한 채.
쓸만한 벽난로가 있어서 그런지 겨울밤 추위도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그렇게 간단한 요기와 함께 밤이 깊었다.
“- - - - - - - -.”
한참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던 일행들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여기까지 걸어온 피로와 긴장감이 한순간 탁하고 풀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만큼은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벽난로를 들쑤시고 있었다.
내게 무언가 궁금한 것이 생긴 모양이다.
“스승님.”
“신경 쓰이는 게 있구나.”
“······네.”
잘 싸우고 잘 죽인다고 해서 모두를 다스릴 수 있는 왕이 되는 건 아니다.
기사왕은 가장 잘 싸우는 기사임과 동시에 사람들을 설득해 하나의 깃발 아래로 뭉치게 했던 능변가였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그 모든 걸 이해하기에는 아직 미숙하고 경험도 적었다.
눈투성이는 내게 물었다.
“스승님 이름을 말했으면 더 쉽지 않았을까요? 촌장님은 분명 아셨을 거예요.”
“퇴역병이었으니까?”
“네.”
퇴역병이라는 것을 어떻게 눈치챘을까, 손뼉이 치고 싶을 만큼 뛰어난 눈썰미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눈투성이가 오늘 있었던 일에 영감을 받은 것 같아 더 기뻤다.
“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하대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하하.”
내가 처음으로 하대를 받아 눈투성이가 기분이 매우 나빴던 모양이다.
또래보다 성숙해도 결국 애는 애인가, 나는 그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기뻤다.
하지만 칭찬하기에 앞서 눈투성이에게 제대로 된 이유를 알려주어야 했다.
“처음은 쉬웠을 거다.”
“처음만요?”
“그래, 내가 모든 걸 주도하고 지시만 내렸으면 충분했을 테지.”
명령과 훈련 체계는 간단할수록 좋다.
그래야 전달도 쉽고 내 마음대로 사람들을 주무르며 움직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리해선 한 가지는 얻지 못했다.
“다만 주민들의 마음은 얻을 수 없었을 거야. 그들은 너와 내가 누구건 지금은 오로지 촌장만을 신뢰하고 있으니까.”
“아······.”
“그리고 촌장은? 분명 속으로 불편함을 느끼겠지. 병사로 있었던 시간보다 이들과 함께한 세월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전쟁은 체스가 아니다.
동맹을 맺고 지원을 주고받는 모든 행동에는 복잡한 인과관계가 얽혀있다.
그리고 그것을 강제로 뜯어내려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뒤따라온다.
왕은 끝까지 인내하는 자다.
반드시 최대 다수가 만족한 상황에서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부디 그 차이를 막 성장 중인 눈투성이가 잘 배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