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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0화 (10/181)

10화

검은머리 기사왕 10화

북방의 초겨울은 짧다.

반대로 늦겨울은 길고 질기다.

우리 모두를 아우르는 북방 어머니는 이 추운 겨울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웅크리고 봄을 기다려야 할 시기에 우리는 그 어떤 때보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남고 싶다는 원초적인 본능이 이 겨울마저 이겨낼 열망을 준 것이다.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얼어붙으니까.’

가장 먼저 화전민들을 위한 집을 지었다.

물론 시간과 인력이 없어 공동으로 사용할 통나무집 한 채가 다였지만, 적어도 이 추운 날에 얼어 죽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모든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니 사고로부터 더 안전해졌다.

두 번째로 분업화를 시작했다.

기본적인 땔감과 식량 공급을 위해 각 화전민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공동체에 도움을 줄 만한 작업을 맡겼다.

덕분에 나는 채집과 사냥에서 벗어나, 눈투성이를 가르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무기를 쥐여주었다.

물론 보급할 수 있는 무기라고는 거친 떡갈나무 방패와 짧은 창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은 방진이라 불리는 기본적인 전술을 만들기 충분했고 튼튼한 북방 인간 특성상 험한 훈련에도 다치지 않았다.

체구로 인원을 선발하고,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제외하며,

그렇게 고르고 골라 뽑은 인원은 성인 남성 5명과 성인 여성 2명.

어쩌면 초라한 숫자일 수도 있지만, 같은 무기를 들고 같은 대열을 이룬 것을 보니 제법 병사티가 났다.

앞으로 이들을 훈련 시킨다면 이제 마음 놓고 주변을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치이이익!

한참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붉은 강철이 단조를 끝내고 담금질을 시작했다.

망치를 얼마나 열심히 두드렸는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붉은 강철.

대장간에 가득한 열기는 오로지 붉은 강철이라는 대장장이가 만들어낸 열망이었다.

“······됐다.”

다른 기사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날의 넓이와 길이가 왜소하다.

하지만 절묘한 무게 중심과 사용자의 작은 체구를 커버해주는 모양이 날카롭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검날인 것 같았다.

방금 막 명검의 잉태를 본 붉은 강철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눈투성이와 딱 맞는군.”

붉은 강철은 명장이다.

그것은 단순히 강철을 잘 다룬다는 의미를 넘어 그 무기가 사용자에게 맞춰 최대 효율을 발휘하게 해주는 데 있다.

검이 조금이라도 실력을 받쳐주도록.

후보가 수련하는 데 있어 조금이라도 빨리 오러를 발현할 수 있도록.

그런 의미에서 이 검은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명검이었다.

“눈투성이는 손발이 차갑지, 자루는 사슴 가죽으로 덮어주마.”

“······고맙다, 신경 써줘서.”

“끌끌, 이것도 마지막 운철이다. 다음은 신경 쓰고 싶어도 없어.”

운철은 하늘이 내린 귀한 광석이다.

그만큼 왕의 검이나 후보들의 검을 만들 때만 특별히 사용된다.

하지만 아끼고 아껴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강철이 소유한 운철은 눈투성이의 검을 끝으로 완전히 소진되었다.

나와 강철을 서로를 보며 빙긋 웃었다.

세월을 향한 섭섭한 만큼은 쓴웃음 뒤로 숨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붉은 강철이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디 갔어? 이 중요한 순간에.”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눈투성이의 검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정작 나타나야 할 주인공은 어느새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분명 수련을 끝낼 때만 해도 같이 왔었는데 그사이 어디로 또 빠져나간 것인가.

마치 토끼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눈투성이 때문에 요즘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완성된 검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땀을 닦은 붉은 강철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내일인가?”

“어.”

아무리 서두른다고 한들 이 모든 준비과정에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제 더 지체했다가는 협력이고 뭐고 다른 마을부터 전멸당할 판이다.

준비가 끝났으니 움직일 시간이다.

나는 사냥꾼이었던 마을 노파와 함께 다른 화전민 마을과 접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붉은 강철은 여전히 걱정되는지 나에게 재차 물었다.

“괜찮겠지?”

우리는 그간 후보들을 철저한 보호와 기밀 아래 양성해왔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외부 위험으로부터 후보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하지만 눈투성이 같은 경우는 불안정 기반 탓에 모든 게 역행해버렸다.

양성한 뒤 독자 세력을 키우는 것이 아닌 그 반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만 나는 믿었다.

그날 눈투성이에서 보았던 가능성과 뚜렷한 방향을 가진 이타성을 말이다.

그 아이는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특별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꽃을 피우는 건 오직 계절뿐.

나는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는 대장간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왔다.

* * *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스승이 알려준 북방 검술의 묘리는 항상 중의적이고 추상적이었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그 가르침이 가까워짐을 느꼈다.

‘가볍게 휘둘러, 무겁게 베어라.’

후웅 - -!

눈투성이는 이해했다.

선조들과 스승은 오로지 느껴본 것만을 알려주었으며 자신은 그들이 만든 길을 향한 초입에 들어섰다는 걸 말이다.

그것은 마치 처음 걷기 시작한 아이의 원초적인 갈망과도 같았다.

쉬이익 - -!

또 한 번 검을 휘두른다.

그러자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가뜩이나 차올랐던 숨이 막혀온다.

하지만 그런 격한 자극 속에서도 스승의 조언은 머리를 맴돌고 있었다.

‘정해진 건 없다, 움직이는 건 변화한다.’

단순히 움직임을 따라 하는 게 아니다.

틀에 자신을 가두지 마라.

기본을 유지하며 펼쳐지는 눈투성이의 1형은 변화무쌍하며 날카로웠다.

막 검술을 배운 후보생의 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후우우웅 - - - -!

눈이 휘날리고,

눈투성이가 눈투성이가 되었다.

“하아, 하아···.”

달아오른 숨, 상기된 얼굴.

손아귀는 다 찢어졌고 가죽 손잡이에는 땀과 피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고생 끝내 1형에 입문한 눈투성이는 기쁜 얼굴로 주저앉았다.

미약한 시작이다.

천재 그 자체인 기사 왕과 스승을 생각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다만 스승 몰래 공터로 달려온 눈투성이는 실망하거나 외로워하지 않았다.

‘보아라, 눈투성이.’

눈을 감으면 잔상이 보인다.

스승이 처음 보여준 20가지 검술 형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눈앞을 아른거렸다.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쓰이는 검술.

하지만 슬픔 같기도 하고, 기쁨 같기도 하고,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그것.

변화해온 인간을 꼭 빼닮은 스승의 검은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따라갈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왕이 될 것이다.

눈투성이는 바쁜 스승을 대신해 자연과 겨울 앞에서 다짐했다.

‘어머니 북방.’

‘내 이름은 눈투성이.’

듣기만 해도 벅찬 그 단어.

검을 조용히 검집에 넣은 눈투성이는 드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추운 겨울바람과 추위가 때 묻었던 눈투성이의 아픔을 지워냈다.

‘난 혼자가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오직 시대만이 아는 황금빛 변화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 * *

사박, 사박, 사박.

밤새 내린 눈이 적절하게 얼었다.

덕분에 급히 만든 설피가 제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흔적 또한 옅게 남는다.

시작을 축복하는 좋은 징후였다.

나는 등에 업힌 노파에게 물었다.

“이쯤입니까?”

“예, 예······.”

마을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이 노파는 젊었을 적 유능한 사냥꾼이었다.

그만큼 주변 지리도 밝았고 한동안 교류가 끊긴 타 마을 위치도 잘 알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동행한 눈투성이와 차출해온 신병 2명에게 말했다.

“계속 가자.”

“네, 네!”

근처에 나름 ‘마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 공동체는 총 세 곳이다.

하지만 한 곳은 전멸을 확인했고 또 다른 한 곳은 크기가 작아 후 순위로 밀렸다.

결국, 남은 곳은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온 이곳뿐이라는 소리다.

사박, 사박, 사박.

노파가 안내하는 오르막을 따라 그렇게 10분가량을 더 걸어갔다.

그러자 도보로 추정되는 길이 보였고 드문드문 잘려나간 나무 밑동들이 보였다.

자연 현상이 아닌 인위적인 벌목 흔적.

나는 노파를 내려준 뒤 시야를 가리고 있는 나뭇가지를 거침없이 잘라냈다.

“아······!”

신병 중 하나가 감탄한다.

가려진 시야가 드러나자 나무 사이로 숨어있던 목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로 사실이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것 같은 눈투성이와 신병들을 향해 말했다.

“무기 내려, 눈투성이는 검집 앞으로 차고. 쓸데없이 자극하지 마.”

이 정도 규모로 목책을 세우려면 적어도 150~200명이 넘을 것이다.

괜한 분쟁으로 자극했다가는 도리어 우리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나는 노파와 눈을 마주친 뒤 목책 입구 앞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끼기기긱, 퓽!

“멈춰!”

멀지 않은 곳에 화살이 꽂혔다.

동시에 목책 위에서 날카로운 고성이 들려왔고 나와 노파는 양손을 들었다.

화살을 쏜 자는 목책 위 감시탑에서 주변을 지켜보던 자경대.

생각보다 삼엄한 경계 앞에 나는 안심했다.

적어도 야만인에게 함락당했거나 굴복한 게 아니라는 증거였으니 말이다.

노파는 목을 가다듬은 뒤 외쳤다.

“쏘지 마시오! 야만인이 아닙니다!”

“상관없으니 썩 꺼져! 다른 마을 놈들은 더 이상 안 받는다!”

야만인이 아니라는 건 외형 하나만 보면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적개심을 보인다는 것은 역시 주변에 도망친 화전민들이 이 마을에 많이 유입되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근방 마을과 꽤 오래 교류한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억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내 얼굴 기억 안 나시오? 화살 깃털! 화살 깃털 말이오!”

화전민들을 폐쇄적인 집단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친족과 오래 교류한 사람에게는 돈독한 신뢰를 주고는 한다.

아무리 은퇴했다고 하나 그 세월이 통째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뭐? 화살 깃털?”

내 예상대로 활시위를 당기던 자경대가 천천히 언성을 낮췄다.

그리고 시위를 풀며 분명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을 조용히 되새겼다.

“사냥꾼 화살 깃털?”

“맞, 맞소! 마을 노인들이 알아볼 거요!”

다행이다, 역시 알아본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화전민들을 살렸던 게 여기서 덕을 볼 줄 몰랐다.

“- - - - - -.”

자경대가 뒤를 향해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몰려든 다른 자경대와 함께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마 우리를 들여야 하나 다른 이들과 상의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빠르게 상의를 끝낸 자경대가 우리에게 외쳤다.

“무기는 들일 수 없다.”

“맡길 테니, 안심하시오!”

나는 빠르게 검집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눈투성이와 신병들 또한 무장을 해제하며 저들을 안심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저들과 접촉하는 것뿐.

밧줄이 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목책 한가운데 있는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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