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검은머리 기사왕 9화
“······그렇게 좋으냐.”
“네!”
약식으로 의식을 치르고 하산하는 길이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아직 검 한번 휘두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들떠있었다.
아마 내가 연무장에서 선물해 준 북방식 이름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눈투성이.’
거창하지는 않지만, 북방에서 태어나 북방에서 살아온 인간의 이름.
앞으로 오러가 무명을 어떤 식으로 새겨줄지 모르겠지만, 눈투성이라는 이름은 소녀와 평생을 함께하게 것이다.
시작을 위한 첫 삽을 뜬 기분이다.
나는 멀어진 연무장을 한번 돌아본 뒤 부지런히 따라오는 눈투성이를 향해 말했다.
“이제 새벽마다 이 연무장에 와서 널 가르칠 거다. 얼마나 노력하냐에 따라 성취할 수 있는 것도 다르겠지.”
대부분 범인(凡人)은 북방 검술 5형 이상을 온전히 다를 줄 못한다.
하지만 기사라 불리는 자들은 그 한계를 넘어 10형 이상을 사용할 줄 알았고 그 형이 숫자가 늘어날수록 위대한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고는 했다.
그리고 당연히 후보 대부분은 15형을 넘기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당최 내가 골라 뽑은 이유도 있었고 그들 또한 죽어라 노력했기 때문이다.
사실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과연 어린 눈투성이가 이 험난한 과정을 전부 이겨낼 수 있을지,
혹 뚫지 못한 한계 앞에 스스로 포기하고 도망치지는 않을지 말이다.
하지만 그 걱정은 방금 마주친 눈투성이의 눈동자와 함께 눈 녹듯 사라졌다.
“최선을 다할게요.”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다가올 운명을 알기라도 한 듯 눈투성이는 까만 동공을 깜빡일 뿐이다.
“그래.”
그리고 나는 그제야 평온을 숨기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 걸음에는 눈투성이가 알아채지 못할 기쁨이 숨겨져 있었다.
초겨울을 부르는 바람이 오늘따라 경쾌하게 느껴지는 건 우연과 기분 탓일 거다.
* * *
“덫은 제법 만드는구나.”
“헤헤, 다람쥐를 많이 잡았거든요.”
화전민들을 책임지기로 한 이상 지속적인 식량 공급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리고 그중 가장 익숙한 방법은 역시나 사냥이었으며 하산하는 겸 눈투성이에게 덫을 놓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무엇을 가르칠 것도 없이 덫을 놓는 제법 손재주가 좋았다.
먹고 살기 위해 어릴 때부터 작은 동물을 꾸준히 덫으로 잡아 온 것이다.
“잘했다.”
그 덕분에 해가 지기 전까지 덫 100여 개 정도는 설치해둔 것 같다.
물론 저 많은 인원을 전부 생각해보면 이것도 턱도 없을 테지만······.
나는 어색한 칭찬과 함께 대장간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킁킁.
“?”
하지만 그 순간 바람결에 실려 온 냄새 조각 하나가 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한순간 지나가 신경 쓰지 않으면 절대 맡지 못할 그 불쾌한 냄새.
나는 그 냄새가 풍겨오는 서쪽을 방향을 향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눈투성이가 나를 부른다.
하지만 나는 신경이 다른 곳에 꽂혀 대답 대신 활과 화살을 뽑아 들었다.
킁킁.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이다.
탄내와 함께 동반되는 고약한 시체 냄새는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얼굴을 굳힌 나는 눈투성이를 향해 외쳤다.
“바짝 따라와!”
마음 같아서는 눈투성이 먼저 대장간으로 향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냄새가 언제 지워질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 상황을 파악하고 내 뒤를 바짝 뛰어오기 시작하는 눈투성이.
우리는 순식간에 길에서 벗어나 근처 능선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까악-! 까악!
“- - - - - - -!!”
10분가량을 뛰어가자 냄새가 진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북방에서는 보기 드문 까마귀 소리가 들려왔다.
먹을만한 시체가 없다면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지 않는 까마귀들.
이건 내가 기억하는 한 가지 상황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끼기기긱.
얼어붙은 시위를 털어 당겼다.
그리고 언제든지 화살을 쏠 수 있는 상태에서 천천히 수풀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까악!
하지만 나를 맞이한 건 적이 아닌 시체 눈알을 파먹고 있는 까마귀였다.
“아아······.”
까맣게 탄 목책에서 연기가 새어 나온다.
시체는 오물처럼 널려있고 오직 까마귀만이 핏빛 더미를 활보한다.
인세 지옥과 같은 약탈과 학살의 흔적.
또 다른 화전민 마을로 보이는 이곳은 이미 검은색 죽음이 지나간 후였다.
사박, 사박.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시위를 풀고 수풀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서로 엉겨 붙어 있는 시체 더미를 살피며 사후경직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젠장.”
큰일이다, 기껏해야 반나절 전이다.
아무리 계곡과 멀리 떨어진 마을이라 할지라도 길과 수원지가 얼마 없는 북방 범위상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나는 이제 갓 다섯 살은 되었을까 싶은 시체의 눈을 감겨주었다.
“도, 도대체 누가······?”
“야만인이다.”
5~60명이나 되는 야만인 진지가 근처에 있었을 때부터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설마 주변에 이런 대규모 준동이 일어났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동안 관심을 끈 사이 야만인 지도자나 샤먼이 생기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털고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 - - - - - -.”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시체 한가운데 선 눈투성이가 있었다.
언제 저기까지 간 것일까, 이런 광경은 처음일 텐데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가만히 눈을 감은 눈투성이는 헛구역질하는 어리숙한 행동도, 겁에 질린 채 우는 멍청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은 채 솟구치는 무언가를 조용히 인내할 뿐이었다.
“······눈투성이.”
왕이 되기 위해선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이미 휘몰아치는 감정을 스스로 삭이는 방법을 알았다.
마치 영혼의 성숙함처럼.
타고난 무언가가 내게 보였다.
눈을 뜬 눈투성이가 대답했다.
“네, 돌아가요.”
* * *
“눈치도 못 채고 있었어, 면목 없다.”
“운이 나빴을 뿐이야.”
좁은 대장간 내부에서 회의가 열렸다.
주제는 당연히 준동한 야만인 무리를 향한 대책이었고 가장 먼저 소식을 들은 붉은 강철은 어김없이 사과를 해왔다.
하지만 야만인 무리의 등장은 그저 운이 없어 벌어진 일이다.
지금은 사과보다는 대책을 하나라도 더 마련하는 게 더 시급했다.
“······그냥 도망치는 건 어떨까요.”
죽은 촌장을 대신 회의에 참석한 단검 남자가 손을 들어 말했다.
싸움이고 뭐고 일단 도망친다.
화전민들 처지를 대변하는 처지답게 굉장히 수비적인 의견이었다.
“겨울이 지나기 전에 다 얼어 죽을 거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붉은 강철선에서 알아서 잘려 나갔다.
왜냐하면, 거점이 있어도 동사자들이 속출하는 마당에 이리저리 도망치며 살아남기는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럼 싸우는 건?”
“턱도 없다.”
화전민들 가운데 그나마 무기를 들고 싸울 수가 있는 성인은 10명도 되지 않는다.
물론 그중에는 성인 여성이 포함되며 대부분이 질병을 앓고 있다.
과연 나 혼자서 이 오합지졸 소수를 지휘하고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싸운다는 최후의 선택지조차 내 머리에서 빠르게 지워졌다.
하지만 상황은 경고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분명 큰 집단으로 계속 흡수될 거다.”
“그때처럼?”
“그래, 그때처럼.”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부족 단위였던 야만인이 하나로 뭉쳐 왕국을 침공했던 사건이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위대한 기사왕이 북방을 호령할 때였고 영웅들도 현역이었기에 심각하게 고민할 사항은 아니었다.
그래, ‘과거’였던 그때는 말이다.
“- - - - - - -.”
어찌해야 할까.
마땅한 대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서히 몰려오는 절망감에 대장간 내부는 침묵으로 휩싸였다.
모두가 야만인에게 붙잡혔던 그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이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도 모이면 되지 않나요?”
누구냐, 누가 말한 것인가.
가만히 앉아있던 사람들은 청아하게 울린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눈투성이가 앉아있었다.
“······뭐?”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상대가 서로 모이고 있다면 우리도 모이면 되는 게 아닌가.
상대에게 맞춰 몸집을 키우겠다는 건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되는 말뜻과는 반대로 복잡한 상황은 이들을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헛소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동안 눈투성이가 보여주었던 진중함을 믿은 나만 빼고 말이다.
머리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강철, 주변에 마을이 더 있나?”
“어, 어? 어······. 아마 있을 거다. 작년 여름에 유입이 제법 많았으니까.”
“정확한 위치는?”
“저, 저! 저희 마을에 노파 한 분이 알고 계실 겁니다. 과거에 사냥꾼이셨어요.”
야만인 침략은 다행히 현재진행형이다.
몇 마을이나 더 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를 포함해 마을 2~3개만 더 협력할 수 있다면 수적으로 충분하다.
나는 검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 - - -.”
저들이 모이면 우리도 모인다.
이렇게 간단한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1년간 시야와 정신이 좁아진 스스로를 탓하면서도 눈투성이가 대견했다.
나는 대장간에 모인 이들을 향해 말했다.
“내일부터 사람들을 모은다.”
“뭐? 그럼······.”
“그래, 싸워봐야지.”
인간은 모일 때 강하다.
지난 과거를 황금기를 이끌었던 왕의 정신은 위험을 타개할 열쇠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마치 왕과 함께 북방을 활보하던 때가 생각나 묘한 떨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철은 얼마나 있지?”
“충분해! 다만 아껴서 사용하려면 창으로 만드는 게 효율적일 거다!”
마침 대장간에 비축해둔 철이 많다.
거기에 전설적인 대장장이까지 있으니, 무기 걱정은 없었다.
나는 이제야 힘을 찾은 붉은 강철을 뒤로한 뒤 단검 남자를 향해 가리켰다.
“너! 이름!”
“네, 네? 짧은 버들입니다!”
“그래, 짧은 버들. 이제부터 네가 사람들과 함께해줄 게 있다.”
단검 남자에서 드디어 이름을 되찾은 짧은 버들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온 나를 설렘 반 두려움 반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전민 출신치고는 상황 판단도 좋고 행동도 빠릿빠릿한 짧은 버들.
나는 대장간에 굴러다니는 도끼를 그에게 넘겨주며 중책을 맡겼다.
“떡갈나무를 베어와라.”
“······네?”
“많이, 아주 많이.”
나무, 껍질, 잎, 뿌리, 열매.
떡갈나무는 북방 어머니의 살림꾼 역할을 맡아 많은 곳에 사용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단단한 목재만큼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우린 방패를 만들 거다.”
북방에서 나고 자란 목재와 질기고 억센 가죽으로 만든 떡갈나무 방패.
그것은 한때 북방군의 모루였던 튼튼한 방진을 우리에게 선사해줄 것이다.
“불 들어간다! 다들 비켜!”
화르륵 - -!
붉은 강철이 화로를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