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검은머리 기사왕 8화
결과적으로는 모든 게 좋았다.
붉은 강철이 무사히 살아남은 것도,
기어코 눈이 돌은 내가 야만인 무리 전체를 죽여 진지를 불태운 것도.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좋은 결과와는 반대로 버거운 여파는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여, 여보······.”
“으으, 으으으아아!”
대장간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대장간에는 우리뿐만이 아닌 탈출한 화전민들도 따라왔고,
그나마 지반이 괜찮은 대장간 주변에 낡고 형편없는 텐트촌을 세웠다.
남편을 잃은 과부의 울음소리, 끔찍한 부상에 울부짖는 어린 남자.
칙칙하고 어두운 겨울 날씨만큼이나, 텐트촌은 절망 그 자체였다.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경첩이 삐거덕거리는 대장간 문을 닫았다.
“날이 많이 상했군.”
“······쓸 일이 많았어.”
대장간 간이침대에는 온몸을 붕대로 감은 붉은 수염이 앉아있었다.
며칠 안정을 취하며 쉬어야 하건만 기어코 왕의 검을 뺏은 붉은 강철.
그는 진지한 눈으로 오랜 세월을 사용한 왕의 검을 조용히 살폈다.
그리고 결론은 역시.
“일단 봉인해두자.”
명검을 구분하는 척도인 강도, 무게 중심, 유연성, 그리고 오러 전달력,
검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장점을 보유한 왕의 검은 확실히 명검이다.
하지만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고, 또 오러를 상대해야 하는 내게 있어 검이란,
그저 시간이 지나면 녹슬고 부러지는 수단과 소모품에 불과했다.
왕의 검이자 상징인 명검을 고작 내 소모품으로 사용해야 한다니.
어제와 같은 특수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간 내가 약식으로 들고 다녔던 왕의 검은 앞으로 붉은 강철이 잘 보관해줄 것이다.
새로운 기사왕이 다시 탄생하는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검집을 풀어 넘겼다.
그러자 붉은 강철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저 아이가 이번 후보인가?”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검은 머리를 지닌 소녀가 텐트촌을 바삐 돌아다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따뜻한 대장간에서 칼바람을 피할법한데 손수 화전민들을 돕고자 나간 아이.
표정은 어두웠지만, 부상자들을 돌보는 모습에는 진한 헌신이 묻어 있었다.
“그래, 아마 마지막일 거야.”
붉은 강철과 나는 항상 후보의 재능과 앞선 미래를 예상해보고는 했다.
물론 그 예상이라는 것이 제대로 맞지도, 믿음이 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앞으로 잘 되라는 불확실한 희망만큼은 마음 속에 품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짓도 이제 8년이다.
붉은 강철도 나도 이제 자연의 순리를 따라갈 때가 온 것이다.
머리에 난 흰머리만큼이나 길었던 세월.
붉은 강철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겠군······.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당장 가검이 준비되는 내일부터 소녀에게 검술을 알려줄 생각이다.
물론 지금 상황으로 보아 앞으로 많은 난관이 예상되었지만, 적어도 일찍이 주저앉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다시 한번 해보자.
왕을 만드는 것도, 모두를 모으는 것도.
손에 박힌 굳은살이 오늘따라 두텁고 거슬리는 세월처럼 느껴졌다.
* * *
“안, 안녕하세요······.”
“············.”
한때 혼기를 놓친 붉은 강철은 자신은 철과 결혼했다고 떠들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은 다 거짓이었고 오늘은 놈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도둑놈이라는 것이 증명하는 날이었다.
나이 차이만 10살이라니.
비록 눈송이라 불리는 이 여성이 과부였다지만, 참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많은 뜻을 내포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붉은 강철은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내가 책임지마.”
눈송이는 화전민 출신이다.
말 그대로 저기 밖에서 텐트촌을 이룬 자 중에 가족이 있고 거의 평생을 같이 산 이웃사촌이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그의 남편이자 가정을 책임지는 붉은 강철은 어찌 되겠는가?
그는 자연스럽게 저들의 생존을 도와야 하는 책임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문제는 그 연대 속에 붉은 강철이 필요한 내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나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
그래, 탓해봐야 무엇하겠는가.
거의 8년 동안 나를 도운 붉은 강철에게 무책임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늙은 머리를 굴려 저들과 무사히 겨울을 보내야 했다.
눈치를 살핀 붉은 강철이 내게 물었다.
“큼, 크흠! 그래서 이제 어쩔까?”
일단 임시지만 은신처도 구했고 검을 만들어 줄 대장장이도 구했다.
하지만 넋 놓고 검술만을 가르쳐주기에는 식량이 필요한 입이 너무 많았다.
대장간에 쌓인 물자라 해봐야 겨우 한 달이면 전부 소진될 수량.
겨울을 위해 거주지도 지어야 했고 근처 야만인들도 하나둘 토벌해야 했다.
할 일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열악한 환경 앞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색이 깊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를 챙겼다.
“일단 아무 검 두 자루만 줘.”
“하급품뿐인데, 괜찮나?”
“그거면 충분해, 활도 있으면 좀 주고.”
내가 자리를 비운 1년 사이 계곡 주변 정세가 변화한 게 분명하다.
이제 소녀에게 검술을 비롯한 생존 기술을 알려줄 겸 이 근방을 수색할 생각이다.
끼익-!
“몸조리 잘하고 있어.”
붉은 강철은 당분간 요양해야 한다.
나는 허튼짓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충고와 함께 대장간 문을 열고 나왔다.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하늘에선 반갑지 않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스승님!”
내가 대장간 밖을 나서자, 한참 물을 끓이고 있던 소녀가 뛰어왔다.
새벽 일찍 일어나 피곤할 법도 한데, 여전히 밝은 얼굴로 다가오는 소녀.
음식을 꾸준히 먹인 보람이 있는지 볼과 몸에는 살이 적당히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런 소녀에게 검 한 자루를 넘겼다.
“받아라.”
남을 돕는다는 건 좋은 것이다.
하지만 힘이 없는 선의는 무능일 뿐이니 왕에게는 백성을 지킬 무력이 필요했다.
이제 소녀는 그 수단을 배울 것이다.
“아······!”
소녀는 넘겨진 엉거주춤 잡는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 듯 일렁이는 눈을 재빨리 훔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낡고 오래된 처형식 검이 아닌, 진짜 대장장이가 만든 훈련용 강철 검.
노예로 태어나 평생 역천을 꿈꿔왔던 소녀는 지금이 꿈만 같아 보였다.
“이렇게 차는 거다.”
“네, 네!”
“천천히 따라와.”
처음은 모든 게 어색하다.
간단하게 검을 차는 법을 알려준 나는 가볍게 뭉친 목 근육을 풀었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여전히 시끄러운 텐트촌을 가로질렀다.
웅성웅성.
“- - - - - - -.”
무사히 탈출한 화전민들은 총 21명.
진지 내부가 비명이 난리였던 것치고는 꽤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살아남았다는 기쁨보단 미래를 향한 걱정이 가득했다.
과연 겨울이 끝날 때까지 화전민들은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구해야 하는 물자를 어림잡아 보며 텐트촌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러자 저 멀리 엉거주춤 울상인 소녀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 * *
“초겨울은 흔적을 남기기 좋지. 하늘에서 눈이 내리지 않으면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항상 추적을 경계해.”
“네.”
“오크는 발자국이 이보다 더 깊고 엘프는 산짐승보다 자국이 작다. 그 차이를 알아야 습성을 이해할 수 있지.”
“네.”
오크는 전사와 함께 힘을 기른다.
엘프는 세계수 아래 지식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 북방 인간은 자연 그 자체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걷는 법, 눈을 피하는 법, 적에게 들키지 않고 따라가는 법, 주변을 정찰하는 법.
진정한 기사가 되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북방과 겨울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적을 기다리며 매복할 땐 눈덩이를 물고 있는 게 좋아. 왜냐하면······.”
“입김 때문에요?”
“······그래.”
소녀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영특했다.
원리를 알 수 없다 해도 경청했고 자신이 모르는 건 기꺼이 질문했다.
그리고 어떨 때는 스스로 정답을 생각해내 나를 놀라게 할 때도 있었다.
“잘했다.”
“히히.”
내뱉은 칭찬이 어색하다.
하지만 소녀는 칭찬받았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지 수줍은 웃음을 머금는다.
때 묻은 세상에서 때 묻지 않은 영혼을 본다는 건 가슴을 간지럽히는 무언가가 있다.
“앗!”
묻고 답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그렇게 걸음을 옮긴 지 2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이쯤일 텐데, 라는 의문이 들 무렵 얼굴을 때리던 눈보라가 솟구쳤다.
휘이이이이잉 - - -!
드디어 도착했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경이자, 온갖 군상과 발걸음이 밟으며 만든 평지.
소녀는 세월과 겨울이 만든 북방 연무장 앞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나 커요.”
“다 지나쳐 갈 장소다.”
나는 소녀의 등을 밀었다.
그러자 주춤주춤 움직인 소녀가 연무장 한가운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동안 나를 거친 후보들이 만들어진 장소이자 앞으로 소녀가 다시 태어날 곳.
나는 허공에 뽑은 검과 함께 입을 열었다.
스르릉- - -!
“너는 내게 세상을 바꾸고 싶다 약조했지.”
소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기사왕이 누구이고 내가 왜 8년간 이 넓은 북방을 방황했는지.
하지만 그런데도 소녀는 이 비참한 현실과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어찌해야 할까.
단순히 검만 휘둘러 적을 베어야 할까?
아니, 절대 아니다.
나는 그간 수많은 후보에게 말했던 한가지 대의를 소녀에게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왕이 되어야 한다.”
혼자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위대한 기사왕이 그랬듯 이 어머니 북방에서 다시 태어나 너 또한 왕이 되어야 한다.
어떤 모멸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험난한 재탄생의 길.
너는 그것을 이겨낼 용기가 있느냐.
“도망치고 싶다면 지금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준 검을 뽑아라.”
이 연무장에는 도망치는 길이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후보에게 도망쳐도 된다는 비겁을 유혹한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허리춤에 검은 후보에게 끊임없이 묻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내가 봐왔던 그 어떤 후보보다 빨리 검을 뽑았다.
스르릉 - - -!
벅찬 얼굴, 떨리는 입술.
휘날리는 검은 머리는 눈보라를 타 놀았고 검을 뽑은 손에는 망설임이 없다.
그렇게 태어나 처음으로 제 검을 뽑은 소녀는 눈동자를 흑요석처럼 반짝였다.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이 너무 커요, 저는 너무 작고요. 이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큰 꿈을 꾸는 건 죄가 아니다.”
작은 바람도 거센 태풍이 될 수 있고 떡잎도 숲을 아우르는 나무가 될 수 있다.
초라한 시작이지만, 창대한 끝.
나는 이 작디작은 소녀가 훌륭히 성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 - - -.”
태동하는 떨림, 따뜻한 겨울바람이 분다.
나는 깊은 호흡과 함께 검을 잡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절경 연무장 앞에서 허공을 베었다.
눈송이가 잘렸다.
“북방 검술은 20가지 형이다.”
“무거우면서도 가볍고.”
“형식이 있으면서도 없다.”
상단, 하단, 중단.
찌르고 베고 흘려낸다.
이 모든 형체는 절묘함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절묘함은 오크의 강철을 베고, 엘프의 거목을 베는 날카로운 겨울이다.
나는 먼 옛날 기사왕이 내게 일렀던 북방 검술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정해진 건 없다, 끝없이 성취해라.’
“아······.”
20가지 형이 끝나고 검을 멈춘다.
그러자 양손이 부러질 듯 검을 잡은 소녀가 상기된 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겁을 먹은 걸까, 아니면 떨리는 걸까.
머리에 쌓인 눈이라도 털어내지 이래서야 눈투성이가 되어버렸다.
“······눈투성이.”
“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항상 소녀라고 불러왔던 제자에게 선물할 이름이 드디어 생각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