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검은머리 기사왕 7화
움막은 조용했다.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다.
한참 주변을 살펴본 나는 움막 근처에 꽂혀있던 횃불을 뽑았다.
그리고 허술한 움막 문을 열어 재낀 뒤 내부를 향해 불을 비췄다.
“- - - - - - -.”
바닥에 마른 피가 흥건하다.
움막 곳곳에는 조잡한 날붙이와 함께 고문의 흔적이 여실히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참혹한 현장 한가운데에는 익숙한 얼굴이 묶여 있었다.
“붉은 강철.”
마지막 후보가 죽고 1년 만이다.
하지만 그 1년이라는 세월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낙수와 같았다.
더 늘어난 흰 머리, 초췌한 얼굴.
우락부락하던 근육은 많이 줄어 있었고 뜨겁던 그 기세 또한 초라했다.
강철도 나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부, 부러지는 검······? 네놈이냐?”
눈가리개를 벗겨주었다.
그러자 나를 알아본 붉은 강철이 허탈하다는 듯 힘겨운 웃음을 짓는다.
다행히 사지는 달려있었지만, 자잘한 고문으로 인해 일어날 수 없는 몸 상태.
나는 어쩔 수 없이 덩치가 배는 큰 붉은 강철을 부축해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잠, 잠깐.”
“왜.”
“잡혀있는 사람도 구해다오.”
붉은 강철은 투덜거리긴 해도 같은 북방 인간이라면 잘 도와주는 사내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을 위해 본인 안위를 후 순위로 두는 사내가 아니었다.
1년 사이 은신처가 들통난 붉은 강철과 기지 내부에 잡혀있던 화전민들.
무언가 연관된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너 설마?”
“······아내가 잡혀있어.”
나는 경악했다.
그 개망나니 붉은 강철이 아내라니!
아니, 나보다 10살은 더 많은 놈이 인제 와서 무슨 혼인인가!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 붉은 강철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피하며 이 상황에서 회피하려고 했다.
“부탁한다.”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끌고 가고 싶지만, 목소리가 굉장히 진중하지 않은가.
보아하니 아내를 구해주지 않으면 여기서 꼼짝도 하지 기세였다.
“······알았어.”
대충 감옥 철장을 열어주고 붉은 강철과 함께 몰래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저 갇혀있는 화전민 중 그의 아내가 있는 이상 다 같이 탈출한다는 하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과 함께 대답하자,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며 일어나는 붉은 강철.
나는 챙겨온 단검과 왕의 검을 점검한 뒤 움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 - - - - -.”
진지는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감옥 안에 갇힌 사람들이 전부 나온다면 어찌 변할지 모른다.
나는 그들이 제발 말을 잘 들어주길 바라며 철장 앞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아!”
“쉿, 안에 몇 명이지?”
내가 다가오자, 불안하게 철장 밖을 살피던 남자가 얼굴에 화색이 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깊어 보이는 감옥 안쪽에서 몇 명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려 했다.
“서, 서른 명 정도 있습니다.”
서른 명, 숫자가 꽤 된다.
순간 낭패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내 지워버린다.
나는 이쪽을 향해 비틀비틀 뛰어오는 붉은 강철을 확인한 다음 남자에게 말했다.
“꺼내줄 테니까 사람들부터 깨워. 그리고 절대 소리 내지 말라고 당부하고.”
내 지시를 들은 남자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옥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안쪽에서 미리 준비된 것 같은 부산스러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 내 아내는?”
“조용히 하고 비켜.”
스르릉-!
다가온 붉은 강철이 내게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를 밀치며 차고 있던 왕의 검을 뽑아 들었다.
타오르는 횃불을 받아 반짝이는 검날.
철창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자, 두꺼웠던 철창이 가볍게 절단되었다.
“······부러지는 검, 실력이 더 늘었잖아.”
“움직이기나 해!”
되지도 않는 칭찬 할 시간에 빨리 움직여 빠져나갈 생각이나 해라.
나는 감탄하는 붉은 강철을 감옥 안으로 밀어 넣고 퇴로를 살폈다.
이런 어두운 밤에 서른 명이나 되는 사람을 숲속으로 빼돌려야 한다.
안위는 그렇다 쳐도 화전민 중 낙오자가 생길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나는 부서진 감옥 입구를 완전히 뜯어낸 다음 손을 내밀어 사람들을 꺼냈다.
“감, 감사합니다······.”
“흐, 흑······!”
감옥에서 사람들이 비틀비틀 빠져나오기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조용히 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는지 침착하게 소음을 줄이며 대열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험한 세상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남은 화전민들이다.
절망과 눈물에 떨며 당황해하지만, 적어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내와 함께 감옥을 빠져나오는 붉은 강철에게 단검을 건넸다.
“먼저 데리고 나가.”
“······알았다, 조심해.”
붉은 강철과 전장에서 같이 호흡을 맞춘 시간만 해도 수십 년이다.
이제는 서로가 말만 해도 그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후위는 맡기고 먼저 나가라.
지켜야 하는 대열만 없다면 야만인 전체를 상대로 버틸 자신이 있었다.
나는 빠르게 횃불 화력을 키웠다.
화르륵!
포로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식한 야만인 놈들은 반드시 추격해올 것이다.
적어도 진지 내부에 불을 질러, 그 의지를 반쯤 꺾어놔야 했다.
사박, 사박, 사박!
마지막 힘을 쥐어짠 붉은 강철이 비틀거리는 아내를 둘러업는다.
그리고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퇴로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치껏 화전민 대열을 이끄는 남자 뒤로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숲.
문득 혼자 있을 소녀가 걱정되었지만, 살얼음을 걷는 것 같은 긴장감에 주변 시야를 밝히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풀 밟는 소리, 불이 타오르는 소리. 누군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
한걸음, 한걸음 대열이 지나가고 상황이라는 풍선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온다, 누군가 다급히 숨을 삼켰다.
나는 재빨리 소음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단검을 쥐고 몸을 돌렸다.
“Puo!! Puo da - -!”
출구와 멀지 않은 움막에서 야만인이 소리를 내지르며 빠져나온다.
우연히 소변을 처리하기 위해 나온 야만인 놈 하나가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Oooo!!”
놈은 화를 냈다.
그리고 주변에 널브러진 둔기를 쥐고 화전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눈이 돌아버려 주변에 누가 있고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도, 도망쳐!”
“꺄아아악- - - !”
하지만 사람들은 겨우 둔기를 든 한 명한테 겁에 질려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내가 무언가 조치를 하기도 전에 겨우 유지되던 대열이 무너진 것이다.
작은 기대감이 조용히 무너져내렸다.
“후.”
나를 혀를 작게 찼다.
그리고 들고 있는 단검을 던져 달려드는 야만인을 가볍게 처리했다.
하지만 야만인 진지는 이미 울려 퍼진 고함으로 인해 난리가 난 상태였다.
“Puo!! Puo da - -!”
“Uooo!”
움막에서 놈들이 쏟아져나온다.
동시에 도망치지 못한 화전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가망이 없다.
나는 야만인 한 놈과 분투를 벌이는 붉은 강철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스걱!
검을 가볍게 휘두른다.
동시에 무기를 든 야만인은 목이 잘려 죽었고 붉은 강철은 반색하며 나를 바라봤다.
이 둘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다.
강철 또한 그리 생각했는지,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따라왔다.
살, 살려주세요!
아아악 - - -!
아무리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나라고 해도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건 썩 즐거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갑주가 없는 상태에서 벌이는 난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걱 - - -!
푹! 빠각!
달려드는 야만인을 베고 또 베고.
나는 붉은 강철이 도망칠 수 있도록 활로를 만들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피를 머금은 검이 서서히 잘 베이지 않을 때쯤, 붉은 강철과 아내는 난전이 벌어지는 영역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숨이 조금 달아올랐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리자, 거의 한계치인 붉은 강철이 아내를 부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과는 반대로 대부분 화전민이 진지를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엄마! 엄마아아 - -!”
“아아아악!”
나는 조용히 인상을 찡그렸다.
붉은 강철 또한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기절한 아내를 내려놓는다.
서로가 눈을 마주하는 무언의 소통.
붉은 강철은 이내 주변에 떨어진 둔기 하나를 주워들며 내게 말했다.
“······퇴로를 지키고 있으마.”
“적당히 버티다 도망쳐. 멀지 않은 곳에 사슴이랑 아이 한 명이 있을 거다.”
썩어도 준치라고 한때는 인간을 다스리는 기사왕의 종자였다.
여기서 저 화전민들을 버리고 도망쳤다가는 죽은 왕이 내 머리통을 후려칠 것이다.
남은 야만인은 몇 명일까.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다음 피를 털어냈던 검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두 눈을 뜨자, 주변 시야는 어느덧 긴 터널처럼 늘어졌다.
“- - - - - -!!”
포로 놈이 알려준 숫자보다 훨씬 많은 야만인이 들고일어났다.
덕분에 대열에서 도망친 화전민들 대부분은 죽거나 다시 잡혔다.
하지만 한참 난전으로 진행되던 분위기는 갑작스레 등장으로 인해 뒤바뀌었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서걱 - - -!
“컥, 컥!”
“Quo?! Puo Da?!”
검술은 정해진 규격이 있다.
날을 어떤 식으로 휘둘러야 하는지, 발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또 크로스가드와 갑주는 어찌 활용해야 하는지조차 모두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학살은 아니다.
끽해야 둔기를 휘두르고 고함이나 지를 줄 아는 야만인에게는 전투와 교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아까웠다.
급소인 목젖은 벤다, 심장을 찌른다.
그저 한 합과 또 다른 한 합으로 가죽 안에 붙은 생명을 기생충처럼 빼낸다.
그것은 무미건조한 도축이나 마찬가지였다.
“허억, 헉!”
“여길세! 여기로 오게!”
야만인들이 슬금슬금 물러난다.
내가 뛰어든 범위를 기준으로 공간이 생겨났고 도망치던 화전민들이 그 공간을 향해 허겁지겁 뛰어왔다.
그사이에 벌써 반절 넘게 죽은 것인가.
나는 입안에 감도는 쓴 내를 삼키며 흐르는 검을 허공에 뿌렸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 하나가 어떤 화전민을 부축한 채 비틀비틀 걸어왔다.
“기사님!”
철창에서 봤던 남자다.
내가 건네준 단검에 피가 묻은 것으로 보아 열심히 반항하며 살아남은 모양이다.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야만인 놈들을 노려보며 남자에게 말했다.
“데리고 빠져나가!”
지킬 대상만 사라진다면 놈들을 상대로 마음껏 칼춤을 출 수 있다.
나는 그나마 이성을 차리고 있는 남성에게 지시를 내린 뒤 20명 남짓 남은 이들을 데리고 빠져나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남자는 대답 대신 내가 걸어온 방향을 황급히 가리켰다.
“저, 저기!!”
내가 걸어온 방향, 붉은 강철이 있는 곳.
얼굴이 사색이 된 나는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 - - - - - - -!!”
붉은 강철이 쓰러져 있다.
그리고 그 위로 다른 야만인보다 배는 큰 놈이 거대한 둔기를 추켜올린다.
불리하면 도망치라고 했더니, 기어이 버티고 서서 명을 재촉하는구나.
뛰어가기엔 늦었고 단검을 던진다고 한들 둔기가 내려오는 속도가 빨랐다.
나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푸르륵 - -!
다각, 다각, 다각!
콰직!
하지만 그 순간 어두웠던 공간으로 흰색 뿔을 가진 사슴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붉은 강철을 죽이려는 야만인을 그대로 힘차게 받아버린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경악하는 붉은 강철.
야만인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고 사슴 위에 잔뜩 움츠려 있던 소녀가 허리를 폈다.
그러자 낡은 천 속에 숨겨져 있던 검은색 머리가 흑요석처럼 영롱하게 펄럭인다.
“스승님!”
대장장이와 후보생.
서로가 깜짝 놀랄 극적인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