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검은머리 기사왕 5화
서전트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분노한 오크 전사들은 숙영지 전체가 일어나 범인인 우리를 추격하려 했다.
하지만 북방을 제집처럼 드나들 줄 알았던 나는 그 추격을 가볍게 뿌리쳤고 이내 오크 놈들이 올 수 없는 고산을 올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와 가만히만 있어도 얼어붙는 팔다리.
흰 뿔 사슴을 구명줄 삼아 산길을 오른 우리는 은신처로 삼기 딱 좋은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물론 먼저 자리를 잡은 선객은 내가 휘두른 검에 아침밥이 되어주었다.
타닥, 탁!
모닥불에서 튀어 오른 불똥이 빛을 잃는다.
그리고 빛을 잃은 불똥을 따라 타올랐던 전의 또한 빠르게 제자리를 되찾았다.
남은 것은 머리를 차갑게 식히는 냉철.
모든 열기가 사라지고 오직 덤벼올 풍파와 막연함만이 자리에 남았다.
“- - - - - - - -.”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지는 오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늑대 고기를 정신없이 뜯어 먹고 있는 검은 머리 소녀가 보였다.
늙어빠진 늑대라 냄새나고 질길 텐데,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입과 손에서는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나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이름이 뭐지?”
“뷔락크?”
“아니, 진짜 이름 말이다.”
북방 인간에게 있어 이름이란 태어난 요람과 앞으로 살아갈 모든 행적을 함축하는 존재 의미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전통도 선조들만이 지킬 수 있는 옛이야기가 된 지 오래였다.
왜냐하면, 오크 놈들은 북방을 결속하게 만드는 전통을 완전히 끊어내고자 인간들이 가지는 이름부터 없앴으니까.
화살대를 만드는 인간, 뷔락크.
그것은 이름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건 없어요.”
고기에서 잠시 입을 뗀 소녀는 기름기가 묻은 입술을 잠시 우물거렸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얼굴로 대답한 뒤 다시 음식 섭취에 집중했다.
멍과 상처가 부어올라 아플 텐데, 참 부지런히도 먹는 이름 없는 소녀.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이내 눈을 감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소녀의 재능은 알 수 없다.
시작점이 높았던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아직 어렸고 보여준 모습도 없었다.
심지어 또래와 비교해 체구도 작고 어딘가 타고난 골격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기사왕을 빼다 닮은 것 같은 저 검은 머리와 눈동자는 모든 부정적인 조건을 잊게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왕에게 친딸이 있었다면 이런 모습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내가 모르는 왕의 여자관계와 사생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소녀를 향해 끌리고 있었다.
생판 모르는 모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무모한 용기, 죽기 직전까지 검을 놓지 않았던 투지와 높은 긍지.
마치 어린 기사왕 같던 모습을 회상한 나는 조용히 눈을 뜨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다리 하나를 먹어 치운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 - - -.”
소녀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눈덩이가 퉁퉁 부어 얼굴이 말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타오르는 그 눈동자만큼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최선을 다할게요.”
대의를 위함이다.
오로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이 여정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과업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듯 그저 최선만을 입에 담았다.
“······무엇임을 알고?”
웃기지 않는가.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는 소녀가 이름조차 듣지 못한 내게 검을 배우겠다니.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과 위기를 알게 된다면 자신이 뱉은 말을 후회할 것이다.
그래, 대부분 후보가 그랬듯이 말이다.
“모르겠어요.”
소녀는 조용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뭉쳐있던 설움을 단호한 목소리 안에 담아냈다.
“하지만 바꾸고 싶어요.”
바꾸고 싶다.
약해빠진 자기 자신도, 아무도 불의 앞에 나서지 않는 이 초라한 현실도 전부.
그 모든 시작이 불가능을 베었던 검 한 자루가 되어줄 거라는 걸 소녀는 알았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이 유일한 길임을 아는 것일까.
나는 눈을 감았다.
전신에 느껴지는 바람과 추위가 이 모든 찌꺼기를 털어냄을 느꼈기 때문이다.
왕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는 모닥불이 일렁이는 동굴 안에서 짧디짧은 고민을 끝냈다.
그리고 엎드려 있는 소녀를 향해 지난 8년 중 느낄 수 없었던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
지난 과거 내게는 검이 필요했다.
오직 그것만이 돌아갈 수 없는 세상과 나 사이를 가르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바뀌고 싶다, 바꾸고 싶다.
늙은 몸으로 마주한 작은 씨앗은 지난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내가 가르쳐주마.”
나는 검은 머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검은 머리 소녀는 그제야 정신을 잃었다.
* * *
“······오러 사용자가 아니다.”
오크 서전트의 목이 잘렸다.
하지만 목이 잘려 나간 그 절단면은 오러로 인해 생긴 참격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무슨 소리겠는가.
오러 사용자인 오크 서전트가 단순 철로 만든 검에 목이 잘렸다는 것이다.
“- - - - - - -.”
오크 전사들이 침묵한다.
사(死)인을 확인한 후임 서전트 또한 믿기 힘든 현실에 입을 다물었다.
불쾌한 콧김을 내뱉지만,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 차가운 분위기.
겨우 인간 한 마리에게 이리 당했다는 사실에 치욕이 들면서도 말이 되지 않는 이 절단면은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도대체 누구인가.
이런 변방 마을에 나타나 오러 사용자인 서전트를 검만으로 죽인 인간이.
후임 서전트와 함께 파견된 십부장이 달아오른 콧김을 훅 내뱉으며 말했다.
“본토에 알려야 합니다.”
서전트를 죽인 죄는 크다.
원래라면 오크 숙영지 전체가 동원되어 북방으로 도망친 범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후임 서전트는 썩 달갑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곧 겨울이다.”
오크는 북방 인간을 지배한 지 오래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도 이 북방의 겨울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매 겨울이 돌아오는 날 숙영지 전체를 산 아래로 옮기겠는가.
그 어떤 장군보다 무서운 동(冬)장군.
그 강인한 오크 전사들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 속에서 도망친 범인을 찾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크륵! 그럼 그냥 도망치게 둡니까?”
십부장이 불만을 터트린다, 치욕스럽게 범인을 놓쳐야 했던 오크 전사들 또한 얼굴에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서전트는 그런 불만을 날카로운 말 한마디로 잠식시켜버렸다.
“그럼 네놈이 갈 거냐?”
“·········.”
“어차피 이번 겨울만 지나면 우리 숙영지도 다른 곳으로 발령이다. 언제까지 이런 변두리에서 쥐새끼들 꼬리만 핥을 거냐.”
보고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다.
지긋지긋한 추위와 전투 한번 일어나지 않는 변방에 지친 전사들은 그 달콤한 말에 불만을 천천히 잠재웠다.
이번 겨울만, 그래 이번 겨울만.
봄이 오면 다른 숙영지가 범인을 찾을 것이고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묻힐 것이다.
물론 오늘을 외면한 오크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 * *
“스승님, 배가 너무 불러요.”
육포를 오물오물 씹어먹던 소녀가 헛구역질하며 인상을 찡그린다.
하지만 나는 무심한 대답과 함께 주머니에서 육포 하나를 더 던져주었다.
“하나만 더.”
“으으으······.”
영양실조는 북방에 사는 인간들에게 있어 너무나 친숙한 질병이다.
물론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소녀 또한 살 한 점 없이 깡말라 있었다.
저런 상태에서 검을 가르쳤다가는 하루도 되지 않아 퍼져버린다.
적어도 균등한 영양을 섭취시켜 체력이라는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어 줘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녀의 기본 베이스가 튼튼한 북방 인간이라는 것.
좀 과하더라도 잘 먹이고 체력 운동을 시킨다면 금세 검을 잡을 몸이 나올 것이다.
나는 인상을 쓰는 소녀를 향해 피식 웃어준 뒤 사슴 고삐를 끌었다.
“저······, 스승님. 근데 저희 혹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추격을 뿌리치고 동굴을 빠져나온 지 벌써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 이틀 동안 먹고 운동하기만 했던 소녀는 인내심의 한계가 왔는지, 내게 조심스럽게 목적지를 물었다.
그래, 걱정될만하다.
이 드넓은 북방에서 의지할 것이라곤 스승이라 부르는 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소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 넓은 북방에는 오크에게 굴복한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대장장이를 찾아갈 거다.”
“······대장장이요?”
“그래, 검을 만들어 줄 대장장이.”
한때 왕국이 사라진 북방에는 독립한 소국 대신 뜻이 맞는 인간끼리 모여 만든 클랜이 성행했을 때가 있었다.
물론 수년이 지난 지금은 대부분 토벌당하거나 단순한 이익 단체가 되어버렸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끝까지 음지에 은거하며 내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강철을 제 수족처럼 다루는 오크와 모든 귀한 광물을 소유했다고 알려진 엘프마저 경계했던 전설적인 대장장이 ‘붉은 강철.’
10명의 후보가 그랬듯, 소녀 또한 그에게 검과 무명을 받게 될 것이다.
푸르륵!
“와······!”
도착했다.
고삐를 잡은 나는 걸음을 멈췄고 소녀는 눈 앞에 펼쳐진 절경에 감탄한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철새들과 세월이 만든 계곡을 타고 노는 눈바람들.
온통 새하얀 세상에서 아래로 꺾어지는 계곡은 세월을 표현하는 주름이었다.
“가자.”
문명과 완전히 벗어난 곳이다.
하지만 이런 곳만큼 안전한 장소는 없었다.
오크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오지이자, 붉은 강철의 기반이 있는 계곡.
이곳에서 검을 받고 본격적으로 왕의 후보가 될 소녀를 훈련 시킬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여정의 시작은 생각대로 되는 편이 아니었다.
사박, 사박.
“?”
“스승님?”
나와 붉은 강철만이 아는 길을 따라 계곡 아래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삐를 옮기려는 그 순간, 저 깊은 계곡 사이로 무언가 알 수 없는 형체들이 일렬로 걷고 있는 게 보였다.
동물? 아니다.
분명 가죽옷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손에는 하나씩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유력한 확률로 그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꽉 잡아라!”
“네? 네!”
간혹 인간이라 하면 다 같은 생각과 선의를 가질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오크만큼이나 많은 인간을 베어본 나로서는 웃기는 소리였다.
온갖 도둑부터 시작해, 산적, 암살범, 현상금 사냥꾼, 이교도 배신자, 야만인.
북방에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이 너무나 많았고 오직 왕의 깃발만이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척도였다.
그리고 계곡 사이를 가로지르는 저들은 높은 확률로 불순 종자일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계곡 사이 저 가파른 길은 오직 붉은 강철과 나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다각, 다각, 다각!
나는 달리는 흰 뿔 사슴을 재촉했다.
그리고 동시에 가방에서 왕의 검을 뽑아 들며 저 멀리 보이는 계곡을 노려봤다.
소녀를 왕의 후보로 올리는 것.
쉽지 않을 거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숨이 벌써 터져 나올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