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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4화 (4/181)

4화

검은머리 기사왕 4화

기사왕이 정립한 무기술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정수는 바로 검술이다.

왕이자 기사인 그가 수년간 연구해 수많은 기사를 배출하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총 20가지 형으로 이루어진 북방 검술.

복잡하고 심오한 움직임 앞에 대부분 기사가 10형을 넘기지 못했지만, 그 위력만큼은 오크와 엘프가 겁을 낼 정도였다.

훅, 깡!

멍청하게 서 있는 소녀를 발로 찬다.

그러자 그 자리에 육중한 대검이 떨어졌고 바닥에 쌓인 싸라기눈이 들뜬다.

장기전으로 가면 내가 불리하다.

한 자세당 한 명씩, 착실한 교환으로 놈들을 데려가야 승산이 있었다.

대검을 밟고 허공으로 솟구친 나는 놈의 머리통을 통째로 날렸다.

촤악!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북방 검술의 정수는 칼바람처럼 날카롭고 태산처럼 육중한 것에 있다.

찌르고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며 한 놈, 떨어지는 공격을 쳐내며 또 한 놈.

검날을 절대 온전히 받지 않고 숨통을 끊는 결정타에는 반드시 체중을 싣는다.

무려 검을 휘두른 지 8년이나 지났지만, 왕이 남긴 가르침은 온전히 남아있었다.

순식간에 7마리 오크 전사를 벤 나는 거친 숨과 함께 피를 털어냈다.

그러자 공격을 위해 다가온 나머지 오크들이 주춤주춤 물러난다.

“연락책을 보내라! 빨리 서전트를 불러!”

오크 놈들 수준이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전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대처하는 판단만큼은 여전히 훌륭했다.

공터에 모인 오크 전사 반절이 날아가자, 지원을 부르는 오크 전사.

나를 죽일 듯 맹렬한 기세를 뿜어내던 다른 오크 전사들도 지연전으로 태세를 전환한 뒤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면 내가 불리하다.

나는 쓰러진 소녀를 향해 말했다.

“일어나, 도망친다.”

“하, 하지만 사람들이······.”

“뒤를 봐.”

소녀가 주저한다.

자신이 지킨 모녀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걱정해서였다.

하지만 주저하는 그 표정은 이내 짙은 배신감과 허무함으로 변하고 말았다.

내 목소리를 따라 뒤돌아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목숨을 걸고 구했던 그 모녀마저도 도망치고 말이다.

“아······.”

소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앞으로 나서 본보기가 된다면 사람들이 따라와 줄 것이라고.

긍지 높은 정의만이 이 세상을 정립하는 강한 수단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마주한 현실은 겁쟁이뿐인 대중과 홀로 선 무능뿐이었다.

짝!

나는 견제를 위해 접근하는 오크 전사를 또 한 마리 베어버렸다.

그리고 주춤거리는 소녀를 노려보며 눈물이 흐르는 뺨을 짝 소리 나게 후려쳤다.

그래, 꼭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천히 모든 것을 이해시켜주기에는 현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 - - - - - - -!!”

“정신 차려, 아니면 여기서 죽던가!”

소녀가 현실을 짧게 보았다면 내게 검술을 가르쳐달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검을 뽑은 이유가 제발 퇴색되지 않기를 바라며 차가운 눈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떨리는 눈동자, 뺨을 맞아 흐르는 피.

나와 눈을 마주친 소녀는 비틀거리기를 잠시 이내 힘을 주고 중심을 찾았다.

그리고 느리기는 하지만, 분명 내 뒤를 따라 뛰어오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도망쳐! 도, 도망쳐!”

우리는 겁에 질린 대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고 오크 놈들은 깜짝 놀라 당황했다.

어둠이 깔린 밤, 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

마을에서 벗어나 산속으로 도망친다면 우리를 찾을 수 있는 오크는 없다.

나는 낡은 검에 묻은 초록색 피와 살점을 털어내며 소녀에게 외쳤다.

“거목 뒤에 사슴을 묶어놨다! 그걸 가지고 여기로 다시 와!”

왕의 검은 절대 두고 갈 수 없다.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소녀의 등을 강하게 밀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오크 놈들이 커다란 창을 던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소녀를 향해 날아오는 투창.

하지만 나는 그 투창을 가볍게 튕겨낸 다음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피잉-!

콰직!

튕겨낸 투창을 발로 튕겨 잡는다.

그리고 당황하는 오크 한 놈을 향해 집어 던져 죽이고 뛰어간 소녀를 따라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때마침 산 위에서 내려오는 거친 눈보라와 겨울을 알리는 바람.

북방은 탈출을 응원하기라도 하듯 추격자들의 시야를 가려주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리막길을 달린 나는 낡은 판잣집과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억, 헉! 여, 여기요!”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힘겹게 뛰어온 소녀가 검과 짐을 내게 넘겼다.

멀지 않은 곳에 묶어둔 흰 뿔 사슴과 가방을 찾아 빠르게 달려온 것이다.

두려움과 의지가 공존하는 눈빛과 떨리지만 다부지게 다물고 있는 입술.

그 짧은 사이에 동요를 통제한 소녀는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찰나였다.

왜냐하면, 흐린 눈보라를 뚫고 나온 살기가 우리를 급습했기 때문이다.

툭!

“?”

후웅-!

소녀의 어깨를 잡아 옆으로 밀쳤다.

그러자 거센 파공음과 함께 바로 앞으로 거대한 도끼날이 날아왔다.

내가 밀지 않았다면 머리와 몸통이 그대로 양단되어 버렸을 엄청난 위력.

하지만 침착하게 공격을 피해낸 나는 반격을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연이어 날아오는 무거운 도끼날을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튕겨내려 했다.

하지만 날아오는 도끼날에는 붉은색 오러가 이글거리고 있었고 내가 휘두른 롱소드는 가볍게 반 토막이 나버렸다.

앞을 막는 건 모조리 끊어 낼 것 같은 오러와 그 도끼날에 새겨져 있는 무딘 글자.

우리를 향해 도끼를 휘두른 습격자는 무명(武名)을 받은 오러 사용자였다.

쨍그랑!

그리고 바닥에 넘어진 소녀가 얼굴을 물들인 절망과 함께 놈의 정체를 중얼거렸다.

“서, 서전트······.”

다른 오크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붉은색 피부와 마치 멧돼지처럼 솟은 어금니.

오크 전사들 사이에서 타고난 전사들만이 부여받는다는 특별한 직책.

우리를 습격한 놈은 붉은 피부를 가진 바로 전사들을 이끄는 오크 서전트였다.

도끼를 천천히 회수한 놈이 뜨거운 콧김을 내뱉으며 내게 물었다.

“기사가 아니었나?”

무기에 맺히는 오러는 오직 소수만이 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그리고 오러 사용자는 필연적으로 오러에게 무명을 부여받을 수 있다.

오크 놈들에게 있어 무명은 서전트 이상이 지니는 타고난 상징이며 우리 인간에게는 기사임을 증명하는 천명.

하지만 나는 놈의 말대로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

기사가 되지 못한 종자, 이방인이라는 태생적인 차이가 만든 저주.

나는 반 토막이 나버린 롱소드를 조용히 내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기사가 아니었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닌 옅은 흥분이었다.

손에 배긴 굳은살처럼 검이 주는 흥분은 아직 내 몸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도망쳐요!’

고개를 들자 이미 포기해버린 소녀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노예처럼 살아온 인간에게 있어 죽음을 의미하는 오크 서전트.

그것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자 그간 북방을 얼어붙게 만든 원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는 대신 8년 동안 닦기만 했던 왕의 검을 뽑았다.

그간 나를 꾸짖고 혼내던 칼날은 오늘만큼은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스르르릉.

오러가 없다, 무명을 받지 못했다.

그 사실은 왕의 죽음 직전까지 나를 괴롭혔던 무거운 숙제였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오러를 뽐내는 전사들 앞에서 물러난 적이 없었다.

마치 한 몸처럼 내 손에 감기는 왕의 검.

검날을 때리는 싸라기눈이 날카로운 무형을 따라 허공에 멈췄다.

처음은 부정이었다.

내 몸이 오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도, 검에게 무명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전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현실은 나에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라 종용했다.

반쪽짜리 검.

평생 기사가 되지 못하는 종자.

시선이 보내는 열등보다 아픈 것은 내 성장을 막은 커다란 벽이었다.

죽도록 노력했다.

손바닥과 뼈가 헐어라, 검을 휘둘렀고,

만년설을 넘어 나를 시험했다.

하지만 인간이 그토록 사랑하던 북방은 내게 어떠한 대답도 주지 않았다.

그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계속 걸으라, 조용히 재촉할 뿐이었다.

물론 왕이 죽고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방법을 찾아 헤맬 뿐이다.

“아쉽군, 오랜만이라 기대했는데.”

후웅 - -!

내가 검을 뽑았다.

하지만 오러는 맺히지 않았고 흥미를 잃은 오크 서전트는 육중한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나와 소녀를 향해 휘두르며 오늘 일어난 사건을 마무리하려 한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내리는 눈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오러의 불길.

하지만 내가 두 눈을 감자 잔잔한 호수 위로 두꺼운 파동이 떨어졌다.

조용히 검 손잡이를 움직였다.

사각 - -!

“- - - - - - - - !”

날이 날을 타고 경로가 변경된다.

순식간에 내 검날을 빗겨지나 간 도끼는 허공을 갈라 표적을 놓쳤다.

경악하는 오크 서전트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소녀.

분명 오러가 날에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검은 부서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놈의 목을 노리며 쏟아지는 눈사태처럼 뻗어나갔다.

서걱!

3번이다.

아무리 뛰어난 대장장이가 만들어냈다 할지라도 무기는 오러를 3번밖에 버틸 수 없다.

그만큼 오러 사용자와 비사용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멀었다.

하지만 나는 수없이 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한가지 묘리를 보았다.

오러가 없는 검술에도 그 머나먼 간극을 메울 한가지 틈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너, 너! 인, 인간······!”

절묘함.

종이 한 장 들어갈 공간.

내 검은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오러가 맺힌 도끼날을 흘렸다.

그리고 놈의 가슴팍 한가운데 사선으로 된 상흔을 남겼다.

검이 세 번째 격을 버티지 못한다면 3수로 적을 베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할 때 나는 아득한 가능성을 보았다.

바로 북방 검술의 끝.

“크아아아아 - -!!”

스걱.

붉게 눈을 물들인 놈이 발악한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일격과 오러도 20가지 형이 주는 묘리 앞에 힘을 잃는다.

타고난 힘과 재능에 배신당하고 결국 자세마저 무너져 내린 오크 서전트.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회전시켜 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힘에 모든 것을 실어 힘껏 참격을 앞으로 내지른다.

서걱!

두둥실.

움직임은 소복이 내린 눈처럼 가볍다.

검은 몰아치는 바람만큼 빠르다.

한곳으로 모이는 타점, 순식간에 목을 베고 머리는 허공에 떠오른다.

잘려 나간 피마저 숨죽이는 그 찰나는 또 다른 투쟁을 예견하는 축포였다.

내가 검을 집어넣자 허공에 떠오른 붉은색 머리통이 바닥에 쓰러졌다.

툭.

돌아오지 못할 길에 들어섰다.

8년간 벌인 도주 생활은 조금 전 일격으로 인해 모두 소용이 없어졌다.

하지만 나는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작은 희망과 잊은 줄 알았던 전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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